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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태] 감독질? 폼 잡고 싶은 마음 전혀 없다
이화정 사진 백종헌 2013-05-31

<마이 라띠마>로 장편 데뷔하는 유지태 감독

연출자 유지태는 이미 낯설지 않다. <자전거 소년>(2003)을 시작으로 <장님은 무슨 꿈을 꿀까요?>(2005), <나도 모르게>(2007) 등 네편의 단편을 통해 자신의 연출세계를 선보여왔다. <마이 라띠마>는 가진 것 없는 남자와 타이 이주여성이 보여주는 고독한 사랑 이야기로 배우 유지태의 첫 장편 데뷔작이다. 이주민, 호스트, 노숙인 등 영화에 등장하는 사회 밑바닥 계층의 소외된 인물들을 통해 그는 이 한편의 작품이 아닌 앞으로 자신이 영화를 통해 추구해나갈 가치를 설파하고 있다.

-첫 장편으로 제15회 도빌 아시아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 연기상복이 별로 없었던 것과 비교된다. (웃음) =도빌영화제는 아시아영화발굴에 있어서는 정평이 난 영화제다. 디렉터가 딱 한마디 하더라. “영화가 좋아서 불렀다”고. 그 이상 뭐가 더 필요하겠나 싶더라. 한국에서였다면 배우 유지태에 대한 후광도, 선입견도 있었을 텐데 순수하게 영화로만 평가받은 거라 기분이 좋다.

-‘배우 유지태’는 감독으로 활동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아니었나. =어느 감독이 그러더라. “넌 로버트 레드퍼드는 못되겠구나”라고. 수상을 하지 못한 때였는데, 그러니 ‘이제 너는 망했다’는 거다. 감독들 누가 배우로 고용을 하겠냐는 거였다. ‘감독질’한다는데. ‘배우가 무슨 영화를 만들어’ 같은 폄하하는 시선도 많다. 난 감독하면서 폼잡고 싶은 마음 없다. 영화는 내 오랜 꿈이었다. 첫 출연작 <바이 준>(1998) 때부터 현장에 장비 가지고 다니면서 단편을 찍었다. 좋은 연기자와 좋은 감독, 이 두 가지를 병행하고 싶었다. 나에게는 왜 영화를 만드느냐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사람들은 그저 ‘영화 한편 만들었네’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회에 공헌하고 시스템 전반을 개선하겠다는 목표가 없다면 내겐 영화를 만드는 게 무의미하다.

-<마이 라띠마>는 오래전부터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작품이라고 들었다. =한 소년의 성장기를 그리고 싶었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정사>(1960),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환상의 빛>(1995) 혹은 <아무도 모른다>(2004) 등 이 영화를 만들기까지 많은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 역사적 배경을 빼놓고 그냥 작품으로만 본다면 <반딧불의 묘>(1988)처럼 어린아이들이 세상과 부딪치면서도 삶의 희망을 찾아나가는 그런 영화들을 막연하게 만들고 싶었다.

-원래 염두에 두었던 모양과 달리 지금은 이주민인 마이 라띠마(박지수)와 다 큰 어른 수영(배수빈)의 꿈과 좌절이 중심에 있다. =배우로 참여한 것까지 세보니 22작품에 참여했더라. 그 경험들에서 내가 배운 것이 있다면 영화를 작업하려면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는 거였다. 내 고집을 버리고 최대한 현장에 맞춰서 움직여야 한다. 나 역시 이 영화가 이렇게까지 저예산(3억5천만원)으로 만들어질지는 몰랐다. 그렇지만 모든 걸 빨리 받아들여야 한다. 수영 캐릭터는 원래 19살가량의 배우를 찾았는데, 악한 면까지 끄집어내줄 배우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어릴 때는 좋은 역, 나쁜 역이 분리되어 있고 고충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을 거다. 나도 배우라 그런 점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모 배우에게 거절을 당하고 나서 배수빈씨한테 시나리오를 보냈다. 모니터해 달라고 보냈는데 본인이 하겠다고 하더라. 어, 이게 아닌데, 생각 좀 해보고 하자고 했다. (웃음)

-배수빈의 참여가 영화에 준 영향이 컸나. =배수빈씨가 수영 역을 연기한다면, 덜 자란 남자가 자신의 무책임한 행동 때문에 사랑하는 여자가 망가지는 모습을 보고, 본인이 결국 성장하게 되는 그런 모습을 생각했다. 시나리오를 다시 고쳐보겠다고 했다. 쉽지 않았다. 너무 막막해서 배수빈씨를 인터뷰했다. 수영하고는 전혀 다른, 평탄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고 맑은 영혼을 가진 사람이더라. 그 이미지를 수영의 이미지에 결부했다. 생각해보면 단편 <나도 모르게> 때도 주연을 맡은 조안씨와 이야기하면서 개똥별에서 온 이미지를 떠올렸다.

