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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호의 오! 마돈나] 뉴 저먼 시네마의 아이콘

한나 쉬굴라 Hanna Schygulla

배우가 하나의 장르를 상징하는 경우가 있다. 존 웨인과 웨스턴의 관계가 그렇다. 또 배우가 하나의 미학을 대표하는 경우도 있다. 안나 카리나 혹은 잔 모로와 누벨바그가 그렇다. 뉴 저먼 시네마를 대표하는 배우 한명을 꼽는다면 영화인들은 단연 한나 쉬굴라를 떠올릴 것이다. 쉬굴라는 파스빈더를 만나 함께 연극을 하고, 함께 영화계로 진출해 그가 37살의 젊은 나이로 죽을 때까지 주요 영화에 모두 출연했는데, 그게 전부 파스빈더의 대표작이자 쉬굴라 자신의 대표작이고, 더 나아가 뉴 저먼 시네마의 대표작이 됐다.

문학 소녀, 파스빈더의 뮤즈가 되다

한나 쉬굴라는 문학을 좋아했다. 독일문학은 물론이고, 프랑스문학을 특히 좋아했다. 대학을 다니며 연기가 배우고 싶어 연극 스튜디오에 다녔는데, 그곳에서 훗날 뉴 저먼 시네마의 대표 감독으로 성장하는 파스빈더를 만났다. 첫인상은 별로였고, 약간 거칠어 보이는 그에게 관심도 없었다. 쉬굴라는 뮌헨대학교 문학부 학생이었고, 파스빈더는 공적인 경력이라곤 거의 내세울 게 없는 건달이나 다름없었다. 때는 1966년, 쉬굴라는 23살, 파스빈더는 21살이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두 사람 사이의 평생의 관계는 시작됐다.

파스빈더는 고아나 다름없는 성장기를 보냈다. 6살 때 부모는 이혼했고, 그는 아무도 보살펴주는 사람 없이 거의 혼자 자랐다. 그는 학교에 전혀 적응하지 못했다. 초등학교도 여러 번 전학 가며 겨우 졸업했다. 혼자 있기를 죽기보다 싫어할 정도로 외로움을 잘 타는 이 소년은 시 쓰기와 그림 그리기를 빼고는 모든 과목에서 낙제점을 받았다. 파스빈더의 예술적 상상력은 사춘기가 된 뒤, 드라마에 대한 애정으로 발전했다. 학교를 안 가는 소년은 거의 매일 영화관이나 극장에서 살았다. 청년이 된 뒤, 그는 연극을 알고 싶어 그 스튜디오를 찾아간 것이다.

쉬굴라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처럼 금발의 곱슬머리에 육감적인 몸매로 뭇 남성의 관심을 끌었는데, 파스빈더로부터는 아무런 시선을 끌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파스빈더의 입장은 달랐다. 그는 첫눈에 쉬굴라를 좋아했다. 만약 자신이 연출가가 된다면 그녀를 배우로 쓰겠다고 다짐할 정도였다. 파스빈더는 외모에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고, 용기가 없어 쉬굴라에게 다가가지 못했을 뿐이었다.

소위 ‘68 혁명’이 유럽을 휩쓸 때, 파스빈더는 ‘안티 테아터’(Anti-Theater, 반연극이란 뜻)라는 극단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그는 동료들과 일종의 ‘코뮌’(comune)을 형성했다. 말하자면 함께 창작하고 공연하며, 함께 살아가는 조직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공연은 무엇보다도 먼저 생활비를 벌기 위한 터전이었고, 그래서 끝없이 공연을 올려야만 했다. 여기서 파스빈더는 능력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는 불과 23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대본, 연기, 연출 등 공연의 주요 역할을 도맡으며 극단의 리더가 됐다. 파스빈더는 다시 학교로 돌아간 쉬굴라를 불러내,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의 주연을 맡겼다. 드디어 두 사람 사이의 본격적인 협업 관계가 시작된 것이다.

