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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경] 부탁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하는 연습 중
윤혜지 사진 오계옥 2013-12-11

배리어프리영화위원회 이은경 대표

“그땐 제가 머리도 못 감았다고 했죠? 오늘은 목욕탕 갔다 왔어요!” 지난 11월14일, <위 캔 두 댓!> 더빙 현장에서 만났던 배리어프리영화위원회 이은경 대표는 녹음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느라 제대로 씻지도 못했다고 하소연했다. 말이 하소연이지 오히려 그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더빙 작업이 즐거워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았다. 11월26일 인터뷰를 위해 배리어프리영화위원회 사무실에서 다시 만난 이은경 대표는 시원스러운 입매에 특유의 미소를 걸고 기자를 맞이했다. 비좁지만 이곳저곳이 훤하게 뚫려 고개만 돌려도 서로의 눈이 마주치는 사무실에선 서글서글한 인상의 직원들이 분주하게, 하지만 환하게 웃으며 일하고 있었다. 영화제를 앞두고 모두 조금씩 들뜬 듯했다. 개막을 앞두고 동분서주하는 이은경 대표의 시간을 잠시 빌렸다.

-기사가 나갈 때쯤이면 영화제는 이미 끝났겠다. =장애가 있어 평소에 영화를 잘 못 보시는 분들만 오는 건 의미가 없는 것 같고, 비장애인들과의 벽을 허물어 같이 어울린다는 게 포인트이기 때문에 가능하면 관객이 많이 들었으면 좋겠다. 영화제로 끝내는 게 아니라 공동체 상영도 진행하니 앞으로도 배리어프리영화를 알아갈 기회는 많다.

-올해는 본격적인 영화제 모양을 갖췄다. =1, 2회 때는 관심을 환기할 모임은 필요한데 영화가 두편밖에 없었다. 첫회는 일단 배리어프리영화를 알리자는 목적으로 행사를 연 거다. 2회 땐 부대행사 없이 영화만 틀었다. 올해는 예비사회적기업 사업개발비를 받게 돼서 배리어프리공연도 만들게 됐고 신작도 많이 생겼으니 영화제를 꾸려보자고 했다. 인원은 많지 않은데 벌여놓은 일이 많아서 무척 바쁘다.

-실무를 맡은 김수정 사무국장과는 어떻게 의기투합했나. =같은 동국대학교 영화과 대학원 출신이다. 김수정 사무국장이 한 학기 후배다. 나는 1992년부터 현장에서 스크립터로 영화일을 시작했지만 메인스트림에서 영화를 만들기보다 시장 밖으로 나오는 길을 택했다. 김수정 사무국장은 영화제나 극장을 돌며 일하다보니 독립영화진영, 여성영화인들과 돈독한 관계다. 둘 다 영화 한길 이십년 인생이다. (웃음) 그나 나나 오래, 꾸준히, 착실하게 일하자, 라는 스타일이라 서로 신뢰를 쌓은 것 같다.

-20년간 쌓아온 인맥으로 위원회가 유지되나보다. =3년쯤 한국을 떠나 일본에서 각국 영화계를 연결하는 코디네이터로 일했는데, 중개인 역할을 하다보면 여기저기 도움을 주게 된다. 출판사에 연락을 해준다든가, 번역가를 구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일로 받긴 사소한 부탁들을 많이 들어줬다. 내가 도움을 준 곳이 많으니 도와달라고 부탁하기도 편하다. 뿌린 만큼 거두는 중이라고 할까. (웃음)

-일본에선 주로 무슨 일을 했나. =한/일 프로덕션 코디네이터로 일하며 계약을 주로 맡았다. 어소시에이트 프로듀서로 계약부터 현장까지 모두 조율해야 했다. 주로 가도가와픽처스에서 만든 합작영화를 했는데 <착신아리 파이널> <첫눈> 등을 담당했다. 온전히 기획부터 영화를 다 완성한 건 <AV아이돌>이 있다.

-한국영화의 확장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다가 아시아 시장에 눈을 돌리게 됐다고 말한 바 있다. =대학원에서 아시아영화를 많이 접했다. 중국 5세대 감독들 영화나 오즈 야스지로, 구로사와 아키라, 미조구치 겐지 등의 일본 고전영화, 당시 부산국제영화제에 소개된 이와이 슌지, 기타노 다케시, 사부의 영화들이 내겐 충격이었다. 기존 할리우드영화와는 확연하게 다른 이 영화들이 어떤 시장에서 어떻게 소비되는지 궁금했다. 자연히 바깥 시장에 시선이 갔다. 한국에선 망하는 <롤라 런> <트레인스포팅> 등이 일본의 미니시어터 박스오피스에선 상위권에 랭크되더라. 그래서 일본의 미니시어터 시장에 대해 논문을 썼고, 일본으로 건너가 작은 영화들이 유통, 소비되는 과정에 대해 연구했다.

