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신,전영객잔
[신 전영객잔] 그 돌멩이가 깬 것은 무엇입니까

<사랑에 빠진 것처럼>을 한편의 시처럼 느낀 당신에게

0.

이번주에 쓸 소재를 편집기자에게 문자로 알리며 처음엔 이렇게 적는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 쓸게.’ 뭔가 좀 어색하다고 느껴서 잠시 멈춘다. 물론 영화 제목을 적은 것이라고 상대방이 모를 리 없지만, 몇초 들여다보고 있자니 ‘사랑에 빠진 것처럼 글을 쓸게’라는 뉘앙스로도 읽힌다. 부호를 추가한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 쓸게.’ 그때서야 ‘<사랑에 빠진 것처럼>이라는 영화에 대해 글을 쓸게’라는 뜻으로 명료해진다. 그러고 나니 오히려 조금 전의 문자로 보내고 싶은 엉뚱한 충동에 잠시 시달린다. 언어에서 부호라는 프레임은 의미에 봉사하므로 때로는 명료하지만 때로는 갑갑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프레임이라는 태생을 본래부터 지닌 영화는 이것을 능동적으로 이용할 때에만 애매와 모호와 열림의 순간들을 만끽한다. 이 사소한 문자 보내기의 경험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그의 영화 <사랑에 빠진 것처럼>을 보는 감상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0-1.

키아로스타미가 <사랑을 카피하다>에 이어 <사랑에 빠진 것처럼>에서도 시도하고 있는 새로운 제작방식이 세 가지 있다. 어쩌면 방식이 아니라 조건일 수도 있겠다. 외국에서 촬영하기. 외국어로 대사 만들기. 외국 전문 배우와 일하기. 외국에서 촬영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입증했다. 하지만 모국어 대사를 쓰지 못하는 조건은 그의 영화에 중대한 변화를 요구한 것 같다. 개인적인 추론으로는 모국어 대사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되도록 전문 배우의 역량에 기대게 된 것 같다. 이런 조건 변화들이 감독의 즉흥적 혹은 돌발적 연출 의지와 여지를 다소 축소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가령 이란에서의 키아로스타미는 카메라가 돌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카메라 뒤에서 배우들에게 즉흥적인 대사를 종종 요구해왔는데, 그런 상황에 처하곤 했던 비전문 배우들은 당황하거나 혼란스러워 오히려 생생한 연기를 해낼 때가 있었다. 그 결과 마치 극영화 안에 다큐적인 질감이 순간마다 섞여 들어가는 묘한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래도 그 스스로 그런 순발력을 발휘할 기회가 줄어든 것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사랑을 카피하다>와 <사랑에 빠진 것처럼>에서는 빈틈없이 철저한 인위적 구성력으로 줄어든 즉흥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하지만 좋은 징조. <사랑을 카피하다>는 좀 지나쳐서 개념 우위적으로 보인 장면들이 더러 있었고 과도기적으로 보였는데 <사랑에 빠진 것처럼>은 그보다 훨씬 유연하고 아늑해졌다.

1.

오프닝 신은 거의 시청각 요소들의 활발한 경연장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이 장면을 보며 구축되어가는 우리의 질문의 내용과 순서다. 장면이 열리면 여기는 시끄러운 카페이고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목소리의 주인은 누구인가? 잘 모르겠다. 습관적으로 화면 안에서 찾게 되지만 주인공은 거기 없다. 화면의 오른쪽에서 한 여자가 카메라쪽으로 안 들리는 목소리로 말을 건다.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하는 건가? 그 여자가 자리를 옮겨와야만 우린 지금 목소리 주인공의 위치를 정확히 확인할 수 있다. 건너편에 여주인공 아키코가 앉아 있다. 잠시 뒤에 중년의 남자가 아키코 앞에 앉더니 “좀 생각해봤냐”라고 묻는다. 뭘 생각해봤느냐는 걸까? 둘은 어떤 관계일까? 약간의 대화 내용상 우리는 그와 그녀를 원조관계라고 조금씩 추론한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다. 그는 중개자다. 그가 종용하고 화를 내는 내용을 다 듣고 나서야 우리는 아키코가 지금 처한 상태를 온전히 알게 된다. 아키코는 누군가에게 가야만 하는 것이다. 거칠게 요약했지만 오프닝 신에서는 이상과 같은 질문과 답들이 연쇄적으로 발생한다. 우리는 앞에 보이는 대상들을 증거로, 누군가의 음성을 증거로 수시로 헛갈리면서도 또 차례대로 상황을 파악해간다. 그러나 이렇게 분산된 경험을 하는 사이에도 카메라는 최소한으로 고정되어 있다.

2.

