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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호의 오! 마돈나] 성 역할 부정한 암사슴

스테판 오드랑 Stéphane Audran

스테판 오드랑은 클로드 샤브롤의 <착한 여자들>(1960)에서 처음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파리의 양품점에서 일하는 네명의 ‘착한’ 여성 혹은 ‘착해 보여야 하는’ 여성들의 서로 다른 사랑 이야기를 다룬 작품인데, 여기서 오드랑은 비밀이 많아 늘 따로 행동하는 의심스러운 여성으로 나온다. 첫눈에 별로 착한 것 같지 않고, 퇴근 이후에 무슨 엉큼한 짓을 하는지 한껏 상상하게 만드는 인물이다. 이 영화에서 맡은 역할, 곧 일반적으로 여성성으로 인지하는 착해 보이는 것과 사뭇 다른 게 오드랑의 개성인데, 그럼에도 그는 대중의 사랑을 받는 배우이자 나아가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기는 스타로 성장했다.

남녀 관계 주도, 착한 역할 거부

할리우드영화에 비하면 스크린 속 유럽 여배우들의 위치가 남성 시선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기는 하지만, 그런 자유가 대중적인 사랑까지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여배우는 전통적인 위치, 곧 로라 멀비의 용어를 빌리면 ‘남성 시선의 대상’에 머물 때 훨씬 쉽게 사랑받는다. 곧 남성들이 원하는 위치에 서 있을 때, 여성은 더욱 아름답게 보이고, 그래서 청순한 이미지가 대중의 사랑을 받는 데 유리한 것이다(잉그리드 버그먼의 할리우드 시절이 그렇다).

스테판 오드랑은 악녀다. 무엇보다 남성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지만 보통의 악녀와 다르다. 대개 악녀는 최종적으로 참회하거나 처벌을 받는다. 말하자면 통념의 질서에 통합되는데, 오드랑은 남성 질서 밖에 머무는 역할로 주목을 받았고, 또 스타로 대접받았다. 시대적 변화가 있었고, 변화에 앞서가는 배우의 노력 이 빚은 결과다.

금발에 관능적인 몸매, 여유 있는 태도, 큰 눈동자를 가졌지만 오드랑은 20대에는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20대 후반에 클로드 샤브롤을 만나 배우의 경력을 시작했고, 그와 결혼한 뒤, 30대가 돼서야 뒤늦게 개성을 발휘한다. 샤브롤은 누벨바그 감독 가운데 가장 먼저 상업적 성공을 거둔 인물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샤브롤은 초기작인 <미남 세르주>(1958)와 <사촌들>(1959)의 성공 이후로는 10여년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범작들을 내놓는다.

샤브롤의 경력에 전환점을 마련한 작품이 <암사슴>(1968)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을 맡은 것이 스테판 오드랑인데, 바로 못된 짓을 도맡아 하는 인물이다. 이때부터 샤브롤은 물론 오드랑의 개성도 꽃피기 시작한다. 돈 많은 양성애자인 그녀는 팜므파탈처럼 검정 옷을 입고 등장해 젊은 화가 지망생 여성(자클린 사사르)을 돈으로 유혹하고 애인으로 만든다. 남프랑스로 휴가를 가서는 현지의 건축가(장 루이 트랭티냥)에게 여성 애인을 뺏길 위기에 놓이자, 이번에도 돈으로 그 남자를 유혹하고 사랑을 방해한다.

이처럼 오드랑은 동성애자 여성, 양성애자 여성이라는 불편한 역할에, 사랑도 고급 차를 바꾸듯 돈으로 사려드는 여성으로 나왔다. 대개 그런 역할은 남성에게 한정되던 시대였다. 말하자면 오드랑은 남성의 영역을 뺐으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1968년이라는 시대적 변화도 한몫한 셈이다. 가부장 질서의 억압, 곧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허구가 맹렬하게 공격받을 때, 샤브롤의 영화는 다시 생명을 얻었고, 그런 작품의 중심에 오드랑이 있었다. 두 사람은 소위 ‘68혁명’의 변화 속에서 <암사슴>을 계기로 새로운 경력을 시작할 수 있었다.

클로드 샤브롤과 누벨바그의 트로이카로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무시하는 오드랑의 변신은 <부정한 여인>(1969)에서 극에 달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 역시 경제적으로 최상위층인 부부다. 그런데 부족할 게 없어 보이는 아내는 남편 몰래 바람을 피운다. 아내의 탈선은 결국 꼬리가 잡히고, 남편(미셸 부케)은 아내의 연인을 충동적으로 살해한다. 경찰의 수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아내는 우연히 남편의 옷 속에서 자기 애인의 사진을 보게 되고, 결국 범인이 남편이라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아내는 애인을 죽인 남편에게 속죄하지 않고, 살인에 분노하지도 않으며, 애인의 죽음을 애도하지도 않는다. 결국 남편은 경찰에 잡혀가고, 아무런 비밀도 들통나지 않은 아내가 화려한 저택 앞에 아들과 함께 서 있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아마 충직한 남편은 경찰에서도 아내의 비밀을 지켜줄 것이고, 아내는 물려받은 재산으로 여전히 사회적 특권을 유지할 것이다.

말하자면 부르주아의 편의주의를 비판한 작품인데, 오드랑은 지금 누리는 상류계급의 안락함 이외는 모든 것을 쉽게 포기하는 여성으로 나왔다. 게다가 이번에는 처벌받지도 않는다. 윤리적으로 방탕하고, 계산적이며, 보기에 따라서는 지나치게 영리한 악녀의 이미지는 이 영화로 더욱 굳어졌다.

<암사슴> <부정한 여인> 그리고 연속해 발표한 <도살자>(1970) 이 세 작품은 전반기 샤브롤의 ‘3대 작품’으로 꼽힌다. <도살자>에서도 오드랑은 남성 파트너와의 관계를 주도하는 여성으로 나온다. 초등학교 교사 역인 오드랑은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싱글 여성의 환상을 충족시킬 정도로 엄격하게 자신을 통제하고, 무엇보다도 기품있고 당당한 태도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차라리 남성이 곁에 없을 때, 더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어느덧 오드랑은 남녀 관계에서 주도권을 쥔 여성이라는 역할에 자연스러워 보였다.

<암사슴>에서 시작된 샤브롤-오드랑 커플의 성공 행보는 1978년 두 사람이 헤어질 때 발표한 <비올렛 노지에>까지 이어진다. 이제 40대 중반이 된 오드랑은 딸(이자벨 위페르)에게 살해당하는 불행한 어머니 역을 맡았는데, 아이로니컬하게도 이 영화가 끝난 뒤, 샤브롤은 오드랑과 헤어지고, 당시의 신성인 위페르와 협업하며 다시 문제작들을 내놓는 두 번째의 전성기를 맞는다.

보통 누벨바그의 3대 배우로 잔 모로, 안나 카리나, 그리고 스테판 오드랑을 꼽는다. 이들은 각자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뤽 고다르, 클로드 샤브롤과 협업하며 최고의 경력을 쌓았다. 오드랑이 남달랐다면, 남성들이 원하는 위치에 서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최종적으로 참회하는 경우도 드물었고, 그래서 남성 질서에 통합되지도 않았다. 그것이 본인이 원한 캐릭터인지, 예쁜 역할은 이미 다른 배우들이 차지했기에 전략적으로 선택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68세대’ 성 역할의 고정관념에 균열을 낸 것은 오드랑의 용감한 태도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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