-배리어프리영화도 일본에서 처음 접했다고 하는데. =고영재 프로듀서에게 <워낭소리>의 일본 배급을 맡아줄 배급사 시그로를 소개한 적이 있다. 시그로의 야마가미 데쓰지로 대표가 배리어프리영화를 만드는 분이었다. 그해 사가현에서 열린 첫회 사가배리어프리영화제에 일본어 배리어프리버전의 <워낭소리>가 상영됐다. 다른 배리어프리영화들도 봤다. 내가 말이 많아서 그런지 화면해설이 불편하긴커녕 너무 재밌는 거다. <술이 깨면 집에 가자>를 보는데 화면해설하는 변사가 재밌게 해설을 해주니까 영화가 훨씬 좋아지더라. 배리어프리버전이라면 한국에서도 통하겠다 싶어서 냉큼 수입했다.

-그 무렵 영화사 조아를 이끌다 예비사회적기업 배리어프리영화위원회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배리어프리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영화사 조아에서 수입해 배리어프리영화를 만들었다. 그런데 영리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회사에서 배리어프리영화를 제작하자니 지원받기도 힘들고, 수익성이 없었다. 그래서 배리어프리영화위원회를 따로 만든 거다. 영화사 조아는 이혜경 대표가 맡고, 나와 김수정 사무국장은 배리어프리영화위원회로 넘어와 조아와 협력관계를 맺고 있다. 우린 사회적기업이라 따로 수입을 못하기도 하고, 다른 수입사를 통하자니 거길 설득하는 과정이 따로 필요한데 조아를 통하면 그 과정이 생략되니 편하다.

-배리어프리영화 한편을 만드는 데 제작비는 얼마나 드나. =극장 개봉이 가능한 퀄리티로 만들기까지 한국영화는 대략 1500만원, 외화는 더빙 비용을 더해 2천만원 정도 든다. 제작과정의 대부분을 재능기부받는다고 쳤을 때 최소한의 실비가 그렇다. 화면해설작가와 자막업체엔 비용을 줘야 한다. 감독과 배우들에게 재능기부를 받는 대신 간식이라도 열심히 제공해드려야 한다. (웃음) <위 캔 두 댓!>만 해도 녹음실 빌리고, 믹싱 전문가 모신다고 하면 최소 4천만원은 드는데 다행히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녹음실을 쓰게 해줬고, 스튜디오SH의 김영록 실장이 사운드 믹싱을 담당해줬다.

-<위 캔 두 댓!> 배리어프리버전 제작비는 크라우드 펀딩으로 충당했다. =배리어프리영화 자체가 생소한 개념인 데다 영화도 마이너한 성격의 영화여서 사실 모금은 잘 안 됐다. 내가 지갑을 열어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까지 단계가 많이 필요한 것 같다. 관계자가 많은 프로젝트엔 유용할 것 같은데 배리어프리영화엔 크라우드 펀딩 방식이 안 맞는 것 같다.

-결국 많은 부분을 재능기부나 지원금에 의존해야 하는데, 여기저기 아쉬운 소리도 많이 했겠다. =어떤 분이 그러셨다. “부탁하지 말고 당당하게 말해라”라고. 재능기부하는 단체나 개인도 이거 해주고 좋은 이미지를 얻어갈 수 있다고 하더라. 그 뒤로 당당하게 말하고 있다. 행사 다니면서 감독님이나 제작자 분들 만날 때도 “영화 좋은데 배리어프리버전도 만드셔야 되겠다고, 제작비 뽑아두시라”고 말하고 다닌다. (웃음)

-대형 투자배급사와의 접촉도 시도해봤나. =CJ와 쇼박스는 힘들었다. 대기업은 담당자가 혼자서 결정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 위로 올라가면서 매번 설명을 해야 하는데 배리어프리영화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으면 수긍하지 못하더라. 담당자도 매번 바뀐다. <블라인드> 배리어프리버전을 만들 때엔 안상훈 감독님이 시각장애인들에 대해 우리보다 더 많이 알고 계셨다. 배리어프리버전으로도 당연히 개봉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계시더라. 제작사에서 NEW에 말을 전해줬는데 NEW는 다른 투자배급사에 비해 결정이 빠른 편이라서 금방 결정이 됐다.

-영화는 지원받아서 만든다고 치자. 개인적인 생계는 어떻게 꾸려가고 있나. =영화사 조아를 그래서 만든 건데…. 돈 안 되는 영화들을 하면서 그게 될까 지금은 의문이다. (웃음) 그나마 <위 캔 두 댓!> 공동체 상영이 잘돼서 다행이다. 어차피 영화 하는 사람들 돈 많이 버는 거 아니지 않나. 사회적기업이 받는 혜택이라도 잘 활용해보려고 한다. 아직까진 영화 좋아하는 마음으로 개인적으로 빚 내가면서 일하고 있다. 배리어프리영화 만들기 시작한 지 2년이 돼가니까 기업에서도 조금씩 알아주는 것 같다. <사랑의 가위바위보> 제작을 후원한 코오롱스포츠도 있고, LGU+에서 IPTV로 배리어프리영화 VOD 이용자들에게 받는 이용료의 일부를 배리어프리영화 제작비로 지원하겠다는 말도 해줬다. 그렇게 모인 돈은 아마 <늑대아이> 배리어프리버전 제작에 쓰일 것 같다.

