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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혁] 이번에는 팝콘 먹으면서 보세요

<도가니> 이후 2년, <수상한 그녀>의 황동혁 감독

2011년 대한민국은 <도가니>로 들끓었다. 장애인학교에서 행해진 비인간적 행위가 수면 위로 떠올랐고 아동/청소년 성폭력 범죄 처벌을 강화하는 ‘도가니법’이 제정됐다. 영화 한편이 올린 엄청난 개가였다. <수상한 그녀>는 <도가니>의 파장을 불러일으킨 황동혁 감독이 1년에 걸쳐 준비한 신작이다. 사회 비판적 성격이 강했던 전작의 기운을 내려놓고 코믹 판타지물을 집어들다니, 다소 의외의 선택이다. 이 영화는 요양원에 갈 위기에 처한 70대 할머니가 스무살 청춘의 몸이 되어 겪는 코믹한 해프닝이 주를 이룬다. 황동혁 감독은 “<도가니>를 보며 숨죽여야 했던 관객, 들고 갔던 팝콘을 먹지 못하고 가지고 나와야 했던 관객”을 언급하면서 이번 작품이 자신을 포함해 그때의 관객 모두에게 힐링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수상한 그녀>는 ‘수상한’ 선택이다. (웃음) 입양아의 사연을 그린 <마이파더>의 묵직한 울림과 <도가니>의 사회적 파장과는 거리가 있는데. =<도가니> 이후 무거운 영화, 대작 블록버스터 제안이 많았다. 평소 나는 심각한 사람이 아니기에 지인들은 오히려 <마이파더>나 <도가니> 같은 묵직한 영화를 만드는 걸 의아해했다. 코미디영화는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는데 마침 그때 이 영화의 시나리오 초고를 받았다. 잘 다듬으면 내 개그 코드를 넣을 수 있겠더라. 영화 속 로커 ‘반지하’ (진영)가 부르는 현실 비판적인 노랫말을 넣은 걸 빼고는 이 작품이 사회 비판적이어야 한다는 강박은 모두 버렸다. 이번엔 웃고 즐길 수 있는 영화를 하고 싶었다.

-<도가니>는 관심과 격려만큼 연출자로서 책임이 큰 영화였다. 그 여파가 부담 없는 영화에 대한 갈증을 키운 것 아닐까. =모든 인터뷰에서 똑같은 질문을 받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이런 영화를 어떻게 찍었냐”고. 할리우드처럼 제도적 장치가 있으면 따르면 되는데, 그런 가이드가 없는 상태에서 그 부분에 대한 공격을 받으니 힘들더라. 만들면서도 갈등이 컸다. 상업영화로 장르의 재미와 공식도 배제할 순 없는데 어디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매 순간 이게 최선인가 고민해야 했다. 이후 불면증이 생겼고 담배도 늘었고 살도 많이 빠졌다. 울컥 하는 순간이 많아졌고 한층 더 시니컬해졌다. 나 자신의 힐링을 위해서라도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수상한 그녀>가 일종의 치유제였나. =한달 만에 시나리오를 썼다. 그만큼 쉽게 썼다. 머리를 쥐어뜯지 않고 평소 내가 다른 사람들을 웃기듯이 부담 없이 어깨 힘 빼고 편하게 작업했다. 캐스팅도 잘됐다. 수차례 오디션을 봤던 전작과 달리, 이번엔 장르의 특성상 알려진 배우들을 떠올렸는데 내가 원했던 배우들이 모두 참여해주었다. 예전에 심각한 영화를 하면서 어떻게 하면 더 지독하게 할까 고민하느라 사람이 더 독해졌다면 이번 영화는 웃고 떠들면서 찍어서 즐거웠다.

-실제 사건을 토대로 만든 전작들과 달리 이번엔 픽션이라는 점에서도 새롭다. =내가 홀어머니, 홀할머니와 산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다. 그러니 난 아버지를 일찍 잃은 영화 속 아들인 반현철(성동일)이자 할머니의 사랑을 끔찍하게 받고 자란 손자 반지하이기도 하다. 그래서 내게는 이 작품이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아니라 다큐멘터리 같이 다가왔다. 할머니와 젊은 여성이 바뀐다는 설정만 빼고 본다면 아주 현실감 있는 휴먼 드라마였다.

-70대 어머니 오말순(나문희)은 가난을 경험한 세대이고, 자식 건사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해온 존재다. 많은 자식들에게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성동일 선배님이 본인의 어머니도 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하며 고생고생하면서 자식들을 키우셨다면서 시나리오에 공감했다고 하시더라. 아마 많은 사람이 오말순을 보면서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자식들 뒷바라지하고 출세시키는 게 어머니들의 유일한 바람이었다. 내 어머니 역시 서른살에 남편과 사별하고 평생 시어머니 모시고 자식들 키우며 살아왔다. 특정인을 관찰하고 조사하던 전작들과 달리 이번엔 초고를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 치중했다.