-배우의 특성을 시나리오에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편인가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건 내 생각일 뿐이다. 나머지 것들은 빨리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자전거 소년> 때도 주연을 맡은 민수가 엄청 무뚝뚝했는데, 영화는 결국 그 모습을 반영한 결과물이었다. 민수에게 연기하라고 했더니 7분을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더라. 그런 성격의 민수를 내가 준비해간 콘티에 무조건 담을 수 없었다. 배우들과 각자의 선은 지키되 같이 만들어가려 한다.

-마이 라띠마의 비중도 크다. 제목도 그렇고, 마이 라띠마라가 수영과 동등하게 다루어지는 구도다. =여성이 가진 시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남성보다 여성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영화들을 선호한다. 마이 라띠마 캐릭터를 위해 이주자들과 가진 인터뷰나 다큐멘터리, 극영화, 책 등 여러 작품을 접했다. 그러면서 사실주의에 입각해서 너무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부분은 가급적 자제하자고 생각했다. 이 사회에 대해 감독이 가진 잘못된 정의로 이분법적인 사고를 부추길 수 있겠다 싶었다. 영화를 만드는 게 공익사업은 아니다. 이주민들이 가진 딜레마를 정확히 파헤치되 고발영화는 만들지 말자고 생각했다. 장르영화로 만들고, 관객이 부담없이 바라보고 나중에 그 부분에 관해서는 생각할 여지를 주는 게 목표였다.

-이주민들의 고충, 코리안드림 같은 이야기들이 부각되는 걸 피할 수 없다. =처음에 시나리오 단계에서 가장 반대의견이 많았던 게 마이 라띠마 부분이었다. 너무 반복적이니 덜어내자는 의견이 많았다. <방가? 방가!>(2010)나 <완득이>(2011)처럼 코믹하고 라이트하게 가자는 거였다. 그런 영화는 내 취향과는 맞지 않았다. 영화 나오고 나서는 수영 부분을 좀 버리고 이주민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자는 의견도 많았다. 결국 내 고집을 버리지 않았다. 만약 처음 생각했던 성장영화를 포기하고 이 시점에서 소재주의 영화를 만든다면 나부터 실패한 거라고 생각했다.

-표면적으로 이주민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신파 멜로영화 구조를 띠고 있다. 그 지점에서 봐야 더 재밌을 것 같고. =결국 멜로로 풀어가는 게 맞다라고 판단했다. 원래 내가 건조한 영화를 좋아하고, 감정이입시키는 영화를 지양하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영화를 만들 때 너무 소통이 힘들어지더라. 그래서 이번엔 그런 내 성향을 피해보자 싶었다. 좀더 관객에게 친절하려고 했고, 멜로적인 성격도 더 많이 첨가했다. 게다가 내가 원래 진지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웃음) 그래서 이번엔 반대로 ‘영화는 영화다’라는 생각을 하자 했다. 초반에 마이 라띠마가 거리에서 폭행을 당하는데, 그녀와 전혀 상관없는 수영이 갑자기 뛰어들어서 구한다. 머리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1차적인 만남이다. 마이 라띠마를 오랫동안 지켜보고 상황을 이해하고 도움을 주는 게 더 말이 되겠지만, 영화라면 이런 즉흥적인 만남을 주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직접 설립한 영화사 ‘유무비’를 통해 연출 외에 제작까지 겸했다. 단편 작업 때와 다른 고충이 있었겠다. =첫 작품이 개봉하고 많이 두근거릴 거라 생각할 텐데, 그런 마음은 부산영화제 때 상영하고 다 끝난 거 같다. 그만큼 힘들었다. 제작자에게 시나리오 돌린 것부터 따져보면 햇수로 무려 5년이 넘는 시간이었다. 직접 제작은 하지 않으려고 제작자를 찾아보려고도 했다. 영화를 만들면서 말 못할 제작비화가 많았다. 투자를 받는 과정에서 박탈감도 상당했다. 모니터 앞에서 오지도 않는 답변을 기다리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래서 사람들이 상실감을 느끼는구나, 자살을 하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 시나리오를 바로 쓰레기통에 넣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더라. 돈 많은 유지태에게 왜 우리가 돈을 줘야 하냐고. 다양성 영화 지원도 나한테는 더 냉정하다. 그런 편견은 내가 스타로서 삶을 살고 있으니 충분히 감내하는 지점이다. 서운해하지 않는다. 유연하게 생각하려고 한다. 투자 안되면 독립영화, 저예산영화로 만들 거다. 옛날에는 영화를 만드는 게 열정과 희생이었는데, 지금은 희생은 좀 줄이고 열정으로 만들려고 한다.