-부가판권시장에서 더 경쟁력이 있을 수도 있겠다. =뇌성마비라 극장에 오기 힘든 분들 중에서도 영화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다. 부가판권은 상대해야 하는 회사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어서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말하기엔 진이 빠지기도 한다. 온라인 부가판권도 NEW만 다 해결해줬다. NEW 영화는 IPTV에서 배리어프리버전을 모두 볼 수 있다. 롯데의 <마당을 나온 암탉>은 심재명 대표님께 먼저 말씀드렸더니 오케이가 됐다. <더 테러 라이브>는 아직 논의 중이지만 이춘연 대표님을 먼저 찾아뵀더니 대표님이 배급사에 전화를 넣어주셨다. (웃음)

-고생이 많은데 이 일을 왜 시작했을까 후회한 적은 없나. =…없을 리가. (웃음) 그런데 김수정 사무국장이나 나나 영화 하나 보고 달려온 인생이다. 영화시장에서 꾸준히 우리의 자취를 남길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쯤 배리어프리영화 제작을 시작하게 됐고, 워낙 둘 다 비주류 진영에 오래 있던 사람들이라 의견이 잘 맞았다. 우리가 안 하면 아무도 안 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웃음) 시작하니까 책임감이 확 생겨버리지 않았겠나. 지금도 녹음하거나 상영할 때 수시로 울컥한다. 예전엔 힘들어서 그랬다면, 지금은 감동에 벅차서 그런다. <인 어 베러 월드>를 보는데 소년의 눈이 그렇게 인상에 남더라. 이런 시각적인 감동을 어떻게 화면해설로 설명해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시각장애인인 어떤 박사님께서 당신에겐 안 보이는 세계가 정상이고, 눈에 뭐가 보이면 비정상이라고 하셨다. 아차 싶었고, 굳이 시각장애인은 이런 걸 보지 못하니 얼마나 슬플까 생각할 필요가 없단 걸 알았다.

-많이들 시각장애인에 대해 그런 오해를 하는 것 같다. =장애인들도 ‘내가 극장에서 돈 내고 영화 볼 만한 환경이 만들어져야 하지 않겠느냐’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돼야 한다. ‘장애인들이 영화 보는 걸 우리가 도와줘야 된다’는 식의 인식을 깨야 오히려 배리어가 없어질 거다. 그래서 영화 만들 때 퀄리티에 신경 쓴다. 영화의 퀄리티가 나쁘면 비장애인과 똑같은 포인트에 울고 웃으면서 같이 보기 어려울 거라고 판단했다. 배리어프리영화는 장애인 복지에 관련된 부가서비스가 아니라 영화를 관람하는 또 하나의 포맷으로 완성도가 있어야 한다. 우린 결국 영화 만드는 사람들이다. 영화를 공부하고, 만들어본 사람들인데 엉망으로 대충 만들 순 없지 않겠나.

-3년을 잘 버텨왔다. 배리어프리영화위원회의 2014년은 어떠할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고 같은 경험을 공유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40대 이상의 시각장애인들은 야한 영화도 배리어프리버전으로 만들어달라고 한다. 당연한 요구다. 그래서 영화진흥위원회에 에로 배우를 화면해설사로 모시고 배리어프리 에로영화 한편 만들겠다고 했더니 펄쩍 뛰면서 안 된다고 하더라. 언젠가는 제대로 된 공포영화나 에로영화도 만들고 싶다. 내년부터는 후원계좌를 오픈할 예정이다. 1인당 1만원씩 후원자 1천명을 모을 계획이다. 1천만원이면 한국영화를 한편 만들 수 있다. 한달에 1만원씩만 모아도 일년이면 12만원이고, 그분들은 열두편 영화의 제작자가 될 수 있는 거다. 솔깃하지 않나. (웃음)

콘텐츠 제작만큼 사회적인 인프라 확보도 중요하지 않을까. 배리어프리영화를 보고 싶어도 장애인들이 바깥 나들이를 마음껏 할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인가. 장애인들의 이동권 요구마저도 외면하는 사회 분위기를 감안할 때 당연히 떠오르는 질문이다. 이은경 대표 역시 고민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는다. “그들이 극장에 올 수 없도록 만드는 불편한 동선과 시스템 자체가 그들을 향한 배리어다. 하지만 배리어프리영화가 극장에 걸려야만, 그래서 그들이 영화를 보러왔을 때에야만, 비장애인들은 못 느끼는 사소한 불편함들이 눈에 띌 수 있다” 자신의 역할은 “숨은 배리어들을 찾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은경 대표는 “배리어프리영화를 보길 원하는 관객이 단 한 사람뿐이더라도 그 관객이 있기에 배리어프리영화는 존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올곧은 그 신념이야말로 이 대표의 가장 큰 자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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