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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우리는 유령이 아니다
김혜리 2013-09-06

신카이 마코토의 <언어의 정원>에서 구두 디자이너를 꿈꾸는 고교생 다카오는 한마디로 “직접 만든 신을 신고 다니는 소년”이다. 그는 좋아하는 여자에게 수제화를 선물해 같이 걷자는 청을 대신한다. 역시 교사와 학생의 사랑을 그린 <사랑니>에도 아름답게 연결된 신발 이미지가 있었다. 실연으로 눈물짓다 양호실에 지친 몸을 뉜 열일곱 소녀의 가련한 실내화, 그 옆에서 무심히 새 구두를 신어보는 여교사, 첫사랑과 재회하는 자리에 새 구두를 신고 나왔다가 까진 서른살 여자의 발꿈치. 이 모든 신발은 우리가 거듭 사랑에 거는 기대와 실망이다.

7/12

해외 영화인 서면 인터뷰는 종종 묵묵부답이라는 재앙으로 끝난다. 홍보사와 수입사, 현지 에이전시 등 중간단계가 많다보니 불가피한 사태다. 그래서 기자로서는 질문지를 쓰고 ‘보내기’를 누르는 순간 얼마간 유리병에 편지를 넣어 망망대해에 던지는 심정이 되곤 한다. 물론 반대급부로 모니터 앞에서 심사숙고해 단어를 고른 기색이 역력한, 글맛이 살아 있는 답장을 받는 행운도 있다. <사이드 이펙트> 개봉에 맞춰 시도했던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서면 인터뷰가 결국 좌절됐다. 나의 물음들은 태평양 허공 어디쯤에서 객쩍게 흩어져버렸다. 하지만 인터뷰를 준비하다보면 몇몇 질문에는 상대방이 뭐라고 대답할지 저절로 시뮬레이션이 되는 순간이 온다. 이번에 가장 큰 힌트가 된 자료는 소더버그가 2010년 세계 정책 연구소(World Policy Institute)와 가졌던 인터뷰와 지난 4월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에서 들려준 기조연설이었다. 2010년 인터뷰에서 소더버그가 밝힌 독특한 발상 하나가 솔깃하다. 그는 점점 좁아지는 외국어영화, 독립영화 시장을 보존하고 관객의 취향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관람료 체계를 뒤집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고와 미디어 노출이 몇몇 거대 예산 영화에 집중되고, 매표소 앞의 관객이 모험적으로 영화를 선택하기 점점 어려워지는 현황에서, 상대적으로 리스크를 감수하는 관객에게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대담한 견해다. 즉, 책상 앞에 앉아 몇번의 클릭으로 영화를 다운로드하는 비용이 극장까지 외출해 영화를 보는 비용보다 높아야 합리적이라는 논리다. 가장 쉬운 일을 가장 값싸게 하고 가장 번거로운 일을 비싸게 하다니 난센스라고 소더버그는 말을 맺었다.

한편 소더버그의 샌프란시스코영화제 연설은 할리우드가 주류 영화계에서 어떻게 ‘시네마’를 몰아내고 있는지 생생하고 명쾌하게 브리핑한 명문이다. 참고로 여기서 소더버그가 ‘무비’와 구별해 쓰는 ‘시네마’의 정의는 기록 매체, 관람방식과는 무관하다. “시네마는 비전에 달린 정의다. (중략) 시네마는 뻔하고 임의적인 영화의 반대말이며, 위원회나 영화사나 관객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라 해당 감독이 찍지 않았다면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영화를 가리킨다.” 스티븐 소더버그는 ‘시네마의 현황’이라는 제목으로 이루어진 이 연설을 녹음하거나 녹화하지 말아달라고 현장에서 요청했지만, 소더버그가 잘못했다. 이렇게 교육적이고 재미있다 못해 약간의 감동마저 안기는 이야기를 풀어놓고는 요즘 세상에 새나가지 않길 바라다니 꿈도 야무지다. 과연 데드라인닷컴(www.deadline.com)에 올라온 전문 녹취록은 적잖은 반향을 불러왔다. 나는 제갈공명의 출사표를 방불케 하는 말발에 탄복하며, 휴가에 하고 싶은 일 목록 상단에 ‘소더버그 연설 번역’을 적어넣었다.

