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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 x cross] 밤은 낯선 얼굴, 새로운 희망이다
이후경(영화평론가) 사진 최성열 2013-07-24

<밤이 선생이다> 펴낸 문학비평가 황현산

“40, 50대 독자들이 기억력도 참 좋다고 그래요. 근데 나이가 들면 멀리 있는 것이 더 기억이 잘 납니다. 우리 삶이 천천히 변화했더라면 잊었을지 모르는데, 갑자기 너무 빨리 변해서 그 기억이 더 선명할 수밖에 없어요.” 불문학자이자 문학비평가이자 번역가로 오랫동안 한국문학의 곁을 지켜온 황현산 선생의 첫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는, 이제는 귀신이 되어버린 유년의 기억들을 불러내 ‘지금 여기’를 헤아린다. 장마가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간 어느 오후 인사동 한 카페에서 그를 따라, 기억과 시와 꿈이 함께 노니는 그의 밤들 속에 잠시 발을 들여놓아 보았다.

-표지 그림이 팀 아이텔의 작품입니다. 얼굴의 정면을 좀처럼 그리지 않는 작가인데, ‘얼굴 없음’은 선생님의 글에서 자주 등장해왔던 말이기도 합니다. =‘얼굴 없는’ 무엇이란 말 안에 내가 생각하는 방법이 들어 있습니다. 현실에서 참 많은 시간이 불행한데 어떤 순간에 갑자기 세상의 얼굴이 바뀌고 새로운 기운이 솟아나는 순간들이 있어요. 이것을 뤼시앵 골드만 같은 사학자는 ‘숨은 신’이라고 표현했었죠. 우리가 인식 못하는 힘이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게 제 문학적 신념이기도 합니다.

-박정희 시절에 관한 글로 열어 노무현 전 대통령 유서에 관한 글로 닫았습니다. 이 책이 한 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을 강조하신 건가요. =연재 순서대로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렇게 한 건데요. 안 그래도 문단에서 좌파 글쟁이로 박혀 있었는데 이제 완전히 좌파 글쟁이가 돼버렸습니다. (웃음)

-일상어의 번역과 비평을 통한 시론(時論)이 많습니다. =말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나에게 있어서 말은, 고향인 전라도 신안군 비금면의 사투리였습니다. 심지어 아래 아(ㆍ)가 살아 있었어요. 그러다 학교에서 표준어를 배웠고 대학에 와서는 불문학을 했죠. 특히 외국어를 번역할 때 쓰는 말은, 서울말 중 서울말이에요. 그런데 문학 속으로 들어가면 가장 비천한 말들과 만나요. 그러다보니 늘 보편어와 특수어 사이에서 말을 성찰하게 된 것 같습니다.

-아폴리네르에서 시작해 보들레르, 말라르메로 이어진 19세기 프랑스 문학 연구 작업과 선생님의 한국 시, 한국 사회 비평은 어떻게 닿아 있나요. =내가 비평을 한 게 1980년대 말부터인데, 한국의 최근 30년이 불란서 19세기하고 굉장히 비슷해요. 근대화 과정에서 불란서 시에 나타난 상징주의와 우리의 심정적 반응이 매우 비슷한 것 같아요. 근데 다른 시대를 공부했더라도 똑같이 도움은 받았을 겁니다. 어떤 한 시인의 깊은 진실은 어느 시대에 갖다놔도 보편적 가치를 띠니까요.

-<잘 표현된 불행>에서 시는 잃어버린 기억을 현재로 불러들이는 기억술이라고 쓰셨습니다. 1945년 해방기에 낙도에서 나고 자란 선생님의 기억이 담긴 이 산문집도 일종의 기억술이 되길 바라셨나요. =(웃음) 내가 쓴 글이 예술은 아닙니다. 보들레르가 기억술이라는 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을 때는, 시에 우리의 잃어버린 낙원, 문학에서 전사(前史)의 기억이라고 하는 것을 불러오는 힘이 있다는 뜻이었어요. 내가 좋아하는 시 중에서도 지극히 거칠고 혼란스럽게 보이는 시들이 있단 말이에요. 실제로는 그런 시일수록 조금만 겉껍데기를 걷어내면 굉장히 순결한 세계에 대한 기억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하고 사람들에게 설득시키는 것이 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럼 까기와 비슷하죠. 내 글도 되도록 그 속의 세계하고 닮게 만들고 싶었어요.