파스빈더의 장편영화 데뷔작인 <사랑은 죽음보다 차갑다>(1969)가 곧 쉬굴라의 영화 데뷔작이다. 할리우드의 갱스터 장르와 고다르의 브레히트 스타일을 혼합한 이 영화에서 쉬굴라는 범죄자들에게 착취당하는 창녀로 나온다. 낯선 형식 때문에 관객과 금방 친해질 수는 없었지만, 영화의 주인공인 쉬굴라는 허공을 바라보는 텅 빈 시선, 매사에 관심이 없는 넋놓은 태도, 세속적인 욕심과는 거리가 먼 단념한 분위기 등으로 단박에 관객의 시선을 끌었다.

빨리 찍기로 유명한 파스빈더는 두 번째 장편 <카첼마허>(1969)를 불과 9일 만에 촬영했는데, 독일사회에 늘어나기 시작한 외국인 노동자와 외국인 혐오증을 표현한 것으로, 유럽 내 시네클럽의 히트작이 됐고, 파스빈더는 물론 쉬굴라까지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카메라를 지배하려는 일반적인 배우들과 달리 카메라로부터 떨어져 있으려는 쉬굴라의 체념한 듯한 태도는 감정이입을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낯선 연기였다. 브레히트의 영향이 컸는데, 결과적으로 그의 연기에는 늘 여유가 보였다.

시대극 <에피 브리스트>(1974)의 성공으로 두 사람은 시네클럽을 넘어 일반 관객에까지 알려진다. 테오도르 폰타네의 소설을 각색한 것으로, 파스빈더가 멜로드라마에서 특별한 기량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린 작품이다. 부르주아 계급의 순응주의를 비판한 내용인데, 이 작품의 성공으로 두 사람은 데뷔 5년 만에 독일을 대표하는 영화인이 됐다. 그러나 아쉽게도 두 사람은 제작 과정에서 작품 해석을 둘러싸고 의견 충돌을 빚고, 결국엔 헤어지고 만다. 쉬굴라는 영화를 더이상 하지 않겠다며, 뮌헨대학교로 돌아가 미뤄뒀던 문학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앙금이 컸던지, 쉬굴라와 파스빈더가 다시 만나는 데는 5년이 걸렸다. 쉬굴라의 복귀작은 파스빈더의 영화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1979)이다. 전후 독일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는 기구한 운명의 여성을 그린 작품으로, 쉬굴라는 베를린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영화는 전세계로 소개됐다. 미국 영화계는 쉬굴라를 가리켜, 마를레네 디트리히 이후 처음 등장한 독일의 스타라고 소개했다.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1982년 파스빈더가 요절한 뒤, 쉬굴라는 잠시 방향을 잃은 듯 보였다. 이때 만난 감독이 이탈리아의 기인인 마르코 페레리다. 외설과 브레히트적인 반미학의 태도는 파스빈더와도 비교되는 감독이다. 그와 만든 작품이 <피에라의 이야기>(1983)이다. 노조간부 아버지와 정신병을 앓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피에라(이자벨 위페르)라는 여성의 성장기다. 여기서 쉬굴라는 아무 데서나, 아무 남자와 관계를 맺는 미친 어머니 역을 맡았고, 이 영화로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파스빈더를 만나 열심히 연극을 하고 영화를 찍은 게 결과적으로 뉴 저먼 시네마의 역사가 됐다. 사실 파스빈더라는 독특한 캐릭터와 협업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파스빈더는 양성애자이고, 마약과 알코올 중독자에, 단원들에게는 무례한 사디스트였다. 그런데 파스빈더는 쉬굴라만 특별히 대접했고, 쉬굴라는 평생 파스빈더 곁에 있었다. 많은 전기작가들이 두 사람 사이의 남다른 관계를 설명하려 했지만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의 설득력은 보여주지 못했다. 서로에 대한 본능적인 끌림을 설명하려는 게 오히려 부질없는 짓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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