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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잘 붙인 제목 하나 열 줄거리 안 부럽다
김혜리 2013-06-07

▲모델애니메이션과 특수효과의 거인 레이 해리하우젠이 5월7일 타계했다. 그가 괴물을 창조한 <신밧드와 호랑이의 눈>은 (아마) 내가 극장에서 본 최초의 영화였을 거다. 어른이 된 뒤 감독 이름을 찾아보았지만 번번이 까먹는 걸 보면 아무래도 나는 첫 영화를 영영 ‘해리하우젠 작품’으로 기억할 모양이다. <호빗>의 용이 아무리 굉장한 위용을 드러내도 내겐 해리하우젠의 외눈 괴물과 해골부대만큼 무섭지 않을 게 확실하다. 해리하우젠은 진짜 동물도 종종 이용했다고 한다. 사진은 <신밧드의 일곱 번째 모험> 중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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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임>(Shame)의 주연배우 마이클 파스빈더가 2012년 <보그>와 가진 인터뷰를 읽었다. 무슨 이야기 끝엔가 그는 영화 제목이 참 마음에 들었노라고 했다. 그만 양손 맞잡고 공감해버렸다. ‘shame’은 우리말로 옮기자면 ‘치욕’보다는 부드럽고 ‘수치’보다는 탁한 느낌의 단어다. 위아래 입술이 맞닿은 채 끝나는 발음은, 단어의 여운을 입안에 괴게 만들어 이 말에 포함된 미지근하고 둔탁한 통증이 영원토록 우리의 몸 안에 머물 것을 예고한다. 사전에 의하면 ‘shame’은 본인의 그릇된 행동이나 실패, 어리석음의 결과로 얻는 고통과 후회다. 유의어인 ‘disgrace’는 ‘grace’의 반대말로서 불명예나 망신을 뜻하는데, ‘shame’보다 타인의 시선을 강력하게 전제하고 있다. 이 점은 창피하고 민망한 감정을 의미하는 ‘embarrassment’도 마찬가지다. 두 단어는 본인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망신거리가 되는 존재를 지칭할 때에도 쓰인다(예문: “넌 우리 집안의 수치야”(You are a disgrace to our family)). ‘shame’이 영화 <셰임>을 정확히 꿰뚫는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은 이 단어가 가리키는 수치심은, 누군가가 내 치부를 알든 모르든 관계없이 심장 옆에 묵직하게 똬리를 틀고 있는 부끄러움에 가깝기 때문이다. <셰임>의 브랜든은 섹스 중독을 세상에 들키지 않았을 때에도, 혼자 있는 방 안에서도 문득 치욕과 싸우는 표정을 짓는다. 나는 <셰임>을 보는 내내 예전 미셸 투르니에의 수필에서 읽은 ‘누드 초상’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체로 카메라 앞에 선 사람은 목 윗부분만 찍어도, 옷 입은 모델과는 다른 기운을 띤 얼굴 사진이 나온다는 이야기였다. 마이클 파스빈더가 연기하는 브랜든은 옷을 다 갖춰 입은 장면에서도, ‘누드 포트레이트’가 저런 것이겠거니 싶은 얼굴을 보여준다.