-진리보다 진실이라는 단어를 선호하시는 것 같아요. =세상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질서나 원리가 어딘가에는 있겠죠. 하지만 그것이 인간들에게는 파악이 안됩니다. 내가 그것을 최대한 많이 알려고 바치는 성의만 가능한 것 같아요. 진실이란 자기 자신을 완전히 책임진다는 말이거든요.

-영화감독 중에서는 김기덕, 봉준호를 한국 현대사와 관련해 자주 언급하셨다면 이창동, 홍상수는 시와 관련해 주로 이야기하셨어요. =특별히 좋아하는 건 봉준호 감독이에요. 내가 예술에서 좋아하는 상반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물 흐르듯 흘러가 버리는 것들이고, 또 하나는 땀을 많이 흘리고 머리를 많이 써서 아주 복잡하게 만든 것들이에요. 복잡하게 만들었다고 반드시 현실을 많이 건져내는 건 아니지만 복잡하게 만들다보면 현실이 조금이라도 더 건져집니다. 그게 봉준호 감독의 성취 같아요. 언젠가 봉준호론도 써보고 싶은데 요즘 글 쓰는 사람치고 영화비평 안 하는 사람이 없어서 식상할까봐…. (웃음)

-타르코프스키 영화도 짧게 언급하신 적이 있으시죠. =타르코프스키 영화는 상징과 알레고리를 걷어내면 속에 다른 몸이 보입니다. 왕가위나 중국 3세대 감독들도 좋아하는데, 19세기 불란서의 상징주의적 표현법이나 심미감이 20세기 중국영화에 그대로 옮겨와 있는 걸 보면 굉장히 기이해요. 이를테면, <동사서독>에서 “가질 수는 없어도 잃지는 말아야지” 같은 대사요.

-번역이 언어의 한계에 도달해보는 작업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영화감독이나 영화비평가들도 같은 말을 종종 합니다. =실제로 어떤 사건 앞에서 제일 먼저 반응하는 건 몸입니다. 그걸 이야기로 만들다 보면 이데올로기 문화가 끼어들면서 그 자체가 일종의 번역이 되는 거죠. 그런데 영화는 몸을 그대로 옮겨놓는 작업 같아요. 그럼 몸을 그대로 옮겨놓는 거니까 문학보다 더 쉬운가, 하면 그건 아닌 것 같단 말이죠. 몸을 몸으로 번역할 때는 불분명한 것을 불분명한 것으로 번역을 하니까, 더 어려운 것 같아요.

-본격 영화비평을 쓰신 적은 없나요. =딱 한번 있어요. 하이텔 시절, <동사서독> 나왔을 때 원고지 20매 정도 되는 글을 무슨 토론동호회 같은 데다 올렸는데, 그 글을 신형철 평론가가 학부생 때 보고 아주 감명을 받았다더라고. 학부생이라 그랬겠죠. (웃음)

-선생님께 밤은 어떤 시간인가요. =밤에 일하는 게 사실 비경제적입니다. 빅토르 위고 같은 작가는 매일 아침 4시간씩 글을 써서 어마어마한 작품들을 남겼죠. 보들레르가 밤에 작업한 사람인데요. 그도 굉장히 애를 많이 썼지만 작품이 얼마 없어요. (웃음) 그런데 낮에 총총한 정신으로 보지 못하는 것들, 계산과 추론에 배제된 것들을 만나는 시간이 밤입니다. 그때 만난 것이 귀신이고, 낯선 얼굴이고, 새로운 희망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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