7/24

<더 테러 라이브>는 노골적인 사회 비판을 장착한 드라마지만, 말로 찍은 액션영화라는 인상이 훨씬 진하게 남는다. 서로 다른 목표와 동기를 품은 주체들이 라운드와 적수를 바꿔가며 협상과 협박으로 접전을 이어가는 품새가 액션오락영화의 전개 방식을 닮아서다. <더 테러 라이브>는 때때로 이 육박전의 리듬을 살리기 위해 서사적 무리수까지 감수한다. 만약 이 영화에서 부딪히는 칼날이 대사가 지시하는 인물의 입장과 손익 관계뿐이었다면 <더 테러 라이브>는 지금과 같은 긴박감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이 영화를 쓰고 찍은 김병우 감독은 말의 내용뿐 아니라 말의 형식, 즉 말투가 충돌할 때 발생하는 효과를 간파하고 솜씨있게 다뤘다. 영화에서 말은 1차적으로 의미를 실어 나르는 그릇이지만, 동시에 말하는 인물의 몸에 새겨진 습관과 계급성을 드러내는 자못 육체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말투, 화법, 관용적 표현들은 개인에게 속하는 버릇일 뿐 아니라 해당 사회에서 통용되는 의사소통의 프로토콜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더 테러 라이브>에서 관객이 주인공 윤영화 앵커(하정우)의 인물형을 선명히 파악하게 해주는 변수는 숨겨진 개인사가 아니라 그가 구사하는 공식적 화법과 사적인 말투 사이의 갭이다. 공권력을 대변하는 경찰청장에 관한 관객의 평결은, 이 인물이 ‘나라의 기강’ 운운하는 아무 생명 없는 관료적 관용어로 해묵은 염증을 자극하는 순간 반사적으로 내려진다. 따지고 보면 <더 테러 라이브>에서 갈등의 핵심은, 대통령이 합당한 보상과 존중을 받지 못한 국민의 희생에 ‘진심으로’ 사과할 것인가 아니라(진심인지 알게 뭔가) 권력이 ‘사과’라는 형식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에 있다. 별도의 사전을 가진 공식적 담화의 세계에서는 선택된 단어가 ‘사죄’냐 ‘유감’이냐가 나머지 담화문 전체보다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싸움은 사건의 본질은 둘째치고 “사과하라”, “감히 어디다 대고 사과 요구냐”, “너는 또 뭔데 중간에서 사과하라 마라 끼어드느냐”로 축약되는데 이 전개도 자못 익숙한 광경이다. <더 테러 라이브>는 모국어영화를 보는 관객만이 온전히 음미할 수 있는 뉘앙스가 은근히 풍부한 스릴러다.

8/6

<숨바꼭질>은 김기덕 감독의 <빈 집>을 180도 돌려세워놓은 듯한 영화다. 물론 훌륭한 영화를 물구나무 세워도 얼마든지 훌륭한 영화가 나올 수 있다. <숨바꼭질>의 큰 약점은, 남이 소유한 집에 숨어들어간 사람들을 바라보는 정치적 입장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종장의 무리한 만듦새에 있다. 극히 한국적이기에 진정 무서운 소재로 관객의 숨통을 조여가던 <숨바꼭질>은 막판에 이르러 어째서인지 1990년대 할리우드가 양산한 범용한 호러영화의 처방으로 퇴행해버린다. 백인 중산층 가정이 아웃사이더에게 위협받는 <퍼시픽 하이츠> <요람을 흔드는 손> <배드 인플루언스> <케이프 피어> 같은 영화들의 기시감이 그 영화들보다 설득력이 떨어지는 플롯에 얹힌다. <숨바꼭질>에는 두 비명소리가 들린다. 하나는, 중산 계급은 물론 시민사회에서도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로 밀려난 사람들의 외침이다. “나는 유령이 아니다. 나를 외면하지 말라. 나는 어떻게든 부득부득 살아남을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부득부득 살아남으려는 그들을 청결한 부엌에서 발견한 벌레처럼 징그러워하는 사람들의 비명이다. <숨바꼭질>에서 진짜 서늘한 공포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자동적으로 후자와 동일시한 우리가 우리 내면에서 생명을 부지하려는 벌레를 밟아 죽이려는 잔혹한 충동을 발견할 때 엄습한다. 그러나 막강한 괴물에 맞선 정당방위로 변질된 <숨바꼭질>의 종장은 징할 뿐 섬뜩하지는 않다.

8/13

전혀 무관한 줄 알았던 영화들이 작대기로 연결될 때가 있다. <숨바꼭질>과 1주일 터울로 본 닐 블롬캠프 감독의 SF <엘리시움>도 계급에 따라 양극화된 주거 공간을 모티브로 삼는다. “죽고 싶지 않아!”라는 처절한 외침이 되풀이되는 점도 <숨바꼭질>과 같다. 환경이 황폐해진 2154년의 지구는 행성 전체가 슬럼이다. 부유한 상류층은 그리스 신화의 낙원 이름을 딴 리조트풍의 주거지 ‘엘리시움’을 우주정거장에 건설하고 이주했다. 덩달아 이루어진 엘리시움 주민들의 의료서비스 독점은, 불법 난민을 양산한다. 엘리시움의 부잣집 정원에 난민들의 우주선이 불시착하는 장면은 <숨바꼭질>의 주거침입 장면을 비싼 SF로 옮겨놓은 판본처럼 보인다. 정작 흥미로운 것은 닐 블롬캠프 감독이 상류층 주거지인 엘리시움에 보이는 무관심이다. 멕시코시티에서 촬영한 지구의 빈민가에 비해, 엘리시움은 매우 무성의하게 그려져 있다. 집집마다 비치된 가정용 만병통치 의료기 정도를 제외하면 몰개성적이고 곳곳에 변명하듯 놓여 있는 화분은 공간 전체를 조악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모르긴해도 닐 블롬캠프 감독은 의료 개혁만 실현되면 엘리시움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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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당스>가 정의하는 무용수

프레데릭 와이즈먼 감독의 다큐멘터리를 보지 않았다면 당신은 “주시하다”라는 동사의 진짜 의미를 아직 모른다고 여겨야 한다. <라 당스>는 한편의 발레가 완성되기까지 예술과 기술이 벌이는 치열한 협상을 관찰하는데, 영화 속 한 인물이 내린 춤추는 인간에 관한 정의가 이 협상을 함축한다. “발레 무용수는 절반은 권투 선수고 절반은 수녀다. 그들은 말이자 기수이고, 경주용 자동차이자 그것을 모는 운전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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