카페를 나온 아키코가 택시를 타고 노교수 타카시에게 가는 길에 할머니를 발견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감정적 고양이 일어나는 순간일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장면이 이 영화의 전반적인 흐름 속에서 가장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결국은 할머니를 만나지 못하고 가고 싶지 않은 곳에 가야하는 손녀의 애틋한 마음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이 장면의 진짜 정체는 할머니를 두고 다른 곳에 가야 하는 손녀의 슬픈 마음이 아니라, 고정된 자리에서의 분산을 오프닝 장면에서 경험케 한 이후에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서의 경험을 주기 위한 후속 장면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앞선 고정성에 대응하는 지속적인 움직임(자동차), 분산된 시청각성에 대응하는 집요한 반복과 집중(할머니가 남긴 반복 메시지) 말이다. 하지만 자동차가 움직이고 할머니의 메시지가 여러 차례 반복되어 나올 때 그 운동과 반복이 곧 할머니가 기다린 시간의 흐름이 되고 그러면서도 할머니가 그 동상 아래 여전히 서 있을 때 감정이 울컥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다.

3.

아키코가 타카시의 집에 들어와 나눈 대화 중 가장 중요한 화제는 벽에 걸린 그림 <교무>에 관한 것이다. <사랑을 카피하다>에서 광장의 보이지 않는 동상을 놓고 두 인물이 말하는 장면과 같은 상황이다. 하지만 <사랑을 카피하다>의 그 장면은 좀 딱딱했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의 이 장면은 귀엽다. 감독은 그림을 한번 보여준 다음 다시 보여주지 않을 것처럼 그림에 대한 두 사람의 이야기로만 한참을 이어가더니 돌연 아키코가 일어나 그림 앞에서 그림의 여자와 동일한 포즈를 취하도록 한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두번 생각하게 된다. 그들이 그림에 대해 오래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는 그들이 프레임 바깥으로 던지는 시선을 따라 방금 전 본 그림에 대해 생각(기억)하게 되고, 아키코가 그림 앞에 섰을 때는 저 여자와 아키코가 정말 닮았나 그렇지 않은가 또 생각(비교)하게 된다. 누가 보아도 이 장면의 초점은 ‘닮았다’는 말에 있다. 이 장면은 우리를 순간마다 능동적으로 자꾸 생각하게 만든다. 즉, 사유의 증폭, 사유의 클로즈업이 이 장면의 목적이다.

3-1.

키아로스타미가 영화적으로 시도한 사유의 클로즈업 중 두개의 클로즈업이 인상 깊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을 청년은 자신이 좋아하는 여인을 뒤쫓아간다. 두 사람이 저 멀리 올리브 나무 사이로 점이 되어 걸어가다 여인이 발걸음을 멈추고 남자에게 무어라 말하는 것 같다. 그때 남자가 뒤돌아 언덕을 빠르게 달린다. 이 장면을 두고 키아로스타미는 “그 여인이 마지막 장면에서 걸음을 멈추었을 때, 관객은 내가 제공한 그 어떤 것도 없이,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지에 대한 그 자신들의 세심한 주의 덕분에 각자 자신들만의 클로즈업을 발명해내게 되며 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고 미국 평론가 조너선 로젠봄과의 인터뷰 중에 말했다. 이것은 키아로스타미가 연출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클로즈업이다.

그 보이지 않는 클로즈업이 일어나는 순간을 눈에 보이는 클로즈업으로 찍을 수는 없는가, 하는 질문이 실천된 영화가 <쉬린> 같다. 페르시아의 오래된 비극이 지금 눈앞에서 상영 된다고 가정된 채로 그걸 보는 배우들의 얼굴만 찍은 영화. 키아로스타미는 “<쉬린>의 촬영장에 있는 건 와이드 스크린과 의자 몇개, 카메라, 작은 조명 세개뿐이었다. 나는 그녀들이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모두가 자신만의 기억 혹은 자신이 본 영화의 장면을 떠올렸을 것이다”라고 베니스 기자회견장에서 말했다.

3-2.

영화와 사유의 관계를 놓고 볼 때 어쩌면 키아로스타미와 정반대의 방식을 취하는 것은 놀랍게도 알랭 레네 같다. 레네는 관객에게 사유라는 작동 과정을 시청각적으로 보여주려 하고, 키아로스타미는 관객 스스로 사유를 작동하도록 시청각적으로 유도한다.

4.

누군가 사정이 있어 <사랑에 빠진 것처럼>의 상영 도중 극장에 들어왔다고 생각해보자. 그 때가 딱 아키코와 타카시와 노리아키가 차 안에 있는 장면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럼 그 관객은 이들의 관계를 무엇이라 생각할까. 할아버지와 손녀와 손녀의 애인 사이에 지금 무언가 조금 불편한 일이 벌어졌다고 여길 만하다. 그러므로 이 장면이 역할극이라는 말은 맞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키아로스타미의 역할극의 종류가 때때로 다르다는 것이다.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역할극은 <올리브 나무 사이로>의 한 장면이다. 마을의 두 남녀는 영화의 대사를 핑계로 서로 진심을 건넨다. 가장 가련하지만 대담한 역할극은 <클로즈업>이다. 가장 재미없었던 건 <사랑을 카피하다>의 그 역할극이다. 그리고 온화하면서도 긴장감 서린 건 <사랑에 빠진 것처럼>의 이 역할극이다.

