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2
영화 장인들의 편지
진행 주성철 정리 윤혜지 사진 백종헌 2013-05-23

<씨네21> 창간 18주년 기념 토크쇼: 김상범 편집감독, 류성희 미술감독, 김우형 촬영감독, 장성호 모팩 스튜디오 대표

창간 18주년을 맞아 <씨네21>이기에 할 수 있는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다.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으나 쉽게 만날 수는 없었던 영화 제작의 숨은 주역들과 함께하는 토크쇼다. 5월3일엔 주성철 기자의 진행으로 김상범 편집감독과 류성희 미술감독을, 5월6일엔 이화정 기자의 진행으로 김우형 촬영감독과 장성호 모팩 스튜디오 대표를 게스트로 모셨다. 현장에서만 보고 들을 수 있는 디테일한 에피소드부터 영화 제작 작업에 끌리게 된 사적인 이유까지, 스탭들이 전하는 상세하고 내밀한 이야기에 함께 귀기울여보자. 말하자면, 선배가 후배에게 부치는 다정한 편지다. 행사 진행에 있어 많은 도움을 준 명필름과 명필름 문화재단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도전하라, 부딪히고, 이겨내라

<씨네21> 창간 18주년 기념 토크쇼 1편: 김상범 편집감독과 류성희 미술감독

▶ 어떻게 영화 일을 시작하게 됐나요?

류성희(가운데)_전공도 아닌데 어떻게 영화미술을 시작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 어릴 때부터 영화는 좋아했지만 직업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비틀쥬스>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세계가 그 당시 나의 로망이었다. 함께 유학 중이던 친구가 영화미술 관련 대학원을 준비하는 걸 보고 나도 원서를 넣어봤다. 합격자 한명이 못 온다고 해서 나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일단 합격하니 하고 있던 다른 일들은 다 포기가 되더라. 김상범 감독님께선 가업을 이어받으신 셈인데.

김상범(오른쪽)_부친이 고 김희수 편집감독이다. 내가 결정적으로 영화 일을 시작한 계기는 임권택 감독의 <짝코>를 보고나서였다. 좋은 이야기는 어떻게든 영화가 된다는 걸 그때 알았다. 조감독으로 참여한 <겨울나그네>가 흥행에 성공하니까 바로 여러 군데서 의뢰가 들어와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게 됐다. 연출을 꿈꾸며 시나리오 작업을 오래 했지만 결혼 이후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그때 아버지의 수입이 안정적이었다는 기억에 편집 일을 시작했다. (웃음) 무작정 편집실을 차렸는데 첫 작업이 <미술관 옆 동물원>이었다. 운이 좋았지.

류성희_보통은 영화하면 쪽박 찬다는 얘길 하는데, 수입이 안정돼 보여서 시작했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 (웃음)

▶ 편집과 미술, <올드보이>로 만나다

김상범_박찬욱 감독과는 <올드보이> 하기 전에도 가까운 사이였다. 십년 뒤에도 잊혀지지 않을 작품을 하자고 해서 시작한 게 <올드보이>다. 편집할 때 미술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공간이 주는 긴장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영화의 리얼리티란 결국 ‘영화적인 사실감’이 어떻게 전달되느냐의 문제다. <올드보이> 속 공간들은 이 질문에 대한 류 감독의 대답이었던 것 같다.

류성희_<올드보이>는 나에게도 가슴 뛰는 작품으로 남아 있다. <올드보이>에 쓸 벽지를 고르고 있는데 작업실에 봉준호 감독이 놀러왔다. 내가 고른 벽지를 보고 봉준호 감독이 “이렇게 강렬한 공간에서 배우들이 어떻게 연기를 하겠냐”면서 걱정하더라. <올드보이>가 마지막 영화가 되는 건가 싶어 눈앞이 캄캄했다. 다음날 바로 박찬욱 감독님을 찾아가서 너무 세지 않냐고 물었더니 감독님이 보다가 한마디만 남기셨다. “하려면 세게 하고, 아니면 말라”고.

김상범_사실 그때 박 감독이 걱정이 많았다. (웃음) 그래도 어쨌든 류 감독에게 동의를 한 거지. 그 덕에 나도 <올드보이> 작업이 신이 났다. 편집 작업을 반복적으로 하다보면 타성에 젖기 쉬운데 류 감독이 설정한 색감과 채도가 화면을 압도하니까 나도 최대한 남들과 다른 컷을 찾고, 다른 장면을 구사해보려고 했다.

류성희_난 프리 프로덕션의 스탭이고, 김 감독님은 포스트 프로덕션 스탭이다보니 일로만 보면 만날 지점이 없지만 우리는 항상 박찬욱 감독님과 콘티를 같이 봤다. 박 감독님 영화는 편집을 빼고는 말할 수 없으니 자연히 내 작업도 편집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래도 내가 앞에서 못하면 김 감독님이 뒤를 맡아주실 테니까 안심했다. (웃음)

김상범_편집도 미술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롱테이크는 연기자의 호흡만으로 부족할 때가 있다. 류 감독과 작업을 할 땐 상상의 폭이 넓어져서 편했다. 공간만 잡아도 화면을 다 채울 만한 기운이 있었으니까.

