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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
김혜리 2014-02-13

※ 1월10일, 11일 일기와 사진 설명에 <만찬>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만찬>의 말미에는 거의 숙명처럼 보이는 폭설이 내린다. 관객은 외출한 인철의 가족이 귀가하길 바라면서도 한편으로 돌아오지 않기를 원하는 모순된 입장에 처한다. 그동안 영화는 우리로 하여금 이름도 모르는 형사들의 피로한 얼굴을 쳐다보게 만든다. 그러다 문득 우리는 이 익명의 남자들이 돌아갈 집과 거기 있을 가족을 상상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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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가장 유쾌한 한탕. 제대로 사기치고 화끈하게 즐겨라!”

나는 지금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보도자료 표지로도 인쇄된 한국판 포스터의 카피를 보고 있다. 이건 좀 세다. 문구에 힘입어 한국판 포스터의 조던 벨포트는 훨씬 동경할 만한 인물로 보인다. 이 카피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가 공개된 직후 <LA 위클리>에 항의 글을 투고한 금융사기 피해자 가족들에겐 보여주지 않는 편이 나을 성싶다.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는 공개 직후 논란에 휘말렸다. 2008년 월가 위기의 근원인 금융인의 부도덕을 부러워할 만한 라이프스타일로 미화했다는 것이 비난의 핵심이다. 소란의 빌미는 마틴 스코시즈가 영화의 내용과 양식을 아주 착실히 일치시킨 데에 있다. 캐릭터의 선악을 판정하는 데에 소싯적부터 관심이 없었던 스코시즈는 자기도취와 과잉으로 점철된 스토리를, 경주마처럼 시야를 제한한 조던 벨포트의 편협한 시점에 철저히 입각해 흥청망청한 형식으로 찍었다. 벨포트는 카메라에 대고 직접 자신의 관점을 설교하고 화면은 패닝과 슬로모션에 정지화면도 아끼지 않는다.

판단하건대 이 영화가 윤리를 내다버린 금융인의 삶을 미화했다는 비난은 부당하다. 첫째,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를 보고 조던 벨포트를 롤모델로 긍정하느냐, 혐오하느냐는 관객 개인의 가치관과 관객이 속한 사회가 어떤 인생을 성공으로 보느냐에 90% 좌우된다. 예컨대 관객의 한명인 나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를 보는 내내 조던 벨포트의 인생이 전혀 부럽지 않았다. 벨포트는 “내가 부도 가난도 두루 겪어봤는데 가난에는 고귀한 점이 전혀 없다(there is no nobility in poverty)”고 단언하지만 우리가 보는 벨포트의 사치스런 삶에도 고귀한 점은 없다. 별나게 성인군자인 관객만 이렇게 느낄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나는 선량한 투자자를 등치고 희희낙락한 그의 행태가 징그러웠다. 회사의 사기를 북돋운다고 여직원의 삭발을 이벤트화하고 신입사원의 금붕어를 재미삼아 죽이는 장면은 호러에 가까웠다. 이 장면들을 애사심 만발의 감동적 축제로 받아들이는 관객이 있을까. 가능하지만 적어도 내 기억에 연출이 그렇게 부추기지는 않았다. 둘째, 조던 벨포트 회사의 이익 너머 희생자들이 전혀 조명되지 않는다는 비난도 마찬가지다. 확실히 일방적으로 희생된 선량한 개미 투자자들의 생활은 영화에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전화선 건너편 순진한 호구의 목소리로만 등장해 조롱만 받는다. 그러나 그들이 재현됐느냐 여부를 떠나 나는 영화를 보며 내가 속한 집단이 모멸당하고 있다고 느꼈다. 영화가 얼마나 사실적이고 진실한가는 시점의 다수결과 근본적으로는 상관이 없다. 보수 반동 독점 자본가의 시점을 철저하게 형상화한 소설과 만화, 영화는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슬로건으로 점철된 상투적인 혁명영웅담보다 말도 못하게 진보적이다. 셋째, 벨포트가 법망을 적당히 통과해 합당한 무게의 처벌을 모면해 자기계발 세미나의 스타로 살아간다는 결론에 대한 분노도 표적이 잘못됐다. 벨포트의 현재는 감독의 도덕적 판결이 아니라 팩트이며, 그 사실 자체가 이 영화가 던지는 신랄한 메시지의 일부다.