4-1.

<사랑에 빠진 것처럼>에서 역할극의 기본은 서로의 거짓말이다. 그럼에도 일반적으로 거짓말에 대한 도덕적 지탄의 분위기가 여기엔 없다. 이 영화에는 도덕적 위계를 짓지 않겠다는 분위기가 있다. 어쩌면 이 역할극은 창문이나 차창을 통해 이미지 위에 이미지를 겹치는 그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키아로스타미가 인용하기를 즐기는 13세기 페르시아 시인 루미, 언젠가 키아로스타미가 인용한 다음과 같은 시구가 있다. “네가 은혜의 시선으로 디브(페르시아 신화 속의 악마)를 본다면 너는 그것을 천사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5.

주인공들 이외에 조연이 등장하면 사건이나 이야기도 함께 등장한다는 걸 보여주는 건 정비소 장면이다(마찬가지로 몇 장면 뒤, 타카시의 옆집 중년의 여인이 등장하면 타카시 노인의 삶이 조금 밝혀진다). 결국 타카시와 아키코의 관계는 정비소에 나타난 옛날 제자이자 노리아키의 손님에 의해서 밝혀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가장 흥미롭고 긴장감 넘치는 건 끝까지 자동차 안에 웅크려 남은 아키코와 타카시에 반하여 무언가 왕성하게 그 바깥에서 움직이는 노리아키와의 대조된 구도다. 그러니까 꼭 마지막 장면의 전조인 것과 같은. 노리아키를 연기한 가세 료는 감독이 자신에게 “반드시 차창 위에 손을 반쯤 걸칠 것”을 요구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동시에 가세 료는 “내가 저들 세계 안에 속해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 바깥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었을 것”이라고 그 장면을 풀이했다.

6.

정비소를 지나 아키코와 노리아키가 타카시의 집으로 모여들기 전까지의 장면은 라스트신을 위한 발판 같다. 옆집 참견꾼의 등장이 유머러스하다. 처음 등장에서는 목소리로만 나오더니 기어이 얼굴을 보인 이 참견꾼 아주머니의 역할은 물론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된 서사의 바깥에 있는 인물이 시각적으로는 조그만 창문 안에 갇혀서 말하는 것이 웃기다. 수다를 떨어대는 이 불편한 이웃이야말로 친절히 말을 걸어오는 오즈 야스지로 영화의 옆집 이웃에 관한 키아로스타미의 유머처럼 보이기도 한다.

7.

외부로부터 날아온 돌멩이가 창문을 깨는 장면이 마침내 <사랑에 빠진 것처럼>의 마지막이다. 2012년 칸에서 영화가 첫 상영되었을 때 이 라스트 신을 목격한 극장의 분위기는 좀 어수선했다. 약간의 야유, “뭐야 이게?” 하는 분위기가 조성해내는 웅성거림.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의 라스트 신이 멋지고 결연하면서도 우아하다고 생각한다. 타카시가 집에 있을 때 외부로부터의 방해는 내내 존재했다. 전화벨, 음성 메시지. 그것이 본격적으로 오고야 마는 것이 집 주변을 오르내리며 소리 지르고 차를 부수(는것 같)고 주변의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노리아키의 분노에 찬 행동이다. 그 소리의 진원지를 따라 내내 방 안을 어기적거리는 노인 타카시는, 마치 보이지는 않은 채 들리기만 하는 것의 공격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보이는 것의 허둥댐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 돌멩이 한방에는 통쾌함과 시원함이 실려있어 해방적이다. 어쩌면 이 말 자체에 이 장면이 영화에서 갖는 특권적 위치가 있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은 비교적 감각보다는 사유의 촉발과 유도에 무게가 실려 있는데, 유독 이 장면만큼은 예외적으로 급작스러우며 감각적이다. 갑작스런 틈입과 파장이 가져온 감각의 단순성, 이 단순하고 명백한 감각적 충격이 좋다.

노리아키가 그렇게 한번 돌을 던지고 집으로 돌아갔을지, 아니면 더 큰 난리법석을 일으켰을지,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인생의 지속을 가리키는 것은 아닌지 하고 생각하게 되는 건, 시원하게 그렇게 창문이 한방 깨어진 다음의 일들이다.

8.

여자와 책의 닮은 점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고는 당돌하게도 대답을 생략한 아키코처럼 굴어보자. 혹은 우리도 질문의 돌멩이를 날리며 멈춰서보자. <사랑에 빠진 것처럼>을 본 당신에게. <사랑에 빠진 것처럼>이 한곡의 재즈음악처럼, 한편의 시처럼 느껴진다면, 그럼 된 게 아닐까요. 그런데 어떻게 닮았습니까?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