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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 x cross] 절망을 말하기란 얼마나 쉬운지
이후경(영화평론가) 사진 오계옥 2013-10-16

다섯 번째 장편소설 <천국에서> 펴낸 소설가 김사과

“사실은 아무 생각 없는데, 생각 많은 진지한 청년처럼 보이는 것 같아 민망하다.” 인터뷰가 끝나갈 즈음 <한겨레>에 쓰고 있는 칼럼에 대해 묻자 그녀는 눈길을 피했다. 문단의 ‘앙팡 테리블’이란 별명에 대해서도 난색을 표했다. “그런 찬사를 듣기에는 별로 무서운 짓을 한 적도 없는데, 거품인 것 같다.” 하지만 이제 겨우 서른에 벌써 등단 9년째인 그녀가 이 사회를 향해 돌직구를 마구 날려온 20대 대표작가 중 한명임을 부정할 이는 없을 듯하다. 그녀의 다섯 번째 장편소설 <천국에서>도 특유의 수다스러움으로 이 시대를 사는 청춘들의 지옥도를 그려내고 있다. 태풍 다나스로 서울 하늘마저 어둑했던 오후, 그녀를 만나 함께 이 지옥 속을 헤매어보았다.

-<천국에서>는 언제 처음 구상한 소설인가. =2007년쯤 여행소설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열심히 여행을 다녔는데 다니다보니 재미가 없어지더라. 그래서 여행을 비판하는 글을 썼나보다.(웃음)

-구상이 바뀐 계기라면. =베를린을 좋아해서 자주 갔었다. 독일이 돈이 많으니까 세금으로 금치산자들 모아놓은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웃음) 근데 2010년에 갔을 때 문득 여행이 백화점 가서 노는 거랑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 물론 그런 감상조차 진부하다. 그리고 누가 여행 가서 실망한 이야기를 굳이 소설로 쓰겠나. 근데 그 환멸을 진지하게 탐구하면 이 시대에 관한 보편적인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다.

-소설이 시작되는 곳은 베를린이 아니라 뉴욕이다. =최대한 전형적인 설정에서 출발했다. 뉴욕이라는 천국, 그 상투적인 환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보고 싶었다. 시대적으로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중산층 붕괴가 본격화한 2009년에서 2011년 사이를 택해서, 그 환상이 부서져가는 풍경을 보여주려 했고.

-2000년대 말 뉴욕에 놀러갔다 돌아와 한국에서의 지리멸렬한 일상에 다시 적응해야 하지만 쉽게 그러지 못하는 20대 여주인공 케이는 소위 ‘88만원 세대’다. 세대론에 입각해 썼지만 세대론에 공감하진 않는 눈치다. =이 소설은 세대론에 대한 내 마지막 인사다. ‘청춘’에 대해 마음에 들 만큼 써보고 그만두자, 라는 생각이었다. 나 스스로 특정 세대 문화의 당사자라고 하기에는 이물감을 느낀다. 나이로 따지면 케이는 1989년생, 딱 소녀시대 세대고, 나는 (케이의 8살 연상 남자친구인 홍대 남자) 재현이 세대다. 하지만 난 재현이의 세계관에는 관심이 별로 없다. 그에게는 아직 ‘나는 비주류야’라는 포즈가 있다. 하지만 케이는 계속 흔들린다. 나도 그렇다. 내가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도 내가 어떤 세대의 일부가 아니라 그 밖에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싶었던 이유라면. =의무감 같은 게 있다. 주변 사람들이 ‘멘붕’하는 거 보면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을 “내 입장에선 ‘인간성이 좋은 작품’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던 것인가. =딴엔 내가 쓴 것 중 가장 사랑스러운 소설이다. 고등학교도 제대로 안 나오고 일반 대학에 들어가 취직 준비도 해본 적 없는 내가, 진심으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쓴 소설이다.

-가장 친절한 소설이라 말할 수도 있나. =정말로 사람들이 읽어주길 바라며 썼다. 그래서 주인공도 이입이 가능한 평범한 사람으로, 이야기도 일상적인 사건들 중심으로, 문체도 가능한 한 평이하게 썼다. 쓰다가 케이가 특이한 행동을 하려 들거나 자기주장이 세지면, 이러면 안돼, 하면서 썼다.(웃음)

-88만원 세대인 케이가 여러 세대, 계층의 인물들을 만나는데, 그때마다 케이가 그들에 대해 갖는 환상을 계속 깎아나간다. =그걸 하고 싶었다. 1부에서는 애가 세상의 꼭대기에 둥둥 떠 있다가 2, 3, 4부로 가면서 점점 바닥으로 떨어지잖나. 그 환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와 관련해 특히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프랑스 혁명 뒤 반동시기를 다루고 있는데, 혁명이라는 환상과 그 환상에 대한 환멸의 전형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결말도 대단히 냉소적이다.

-이 소설도 쭉 냉소적인데, 마지막에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긍정한다. =인물로 하여금 빠져나가기 어렵게 만든 다음에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해보려고 했다. 사실 절망을 말하기란 얼마나 쉽나. 하지만 무책임한 결론을 내리긴 어렵다. 어려서 고등학교 자퇴하겠다고 했을 때 그러라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 나중에 왜 그만두라고 했냐고 따질까봐 겁나니까 비겁하게 지금처럼 살라고 하는 거지. 그런 순간에 무책임하게 네 맘대로 하라고 말해주고 싶은 것이 내 세계관이다.

-이 소설을 쓰면서 그 세계관이 더욱 굳어진 건가. =쓰면서 인간은 사회적 조건에 의해 결정되지 않음을 깨달았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 이 세상이 관료제적인 질서와 균형을 이루고 있겠지, 이렇게 난장판이 아니겠지. 사회주의도, 신자유주의도, 사회적으로 다 세팅돼 있었는데 망했잖나. 사회학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1%의 동기, 그것이 진짜 중요한 것 같다.

-올해 서른이다. 더이상 이 세상을 욕할 수만은 없다는 불안감이 이 소설을 쓰는 마음에 어떤 영향을 주진 않았나. =정작 나는 이 소설을 통해 하나의 세계관과 단절한 것 같다. 20대 때는 이 소설처럼 희망을 갖고 싶었다. 나 스스로 평범하고 우수한 삶, 1등급 우유 같은 삶에 대한 관념적인 환상도 있었고. 근데 지금은 훨씬 회의적이다. 생긴 대로 살아야 행복해질 수 있는 것 같다. 평범한 이름으로 바꾸려다 “신포도 어때?”라는 지인 말에 말려 ‘김사과’가 된 것만 봐도 평범하게 살긴 틀린 거다. 어쨌든 앞으로는 이런 소설 못 쓸 것 같다. 박근혜 때문인가.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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