-아들밖에 모르는 오말순은 요즘에는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기 힘든 캐릭터다. 며느리에 대한 이해가 없고 고집이 센 부정적 시어머니다. 그런데 70대의 오말순이 20대의 오두리(심은경)로 변신하면서 같은 언어, 같은 행동을 하지만 그 순간 매력적인 여성성을 획득한다. 가벼운 터치지만 노인 문제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주는 부분이다. =강의실의 젊은이들은, 노인을 행동이 느리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인물로 묘사한다. 그런데 노인들이 태어날 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우리도 언젠가 그렇게 될 거고 그들이 거기까지 간 세월이 있었다. 결국 육아와 가사에 매달리면서 흘려버린 그들의 청춘을 되짚어보고 싶었다. 젊은 시절 그녀가 남의 식당의 비법을 훔쳐 달아난 게 밝혀지는 장면에서는 도의를 저버린 행동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하지만 자식을 위해 억척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들의 모습이었다. 그걸 보여주기 위해 캐릭터를 바닥으로 끌어내려보자 싶었다.

-판타지물로서 오말순의 환상을 실현시켜주는 공간 ‘청춘사진관’은 아날로그적인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장치다. 놀이공원에서 갑자기 어른으로 변신하는 <빅>의 정서와 닮았다. =그곳이 바로 오말순이 영정사진을 찍으러 간 곳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죽음을 준비하러 간 사진관에서 다시 젊음을 얻는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하고 싶었다. 화려한 CG나 효과는 배제했다. 내가 <빅>이나 <사랑의 블랙홀> 같은 영화를 매우 좋아하는데 그런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적극 활용해보고자 했다. CG를 많이 사용하면 예산이 많이 들지 않나. (웃음)

-오말순과 오두리를 같은 인물로 받아들이는 과정은 자칫하면 관객에게 무리한 요구가 될 수 있다. 이 변화를 수긍할 수 있게 해야 드라마의 리듬이 이어질 수 있는데, 코믹하고 소박한 방식으로 접근했다. =물론 황당한 설정이었다. 나문희라는 배우가 심은경으로 바뀔 때 관객이 무리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 부분이 이입이 안 되면 주인공을 따라갈 수 없는 거다. (심)은경씨한테 이 장면에서 관객을 못 홀리면 끝이라고 누차 강조했다. 속도감이 생명이었다. 변화하고 나서 오두리가 바뀐 모습을 확인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하숙집에 가기까지의 과정이 일사천리로 빠르게 이어져야 했다. 전반부의 사실적이고 드라마적인 장면이 심은경이 등장하며 코믹으로 전환되면서 다른 장르의 영화 같은 느낌이 들도록 의도적으로 만들었다. 정신없이 웃고 빠져들면서 자연스럽게 오두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장치했다. 물론 첫 촬영 때 은경씨한테 가발을 씌워놓고 보니 너무 이상하더라. 이게 될까 싶었다. (웃음)

-그 부분에서 시작부터 심은경이 제대로 해낸다. 전반부의 사실적인 느낌을 걷어내고 코믹물의 분위기를 한껏 살린다. =애초 이 작품은 여배우 한명을 위한 영화였다. 오두리를 스타로 만드는 영화라고 설정했고, 나머지 배우들이 이 캐릭터를 얼마나 받쳐주냐가 관건이었다. 초고에는 오두리가 좀 어른스럽고 섹시한 이미지도 있어서 <은교>의 김고은을 떠올렸다. 그런데 시나리오 수정을 하다보니 심은경이 더 맞겠다 싶었다. 그렇게 설정을 하니 시나리오도 더 잘 써졌다. 아역 시절부터 심은경이란 배우를 눈여겨봤다. <써니>의 코믹한 면모와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진실한 모습 모두 연출 가능한 배우다. 물론 한번도 극 전체를 이끌어간 적이 없는 배우라 두 시간을 이끌다보면 관객에게 피로감을 줄 수 있었다. 끝까지 물리지 않도록 리듬을 조절하는 데 중점을 뒀다.

-극을 주도하고 이끌어가는 심은경을 통해 주연급 여배우를 새롭게 발굴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아역 이미지가 강한 심은경을 전면에 내세우는 건 모험이기도 했다. =반대가 좀 있었다. 그런데 투자를 한 CJ E&M의 정태성 대표가 선뜻 손을 들어주셨다. 이미 검증된 배우라면 잘 돼도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수준일 텐데, 그럴 바엔 아예 신선하게 모험을 걸어보자고 하셨다.