-희생절감 차원에서, 제작비의 60%를 스탭 개런티로 책정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상적인 제작 방식을 어떻게 보나. =예산에 있어서 저예산영화의 한계 제작비를 정하는 게 필요하다고 본다. 저예산이라고 해서 독립영화라 오해하고 다가가면 안된다. 저예산영화의 시스템이 있어야 하는데, 이건 개인이 아니라 기업이나 정부 차원에서 만들어야 한다. 5억원 정도가 최소한의 한계선이라고 본다. 안 그러면 스탭이나 후반작업 업체나 현장 기술직들이 그 희생을 고스란히 떠안는다. 이번엔 내가 그 희생을 감수했다. 개런티와 기획개발비 모두를 포기했다. 누군가는 이런 내 모습을 보고 허세 부린다, 배우니까 그러는 거다, 라고 말하지만 본인 입장이 되면 그런 말 못할 거다. 한국 영화계는 인적 자원 부분의 손실이 너무 크다. 경력자들이 생계 때문에 현장을 다 떠난다. 나 역시 배우가 아니었다면 투잡해서라도 돈 벌어야 했을 거다.

-배우로서 공포, 스릴러, 사극, 현대극, 가릴 것 없이 장르의 보폭이 넓었다면 연출작은 주로 따뜻한 소재에 집중한다. =10여년 전부터 나눔 활동을 해왔다. 22편의 작품이 내 인생인 것처럼 나눔 활동도 내 삶이다. 그러다보니 가치관에도 영향을 받는 것 같다. 뛰어난 감독 중에 악마성을 가진 사람이 있고, 그게 그의 매력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영화보다는 좀더 사람의 드라마에 집중하는 작품을 선호한다.

-연출자로서의 가치관이 배우의 가치관과 충돌하진 않나. =그게 딜레마다. 지금은 생각을 비우는 중이다. <심야의 FM>(2010) 때 후원하는 아이들을 만나 같이 영화를 봤는데, 삼촌, 삼촌 하면서 따르던 아이들이 영화 보고나서는 옆에 안 오더라. 영화 속 살인자 역할과 혼동이 온 거다. 충격이 컸다. 역할을 하는 동안은 그 역할에 푹 빠진다. 배우들은 다 그런다. 아는 선배는 엘리베이터에서 살인 충동을 느꼈다더라. 물론 살인자 역할을 한다고 살인자가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후배였던 이은주씨가 고인이 되고 보니 이런 문제를 함부로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가족도 요즘은 내가 워낙 역할에 빠져드니 그런 역할은 좀 피하라고 하더라. 아무튼 지금은 판단 보류다.

-배우 유지태의 계획은 무엇인가. 찍어둔 작품도 있다. =김상만 감독의 <더 테너: 리리코 스핀토>와 사카모토 준지 감독의 <인류자금>은 촬영을 마쳤다. 사카모토 준지 감독과는 10여년 전 DMZ다큐멘터리영화제 트레일러를 만들 때 주연을 하면서 인연이 이어졌다. 같이 작품을 하자기에 시나리오도 없는데도 흔쾌히 수락했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행동파 악역이다. 카메오 정도로 생각했는데, 정말 촬영분량이 많더라. 액션도 많고. (웃음)

-감독으로서의 계획도 궁금하다. =존 카사베츠가 라디오 방송에 나와 “상업적으로도, 작품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 그러니 투자해달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투자받아서 만든 영화가 <그림자들>(1959)이다. 나도 <마이 라띠마> 하면서 그렇게 해봤다. 근데 난 이상한 데서 연락이 오더라. (웃음) 투자를 해줄 테니 선거 활동에 와 달라, 이런 식이다. 시나리오 두편을 작업 중인데, 그래서 아직은 안 밝히려고 한다. 당장은 연출이 먼저일지, 연기가 먼저일지 아직 잘 모른다. 그런데 이걸 규정짓고 나누는 시간이 무모하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틈틈이 시나리오 쓰고 연기도 하는 영화인이 되고 싶다. 그 목표만으로 계속 바쁠 것 같다.

공덕동 스튜디오에 유지태가 땀을 뻘뻘 흘리며 초여름 더운 공기를 잔뜩 안고 들어왔다. 압구정에서 광고 촬영을 마치고 자전거로 40분간을 달려왔다고 했다. 최근에 접는 자전거를 사서 손쉽게 타고 다닐 수 있어서 너무 좋다고 했다. 메이크업도 하지 않은 채 그는 카메라 앞에 섰다. 괜찮냐니, 그런 건 상관없다고 한다. 이번엔 ‘감독’이란 호칭으로 부르자고 했더니, 그냥 편하게 ‘유지태 씨’라고 부르라고 했다. 가지고 온 커다란 가방이 하도 무거워 뭐가 들었냐고 물어보니 작업할 노트북이라고 했다. 화장품 광고 속 유지태와는 다른 평범한 영화인 유지태와의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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