세상의 상식과 도덕을 위반해버렸다는 사실을 불행하게 돌아보는 감정이 죄의식(guilt)이라면, ‘shame’의 근원은 종교나 법 전에 우리 안에 느슨하게 형성돼 있는 인간됨에 대한 기준이 아닐까. 그것은 달리 말하면 개인의 일관성을 추구하는 자연스런 윤리의식이고, 삶의 균형을 지탱해 생존을 유지하려는 본능이기도 하다. ‘shame’의 사전적 정의에는 수치심뿐 아니라 수치심을 느낄 줄 아는 능력도 있다(예문: “넌 부끄러운 줄도 모르니?”(Have you no shame?)). 브랜든은 “망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의식하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자기를 미워한다. 요컨대 <셰임>의 핵심은 중독 자체라기보다 중독자가 중독에 대해 느끼는 격렬한 혐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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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임>의 브랜든은 괴상하거나 위험한 섹스에 탐닉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의 성생활에서 병적인 면은 비정상적으로 높은 빈도에 있다. 아침 샤워를 하면서도, 출근길에도, 사무실에서도, 온라인에서도 그는 쉬지 않고 오르가슴을 구한다. 시시포스의 형벌 같은 성욕이 만들어내는 참담한 풍경에 망연자실해졌다가 주변으로 슬쩍 눈을 돌리면 섹스를 뺀 브랜든의 일상은 참으로 휑뎅그렁하다. 오직 섹스에 집중된 욕망이 비워버린 삶의 나머지 코너에는 추억을 담은 액자도, 취미를 표내는 가구도 보이지 않는다(포르노 잡지는 광에 쟁여져 있다). 냉장고에는 배달 중국음식 용기 몇개가 전부다. 단 하나의 욕망이 초토화해버린 이 남자의 일상은 묘하게 친숙하다. (뒷일은 어찌됐든) 물자와 무한한 정보를 일단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방만한 세계에서, 우리는 자칫하면 편식하고 중독된다. 내가 소비한다고 믿었던 것들에 내가 소비되고, 생활은 넘치는 일부와 피폐한 나머지로 양극화되기 일쑤다. 브랜든의 섹스 중독은 희귀한 ‘변태’가 아니라, 과잉의 악마에 상시적으로 위협받는 우리의 이지러진 거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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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감독님. 그래도 절도는 절도인데…”라고 우물쭈물 항의했다가는 “됐고! 술이나 한잔 하쇼”쯤의 대꾸가 돌아올 것만 같다. 켄 로치 감독의 <앤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에서 가난한 스코틀랜드 청년 로비는 어리석었던 과거를 후회하며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려고 하지만 가진 것이라곤 선의와 천부적으로 뛰어난 후각뿐이다. 켄 로치 감독은 이 세계에서 ‘초기 자본’을 갖지 못한 이 청년이 갱생하는 첫걸음은 바로 그 선의와 후각을 자본으로 이용하는 길뿐이라고 말한다. <앤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의 법 의식(意識)에 의하면, 로비가 과거에 저지른 폭행과 같은 짓이 진짜 죄고, 부유한 감식가들이 가치를 기리며 대뜸 고가를 치르는 위스키 약간을 훔쳐내는 일은 천국의 법정이 허락하는 공정한 분배다. 아니, 천상까지 갈 것도 없이, ‘사회’라고 불리는 인간이 창조한 제2의 자연을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일종의 대류 현상이다. 숙성 중 위스키가 미량 증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역사 수업을 받은 지 하도 오래되어 가물가물하지만, <앤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를 보다가 산업혁명기 영국 노동자들이 겪었다는 당혹스러운 역사적 경험이 생각났다. 혁신적 기계에 밀려나 일자리를 잃고 노동환경이 악화된 섬유노동자들은 기계 파괴 운동으로 위기에 대응했는데 이것은 단순히 경제적 박탈감에서 빚어진 사태만은 아니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자본가로부터 생산 기계와 원자재를 받아와 가족 단위 가내수공업을 통해 완제품을 납품하며 살아온 숙련공들에게 산업혁명은, 삶이 기초한 가치와 가장의 자존심을 송두리째 박탈하는 폭력이기도 했던 것이다. 당시 역사적 일화 가운데, 산업혁명 이전 시대 노동자들은 생산과정에서 남는 재료라든가 이러저러한 우수리를 처분할 권한을 관행적으로 용인받았다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그것은 시혜라기보다 생산하는 사람의 당연한 권리의 일부로 여겨졌던 것이다. 추수가 끝난 밭의 낟알을 소작농들이 취할 수 있는 ‘이삭줍기’의 풍습과 비슷한 맥락이면서도 그것을 빼앗겼을 때 자존심의 상처는 더 컸을 법하다. 켄 로치는 예로부터 약자에게 허락된 ‘우수리’의 정당함을 증발이라는 자연현상에 빗대어 배짱 좋게 환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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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로 보나 주제로 보나 <앤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는 일링 코미디 <위스키 갤로어!>(1949)를 다시 뒤져보도록 만들었다. <위스키 갤로어!>의 배경은 제2차대전 막바지 스코틀랜드의 외딴섬. 전쟁에서 한 발짝 떨어져 사는 낙도 주민들에게 독일군의 폭격이나 기근에 버금가는 대재앙이 닥쳤으니, 생명수와도 같은 위스키가 동이 난 것이다. 우울이 섬을 뒤덮는다. 때마침 위스키 궤짝을 가득 싣고 연안을 지나던 화물선이 좌초되자 주민들은 암암리에 대동단결해 본토에서 파견된 관료와 군인을 따돌리고 위스키를 빼돌려 흥청망청 한때를 즐긴다. 단, 이 영화에서 위스키 도둑질은 치고 빠지는 흥겨운 해프닝으로 <앤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가 보여주는 계급사회에 대한 비평을 포함하진 않는다. 그보다 <위스키 갤로어!>가 세우는 대립각은 중심부와 지방의 정서 사이에 있다. 중앙의 법과 관료주의를 실컷 골려먹고 <위스키 갤로어!>가 무용담을 마무리 짓는 태도는 능청 그 자체다. 내레이션은 “하지만 훔친 위스키가 다 떨어지자 주민들은 다시 값이 오른 위스키를 사서 마실 엄두를 못 냈고 이후로는 내내 불행하게 살았답니다. 참 교훈적인 이야기죠?”라고 눙친다. 마치 “우리가 보기 좋게 한방 먹였지만 금방 다시 초라한 제자리로 돌아갔으니 너무 발끈하지 마시라”라고 비위를 맞춰준 다음, 조그맣게 “그래도 우리한테 한번 당했다는 걸 잊지 말라고”라고 덧붙이는 투다. 켄 로치의 직구도, <위스키 갤로어!>의 너스레도 각자의 방식으로 위력을 발휘한다. 두 영화는 한 마을에서 사이좋게 어울려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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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렉 다크니스> 유리문 숏의 3D

<스타트렉 다크니스>를 3D로 보아야 할 필요성은 보통 정도다. 우주 공간을 배경으로 한 영화가 3D에서 기본적으로 얻을 수 있는 광활한 공간감을 기대하면 된다. 뜻밖에도 이 격한 우주 액션 블록버스터에서 3D가 제일 멋진 효과를 내는 숏은, 위기에 처한 커크와 스팍이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손바닥을 맞대는 고요한 장면에서 나온다. 신의 내용은 <스타트렉>치고 지나치게 감상적이라는 불평을 받을 만하지만, 고작 유리 한장을 사이에 두고 서로에게 직접 닿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3D를 통해 한층 또렷이 새겨진다. 손, 유리, 손. 그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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