-심은경은 코믹한 연기뿐 아니라 슬픈 감정까지도 무리 없이 끌어낸다. =감정이 풍부한데 그걸 제어할 능력도 있는 배우다. <하얀 나비>를 부르는 장면에서 마지막에 음~ 하고 허밍 한번 하고 눈물 한 방울 흘리고 눈을 들어 살짝 미소를 지어달라고 요구했다. 복잡한 장면이니 다들 끊어가자고 하는데 내가 한번에 가자고 고집했다. 그런데 그걸 하더라. 그걸 보고 은경씨한테 “로봇이지? 연기 로봇 맞지?”라고 했다. 마음 놓고 뛰어놀 여지를 마련해주면 상상도 못할 역할을 해낼 친구다 싶었다.

-오두리의 슬픔을 표현하는 매개로 80년대 곡인 김정호의 <하얀 나비>를 선택했다. =80년대 노래라 내 어머니 세대의 노래는 아니지만, 노래 자체로는 딱 맞아떨어지지 싶었다. 그게 이 영화에서 가장 잘한 선택인 것 같다. ‘생각을 말아요. 지나간 일들. 때가 되면 다시 필 걸 서러워 말아요.’ 가사를 읊조려봤는데 인생의 끝자락에서 황혼을 보내는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건네는 위로 같더라. 정말 ‘유레카’를 외쳤다. 김정호의 원곡이 더 절절한 감성을 싣고 있다면, 조금 모던하게 소녀의 목소리와 어우러지게 편곡을 했다. 이편이 담담한데 더 와닿더라.

-웃다가 울리는 감동 드라마의 구도지만 격하게 감정을 끌어내지는 않는다. <마이파더>에서 입양아 파커의 심경을 담담하게 묘사하거나 <도가니>의 마지막 장면에서 강인호의 무력한 눈빛이 주던 울림과 같은 맥락의 연출이다. =초고에서 내가 많이 덜어낸 장면이 마지막의 병원 복도 장면이었다. 영화에서 감정을 가장 격앙시키는 부분인데 너무 과하다 싶었다. 이런 장르의 작품들이 대부분 마지막에 울려야 한다는 강박으로 휘몰아치게 마련이다. ‘거기까지만 하면 됐어’ 하는데도 보통 더 감정을 짜내고 음악을 사용해 사람을 질리게 하는 경우도 많이 봤다. 관객으로서는 눈물이 조작당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기분이 좋지 않다. 이 영화에서 내가 자부하는 건 그렇게 감정을 몰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마음을 건드려 눈물을 끌어내자는 생각으로 했다. 시나리오 쓸 때부터 절제하려고 노력했고, 음악감독 모그와도 스며들듯 가자고 했다.

-성동일이란 배우의 색다른 활용에서 그 의도가 잘 드러난다.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코믹 연기를 전면 배제했는데. =성동일 선배에게 말했다. “웃기려고 캐스팅한 게 아닙니다. 울리려고 캐스팅했습니다.” <응답하라 1997>을 보다가 성동일 선배에게서 마음을 움직이는 진실함을 봤다. 가끔 성동일 선배 특유의 코믹 본능이 튀어나와 애드리브를 할 때도 있었는데, ‘나 이거 편집 타이밍 두고 할게’ 하시더라. (웃음) 거슬리면 빼라는 것이었다. 앞부분에 코믹한 여지를 줄 수 있는 장면에서도 은경씨한테 맡기고 정극 연기를 하는데, 그 절제가 결국 마지막에 임팩트 있게 살았던 것 같다.

-오두리의 삼각멜로도 극의 한축을 담당한다. 방송국 PD 한승우(이진욱)와의 멜로는 청상과부로 살아온 오말순의 기구한 연애사에 대한 보상이자 애잔함을, 평생 그녀를 연모해온 박씨(박인환)의 짝사랑은 코믹하면서도 쓸쓸한 분위기를 더한다. =은경씨가 아니었더라면 PD와 좀더 파격적인 멜로로 진행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웃음) 오두리의 사랑을 어느 정도까지 실현시킬지 고민했는데, 멜로의 수위를 낮추고 은은하고 아련한 느낌만 주기로 했다. 우리 부모님들이 그렇게 사셨다. 어릴 때 어머니에게 재혼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는데, ‘그럼 니들은 어떻게 하고’ 하시더라. 결국 이 영화는 멜로의 실현이 아니라 핏줄에 관한 이야기다. 판타지 속 오두리는 자기 자리로 돌아와야 하는데, 그 계기가 핏줄이 된다. 흔히들 다시 태어나서 결혼할 때 이 남자(현재 남편)와 하겠냐고 하면 안 하겠다고들 하지만, 자식은 그대로 갖고 싶다고 하지 않을까 싶다.

-<수상한 그녀>로 즐거운 기운을 받았으니 다음엔 심각한 영화도 가능해진 건가. =초능력자 나오는 SF물을 쓰고 있기는 한데 일단은 다 접어놓고 좀 쉬고 싶다. 들어오는 시나리오도 다 거절한 상태다. 아직 불면증이 낫질 않아 요즘도 1~2시간밖에 못 자는데 한번은 강원도 가서 자는데 그날 잠이 잘 오더라. 잠 잘 오는 데 찾아가서 조금 쉬고 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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