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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훈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어금니 꽉 깨물고 스마일

벚꽃 소식이 한창이던 지난주. 21세기인 지금과는 이미 세기부터 차이가 나는 1999년, 제가 처음 서울에 올라와 직장생활을 할 때 동료였던 이가 참 안타까운 나이에 세상을 먼저 떠났습니다. 장례식장이란 곳은 참 신비로운 곳입니다. 고인에 대한 애끊는 이별이 있는가 하면 그런 때 아니면 못 만나는 이들과의 반가운 해후가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테마인 장례식장에서 산 자와의 만남을 향유한다는 것 자체가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이겠지요. 현역 프로 레슬러이자 격투기 해설위원이며, 종종 라디오와 텔레비전에 얼굴을 들이미는 저에게 서로 안부를 물으며 근황을 이야기하다보면 99% 듣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말을 들을까요?

대화의 흐름은 대략 이렇습니다. 요즘 한국에선 프로 레슬링 경기가 별로 없어서 주로 일본에서 경기를 한다고 하면 여비는 어떻게 충당하냐고 묻습니다. 주최사에서 파이트머니 외에 비행기표값과 호텔비를 따로 지급한다고 하면 하는 말이, “참 재밌게 사네”입니다. 이젠 제법 귀에 인이 박여서 그러려니 하고 넘길 법도 한데 그날따라 500번 사포처럼 저도 까칠해지더군요. 아는 형네 집에 얹혀살면서 한솔엠닷컴 018 휴대전화를 쓰던 시절의 지인. ‘오래된 인연이니까 날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내 기분을 망치는 말은 하지 않을 거야’라는, 저도 모르게 내심 기대를 한 게 있었나 봅니다. 세상을 떠난 고인이 계신 곳이니만큼 그리고 이젠 햇수로 두 자릿수를 훌쩍 넘긴 사회생활 경력의 중요한 득템인 포커페이스로 표정과 내면을 격리시키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재밌게 산다는 말은 분명 그 문장만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결코 생산직이나 사무직 노동자에게 사용하지 않습니다. 친숙하지 않거나 또는 간단명료하게 정리가능한 영역의 직업이 아닌 사람들이 이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 프로레슬러, 만화가 또는 영화평론가 같은 사람들 말이죠. 재밌게, 라는 말은 사전적으로는 부정적 의미를 담고 있지 않지만 이런 경우 이 문장의 청자가 별다른 노력없이 색다른 취향과 행운을 버팀목 삼아 세상을 즐기고 있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결코 그런 것은 아닌데 말이죠. 현역에서 활동 중인 프로 레슬러 수가 지리산의 야생반달곰 수보다 적은 나라에서 활동하면서 이웃 나라에서 항공비와 호텔까지 제공받으며 원정경기를 하기까지, 제가 얼마나 링 위에서 많이 거꾸로 박히고 철제의자로 두드려 맞았을까요. 얼마 전까지 만화책을 공터에 쌓아놓고 화형식을 했던 나라입니다. 출판만화시장은 거의 궤멸됐습니다. 이런 나라에서 만화가들은 어떤 생존철학을 갖고 있어야 할까요. 영화평론가요? 지금 독자가 보시는 이 글이 실린 이 잡지가 1천만 영화가 뻥뻥 터지는 이 나라에서 유일한 인쇄매체 영화잡지입니다.

참 재밌게 사네. 이 말이 제 머릿속에서 계속 빙빙 돕니다. 그러면서도 저부터 타인이 노력해서 얻은 결과를 의미없이 격하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해봅니다. 참, 그리고 저는 재밌게 사는 게 아닙니다. 엄청나게 치열하게 사는 겁니다. 어금니가 빠개지도록 꽉 깨물고 사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