▶ 일 자체를 즐겨야 하는 숙명

김상범_내 편집 작업의 기본 원칙은 ‘낯설게 하기’다. 컷 포인트의 보편적인 룰은 무시한다. 처음엔 낯설지라도 관객은 금방 익숙해진다. 그다음 원칙은 감독의 호흡을 살리는 일이다. 단 모든 장면이 감독의 호흡대로 가면 그 영화는 재미없어진다. 여기서 필요한 건 몇 군데만 제대로 감독의 컬러를 살리는 것이다. 그래야 영화가 풍부해진다.

류성희_낯설게 한다니까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 <올드보이>에서 우진(유지태)이 사는 펜트하우스를 설정할 때였다. 사실 나는 상위 1%의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몰랐으니까 막막하더라. 예산도 많지 않아서 과감한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가구를 최소한으로 놓고, 우리가 평소 갖지 못한 것들을 보여주기로 했다. 관객은 낯선 공간을 상상력으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게 수로를 만들자는 아이디어였다. 여기에 더해 자동으로 여닫는 옷장 같은 몇 가지 포인트를 줬다. 박 감독님이 수로를 한참 보시더니 “여기서 손을 씻으면 되겠네” 하시더라. 손 씻는 장면 하나로 이 낯선 공간을 살아 있게 만드셨다. 영화미술 작업하는 재미가 이런 거다. 나의 작업이 연출자의 아이디어와 만나서 크리에이티브한 결과를 내는 것. 김 감독님만의 노하우도 있을 것 같다.

김상범_내 경우는 시나리오를 오래 보는 것이다. 시나리오를 여러 번 읽으면 감독의 욕구가 보인다. 작업하는 내내 계속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감독의 머릿속으로 들어가보고, 감독이 말하는 부분과 편집 사이의 합의점을 찾아나간다. 편집은 자르는 작업이 아니라 이어붙이는 작업이다. 최대한 이어붙여서 가능한 한 많이 보여주는 것. 하지만 감독이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으면 영화가 그 욕망을 다 소화하지 못한다. 이때 편집감독은 감독의 생각을 충실히 이해한 뒤에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해줘야 한다. 사과나무에 사과만 열리면 되지, 복숭아도 열리고, 바나나도 열려서야 쓰겠나.

류성희_정서적인 반응을 시각화하는 작업을 하다 보니 나는 처음 읽을 때의 감정이 중요해서 두 번째 읽을 때와 시간을 많이 두려는 편이다. 직관을 믿어야 하는데 두 번째로 읽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분석적으로 보게 된다. 그렇지만 김 감독님 말씀을 듣고 보니 앞으로 시나리오를 더 열심히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웃음)

김상범_감독의 컷 취향도 중요하다. 감독이 유난히 싫어하는 컷이 있을 수 있다. 내 판단에 그 컷을 붙이는 게 맞더라도 감독이 싫다고 하면 두말 없이 바꾼다.

류성희_내 작업에서 가장 최우선은 감독의 의견이다. 나는 감독에게 맞춰가면 된다. 서로 원하는 걸 이야기하고, 설득하는 과정이 전부 행복하다. 하지만 항상 내 의견이 관철될 순 없으니 일 자체를 즐겨야 하는 게 스탭의 숙명인 것 같다.

김상범_맞다. 그런 고충을 감수하고라도 영화가 좋다면 누구든 스탭에 도전해봐도 괜찮을 것 같다. 부딪쳐 상처받으면 못 견디는 거지만, 그 상처를 단단하게 굳힐 수 있다면 적성에 맞는 거겠지. 그러다보면 언젠가 나와도 동료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류성희_기술이야 금방 익히지만 작업 자체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끝까지 가더라. 혹시라도 영화가 하고 싶다면 너무 고민 말고 일단 뛰어들었으면 좋겠다. 하다 보면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영화와 닮은 자신의 인생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김상범 편집감독

은교>(2012) / <베를린>(2012) / <건축학개론>(2012) / <아저씨>(2010) / <기담>(2007) /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 / <왕의 남자>(2005) / <친절한 금자씨>(2005) / <쓰리, 몬스터>(2004) / <올드보이>(2003) / <피도 눈물도 없이>(2002) / <복수는 나의 것>(2001) / <공동경비구역 JSA>(2000) / <미술관 옆 동물원>(1998)

류성희 미술감독

<고지전>(2011) /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 / <괴물>(2006) / <달콤한 인생>(2005) / <쓰리, 몬스터>(2004) / <올드보이>(2003) / <살인의 추억>(2003) / <피도 눈물도 없이>(2002) / <빤스 벗고 덤벼라>(2000)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