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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영화는 영화다?
김혜리 2013-07-12

<코스모폴리스>의 억만장자 에릭(로버트 패틴슨)은, 추상화가 마크 로스코의 작품으로 벽면을 채운 텍사스주 휴스턴의 로스코 채플을 통째로 사들이겠다고 억지를 부린다. ‘비매품’이라는 큐레이터(줄리엣 비노쉬)의 반론도 소용없다. 로스코 채플은 종교를 막론한 명상의 장소다. 미술사학자 제임스 엘킨스는 <그림 앞에서 울어본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 1장을, 색채만으로 울음을 부르는 로스코 채플 이야기에 온전히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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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화도 하마터면 극장 개봉 못할 뻔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스티븐 스필버그 입에서 이 말을 직접 들은 (졸업을 앞둔) 영화과 학생들은 얼마나 오싹했을까? 게다가 40년 전 회고담도 아니고 근작 <링컨> 이야기다. (정말이지 후학의 사기 따위 생각지 않는 냉정한 선배다.) 엊그제 USC영화예술학교 신축 건물 개관식에 참석한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가 밝힌 할리우드의 미래에 대한 전망이 주목받고 있다. 무려 드림웍스 스튜디오의 공동 주인인 스필버그는 <링컨>이 간신히 스크린을 잡았다며 “못 믿겠으면 <HBO>(미국 케이블TV 채널)에 물어보라”고 덧붙여, TV영화 개봉을 심각히 고려했음을 암시했다. 2차대전 시대극을 준비 중인 루카스도, 블록버스터에 자본과 자원을 몰아주는 최근 할리우드의 극단적 보수주의가 계속된다면 영화산업의 밑그림이 완전히 바뀔 거라고 예상했다. 미국영화가 1억5천만달러를 상회하는 거대예산 영화 아니면 500만달러 미만 제작비의 저예산영화로 양극화되는 상황에서 만약 2억5천만달러급 영화가 6편쯤 연달아 흥행에 실패할 경우 할리우드는 내파(implosion)될 거라고 스필버그는 말했다. 이 의견이 뜬구름 잡는 예언으로 들리지 않는 이유는, 최근 2년 <배틀쉽> <존 카터> <잭 더 자이언트 킬러> <애프터 어스> 등이 줄줄이 박스오피스에서 낭패를 봐서다. 오늘날 블록버스터의 실패는 예전 블록버스터의 그것보다 치명적이다. <스타워즈>와 <죠스>로 블록버스터라는 개념을 발명한 장본인들께서 이제 와 무슨 소리냐고 어이없어하는 사람도 많지만, 바로 그 점이 포인트이기도 하다. <스타워즈>나 <죠스>는 요즘 블록버스터처럼 유명한 원작에 기대거나 ‘성공 처방’에 입각해 프로그래밍된 대작이 아니었다. <죠스>는 원작 소설이 있었지만 영화화가 알려진 뒤 책이 관심을 모은 경우였다. 게다가 그들에겐 ‘결과적’ 블록버스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시간이 허락돼 있었다. 비디오도 케이블TV도 없었던 시절, 영화는 한번 사랑받으면 1년 넘게 극장에서 관객을 만나기도 했다. 쓰다보니 빗살무늬토기를 추억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스필버그와 루카스가 ‘내파’ (內破)라는 표현을 썼다는 데에 유의해야 할 것 같다. 정확히 말해 그들이 예견하는 바는 영화산업 일반의 종말이 아니라 ‘재편’이다. 재편의 실질적 내용이 무엇인지는 스필버그와 루카스의 USC 발언이 잘 설명해준다. <링컨>이 배급 과정에 겪은 고역은, 십년 전만 해도 극장 개봉이 당연지사였던 ‘웬만한’ 드라마와 장르물들이 “너무 마이너한” 영화로 간주되는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예다. “<링컨> 같은 영화들은 앞으로 인터넷과 VOD로 갈 것이다.” 루카스의 말이다. 한편 루카스는 제작비에 따라 입장료가 차등화되고 결국은 영화관 나들이가 스포츠 경기 관전이나 연극 구경처럼 상대적으로 소수 집단의 이벤트성 여가 활동이 될 거라고 점쳤다. 극장용 장편은- 왕후장상처럼- ‘씨’를 따로 타고난 영화로 제한되고 나머지는 케이블TV나 온라인에서 관람하는 세상이 온다는 소리다. 최근 통계가 보여주듯 독립영화 제작 편수는 크게 늘어났지만, 미미하거나 아예 부재하는 홍보와 배급으로 대중은 그 영화들의 존재를 모르고 지나가고 있다. 요컨대 두 원로가 붕괴하리라고 보는 것은 영화산업 일반이 아니라 특정한 부류의 영화다. 문제는 이른바 ‘특정한 부류의 영화’가, 100여년간 우리가 ‘영화’라 부르고 이해해온 예술과 엔터테인먼트의 대다수라는 사실이다. 과연 우리는 스필버그와 루카스가 예언한 변화가 온 다음에도 영화를 계속 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다른 작명이 필요하진 않을까? 거칠게 상상하면 내가 죽기 전에 영화관은 콜로세움이나 스타디움과 비슷한 장소가 되고 그곳을 독점한 영화가 재미없는 관객은 방으로 돌아가 각자의 마이크로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할 것이다. 개인의 내밀한 감정을 익명의 타인들과 공유하는 공간으로서의 영화관은, 영화제에만 존재하는 날이 온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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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석, 장영엽 기자의 성실한 칸영화제 리포트를 읽다가, 경쟁작인 <비하인드 더 칸델라브라>에서 만장일치로 호평받은 배우 마이클 더글러스와 맷 데이먼이 오스카 연기상 노미네이션에선 열외라는 사실을 퍼뜩 깨달았다. 이 작품은 내용이 지나치게 ‘게이스럽다’는 이유로 미국 극장 개봉이 무산됐기 때문이다. <비하인드 더 칸델라브라>는 칸 폐막 뒤 5월 말 <HBO> 채널을 통해 TV영화로 공개됐고 <할리우드 리포터>에 따르면 240만명이 시청해 2004년 이래 오리지널 TV영화로서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 작품을 연출한 스티븐 소더버그는 이미 3년 전 정해진 프로젝트들을 마치면 극장용 장편영화에서 손을 떼겠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다. 감독에게 비우호적인 현재의 할리우드를 더 견딜 이유가 없다는 판단이 가장 중요한 동기로 보인다. 소더버그의 은퇴 선언을, 앤서니 홉킨스와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은퇴를 번복한 전례와 비교하며 변덕스런 예술가의 울증이겠거니 가벼이 보아 넘겼던 사람들도 어제의 스필버그-루카스 발언을 접하면 달리 생각할 터다. 소더버그의 결심은 개인의 증세가 아니라 산업의 징후로 보는 편이 옳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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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모터스>에 이어,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코스모폴리스>도 관객을 흰색 리무진에 태우고 종일 돌아다닌다. 꼬부랑길에서 회전 각도가 안 나와 전전긍긍하던 <멜랑콜리아>의 웨딩카까지 포함시키면, 백색 리무진이 우리가 모르는 새 예술영화의 새 마스코트로 지정됐나 싶을 정도다. 두 영화에서 리무진은 공히 외부 세계로부터 단절된, 예외적 공간이지만 속성은 좀 다르다. <홀리모터스>의 리무진은 관객의 시야 밖으로 설정된 대기실로, 탑승자는 거기서 현실로 잠입할 준비를 한다. 반면 <코스모폴리스>의 리무진은 현실의 오염과 소음에서 완벽히 차단된 일종의 멸균실이다. 에릭은 우주선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만 하는 비행사처럼 행동한다. 유랑극단의 마차와도 같은 오스카의 차량은 파리 곳곳을 누비고, 이상적으로 에어 컨디셔닝된 에릭의 리무진은 직진한다. 무엇보다 <홀리모터스>의 리무진은 혼자가 아니다. 오스카에겐 동료배우가 있다. 반면 에릭은 뉴욕 거리에서 발에 차이게 많아진 리무진을 탐탁지 않아 한다.

