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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스코프] 길 위에서의 하루
이후경(영화평론가) 사진 최성열 2013-09-06

조근현 감독의 <봄> 촬영현장

8월16일, 전북 진안군 신양리의 한적한 시골길. 아직 오전 10시지만 조근현 감독과 스탭들은 길에 오른 지 이미 6시간째다.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강아지풀로 가득 둘러싸인 그 길을 “작업실 세울 저수지를 찾아가다 눈을 딱 떴는데 보여 운 좋게 발견했다”고 윤대용 라인 PD가 알려준다. 1960년대 포항을 배경으로 해 세 남녀의 애틋한 관계를 “동양화적 화폭”으로 펼쳐낼 <봄>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데 특히 중한 공간이다. 몸이 아픈 말년의 조각가 준구(박용우), 그가 생의 의지를 되찾기만을 바라는 헌신적인 아내 정숙(김서형), 정숙의 부탁으로 준구의 모델이 되는 민경(이유영). 그들이 각기 다른 시간에 각기 다른 감정으로 시골길을 걷는 모습을 모두 담아내려면 하루도 빠듯하다. 무더위도 기승을 부렸지만, 모두 입을 모아 “지난주에 비해 오늘 정도 날씨면 해볼 만하다”며 다음 컷을 향해 분주히 발걸음을 움직인다.

“첫 미팅 때는 감독님이 눈을 잘 못 마주치시더라”며 찡긋 웃어 보이는 투명한 매력의 신인 이유영. 민경 역을 맡아 성실하게 달리는 연기를 하고 있는 그녀 앞에서는 10여명의 연출부, 촬영부 스탭들이 동네에서 급히 구해온 손수레 위에 카메라를 얹은 채 그녀와 함께 달리는 재밌는 광경도 벌어진다.

불볕더위에 양산 하나만 들고 하염없이 걷는 연기를 반복해야 하지만, 김서형은 짜증은 커녕 “덥다”는 말도 한번 안 한다. 대신 “정숙의 성격이 처음에는 답답했는데 속으로 삭이다 보니 오히려 웃게 되더라”며 자주 웃었다.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 이후 다시 만난 조상경 의상감독의 옷에서도 “힘을 많이 받고 있다”고 했다.

차로 5분쯤 달려 도착한 용덕 저수지에는 진안 촬영분의 핵심인 준구의 작업실이 세워져 있었다. 반은 땅 위에 반은 저수지 물 위에 떠 있는 구조로, 유영종 미술감독이 이틀 뒤 촬영에 대비해 마무리 도색 작업에 한창이었다. 그에게 조 감독은 “1960년대면 스프레이가 아닌 롤러로 칠했을 거”라며 “좀 덜 칠해진 느낌”을 주문했다.

첫 테이크에 들어가기 전 준구 역의 박용우와 조근현(오른쪽) 감독이 걸음걸이, 작은 제스처 등에 대해 작은 목소리로 의견을 주고받고 있다.

길 위에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이는 조근현 감독이 “신선하고 영롱하다”고 자랑하는 신인 이유영. “어쩌면 가장 비극적인 날” 그녀는 “민경의 옷 중 가장 예쁜 옷”인 빨간색 물방울 드레스를 입고, 천천히 걷다가 불현듯 달린다. 그녀의 뜀박질에 가속이 붙을 즈음 컷 소리가 나고 다들 “잘 뛴다~!”고 한마디씩 던지는데, 조 감독은 “준구의 작업실에서 들려오는 불길한 소리를 듣고 직감적으로 불안해하는 느낌이 잘 전달됐는지” 끝까지 꼼꼼하게 확인한다. 이번에 입봉하는 김정원 촬영감독도 과묵하게 카메라 동선을 조율한다.

정오, ‘불안’의 길은 ‘회자정리’의 길로 바뀌었다. “마음이 정리는 안되나 정리를 해야 하는 정숙의 마지막 장면.” 회색빛의 우아한 원피스 차림으로 나타난 김서형을 스탭들은 “길 전문배우”라고 불렀다. “걷는 연기를 참 잘한다”며 조 감독도 부처 미소를 짓는다. 한편 익스트림 풀숏을 위해 길 반대편으로 건너간 스탭들은 슬레이트를 치는 대신 “숨으세요!”라 외친다. 그 소리에 감독, 스탭 할 것 없이 모두 수풀 뒤에서 숨바꼭질을 벌인다. 컷 소리가 난 뒤 그녀에게 다가가 홀로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느냐고 물으니 “드라마에서 내지르는 연기를 많이 했는데 이 영화 하면서 안으로 삼키는 여자의 강인함을 배운다”고 답했다.

노을빛이 내려앉을 무렵, 최후의 결정적 사건을 앞둔 고독 속의 준구가 길 위에 섰다. 박용우는 조 감독과 소곤소곤 의논을 끝낸 뒤 양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구부정한 자세로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1960년대에는 존재할 수 없는, 반대편 도로의 차와 소음 때문에 잠시 촬영이 중단되었지만 그는 카메라 주변을 서성이며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거라 생각했는데 다시 닫혀서 답답한 상태”를 유지한다. “(준구가) 표현력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 간단한 표현으로 갔다. (구부러뜨린 오른손 약지를 보여주며) 병이 있는 사람이라 평소에도 이러고 다닌다.” 조 감독 말대로 “섬세하고 정확하다”.

그렇게 날이 저물었다. 세 남녀의 길은 영화에서 어떻게 교차할까. 넘어가는 해에 불길한 예감과 막연한 희망이 반반 걸려 있었다. <봄>은 9월 중 촬영을 종료하고 내년 봄에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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