<홀리모터스>의 오스카는 리무진에서 가면을 바꿔 쓰고 세상에 몸을 던질 준비를 하는 배우인 반면 <코스모폴리스>의 차주 에릭은 안에서만 밖이 내다보이는 차에 몸을 파묻고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기를 꺼린다. 그는 자신이 온전히 지배하는 차 내로 타인을 불러들여 주도권을 행사한다. 오스카는 룸펜 프롤레타리아트고 에릭은 억만장자다. 오스카가 잠시도 고정돼 있지 않으며 땀과 피를 흘리는 ‘몸뚱이’라면, 에릭은 그가 갖고 노는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처럼 고도로 추상화되어 유령에 가까워진 인간이다. <코스모폴리스>의 에릭은 이 영화가 묘사하는 현대의 화폐처럼 서사 기능을 상실한 인물인 반면 <홀리모터스>의 오스카는 쉬지 않고 다양한 장르의 서사를 만들어낸다. <홀리모터스>는 “개인의 자아와 영화가 질식해가고 있는 세상의 벽이 이토록 강고하니 내가 움직인다”는 자세를 취하고 <코스모폴리스>는 “혼돈이 계속될 세상이니 내 세계만큼은 어항처럼 보존하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인물을 보여준다. 결말에 이르러 전자는 성공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노력이 지속되리라는 조짐을 보여주고, 후자는 실패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 가지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두대의 하얀 리무진은 같은 세계에서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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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자들>의 여자들

<감시자들>의 장점 중 하나는, 많은 한국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들이 치렁치렁 끌고 다니는 감상(感傷)이 없다는 점이다. 감시반 막내 하윤주(한효주) 캐릭터의 핵심은, 성별이 아니라 조직의 신참이라는 위치다. 그녀의 최대 장점도 예민한 감성이 아니라 판을 읽는 차세대 리더로서의 잠재력이다. 팀의 관제탑인 이 실장(진경)도 마찬가지다. 여자건 남자건 <감시자들>의 인물들은 일터에 오면 무엇보다 일을 한다. 그들에게 가장 긴급한 감정은 동료애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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