다만 내가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에 가해진 비판 가운데 수긍하는 주장은 두 가지다. 하나는 앞서 비교한 스코시즈의 전작 <코미디의 왕>이 가졌던 냉정함이 결여돼 있고, 주인공의 폭주에 영화가 온몸을 던져 감각적으로 편승하고 있다는 점. 그러나 여기서도 스코시즈를 변호할 핑계는 있다. 관객을 어린아이 취급하는 수많은 영화들에 비해 이 영화의 ‘죄목’은 성인 관객의 판단력을 지나치게(?) 신뢰했다는 데에 있다. <코미디의 왕>의 주인공 루퍼트 펍킨(로버트 드 니로)은 우리가 우월감을 갖고 비웃기 수월한 인물이지만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조던 벨포트는 자수성가 청년 재벌의 이상형과 한끗 차이다. 조던 벨포트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우리는 더 많은 자유와 위험을 허락받는다. 이 선택이 영화를 더 용감하게 만드는지 비열하게 만드는지 나는 쉽사리 단언할 수 없다. 수긍하는 동시에 전혀 옹호할 여지를 찾을 수 없는 두 번째 비판은, 영화 바깥에서 제기됐다. 스코시즈는 실존 인물 조던 벨포트를 뉴질랜드 세미나 장면에서 자기계발 전도사가 된 극중의 자신을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사회자로 카메오 출연시켰다. 카메오 자체는 문제 삼지 않을 수 있지만, 맡은 역할은 적잖이 꺼림칙하다. 더한 결정타는 디카프리오의 ‘과외 활동’이다. 우여곡절은 알 수 없으나 유튜브를 검색하면 2013년 8월에 등록된 배우의 인터뷰 영상이 있다. 여기서 디카프리오는 본인이 곧 연기할 조던 벨포트가 과거를 반성한 솔직함을 치켜세우고 젊은 사업가 지망생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탁월한 인물로 칭찬하고 있다.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라는 영화의 창작자들이 ‘심정적으로’ 조던 벨포트에게 우호적이었다는 심증을 피해갈 도리가 없다. 물론 이 부지런한 스타는 자신이 연기하는 모델에 대한 예의바른 발언이 몇달 뒤 개봉할 영화를 오해하게 만들 줄을 미처 몰랐을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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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스코시즈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치르고 있는 곤욕은 실화를 영화로 옮기는 공정에 작가와 감독이 맞닥뜨리는 윤리적, 미학적 선택이 얼마나 까다로운지를 일깨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건 지난 연말부터 영화관을 나서는 길에 머리 한구석에 달라붙었던 주제였다.

첫 계기는 <변호인>이 끝나고 검은 스크린에 떠오른 “이날 (송 변호사가 기소된) 재판에 부산의 변호사 142명 중 99명이 공동변호인단으로 출석했다”는 요지의 추신 자막이었다. 흥미를 자극하는 지점은 자막의 내용이 아니라 위치다. 대우조선 분규 도중 희생된 노동자 유족을 지원했다가 노무현 변호사가 법정에 섰던 실제 재판에 관한 팩트를 전달하는 이 자막은 언뜻 익숙한 영화의 마무리 형식이다. 그러나 나는 순간, 냉장고 속 양말처럼 ‘뭔가 어긋난 그림’을 본 기분에 사로잡혔다. ‘본편’이 끝난 다음의 까만 바탕화면은 암묵적으로 극적 세계의 외부에 존재한다는, 관객으로서 내가 체득한 관습법 탓이었다. 예를 들어 <쉰들러 리스트>가 끝나고 쉰들러와 여타 인물의 후일담이 자막으로 흐르는 모습은 자연스럽다. 세부 에피소드가 얼마나 허구화됐느냐와 무관하게 실존 인물을 실명으로 거론한 영화라면 극중 캐릭터가 이야기 속에서 겪는 사건이, 모델인 실존 인물이 실제 역사에서 겪은 경험 및 후일담과 직접 연결되기 때문이다. 팩션인 <광해, 왕이 된 남자>나 <관상>의 스토리가 마침내 마무리되고 암전된 화면에 올라가는 자막이, 실존 인물 광해군, 허균, 세조, 한명회의 말로를 전언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 자막들이 광대 하선이나 관상가 내경의 노년을 아울러 서술한다면 규칙은 어긋나고, 냉장고에 양말이 들어가는 형국이 된다. 요컨대 <변호인>은 극중에서 송우석이라는 가상 인물로 설정된 주인공의 재판을 허구 바깥에서 우리가 기억하는 노무현 변호사의 재판으로 동일시하며 드라마/현실 가상문턱을 슥 가로지른다. 만약 영화가 에필로그 자막과 동일한 정보를 극이 끝나기 전 법정 장면 안에서 인물의 대사로 소화했다면 나는 아무런 잡념을 갖지 않았을 터다. 혹은 영화 속 내용을 지시하지 않은 채 노무현 변호사의 재판을 설명하는 자막이 흘렀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우리가 본 에필로그 자막은 “모두 알다시피 지금까지는 노무현 변호사의 이야기입니다”라는 말을 에둘러 한 셈이다. 나는 <변호인>이라는 영화가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스스로에게 강제한 영화의 포지션과 관객이 ‘이해하는’ 실체 사이의 어색한 불연속면이 문제의 마지막 자막이 흐르는 몇초에 함축돼 있다고 느꼈다. 급기야는 이 자막이 무의식적 발로일 수도 있지만 충분히 관습을 위반하고 있음을 인지하면서도 관객에게 던지는 은근한 눈짓일 수도 있다고 이해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혼잣말 “그래도 지구는 돈다”와 비슷한 사례일까?

한편 <집으로 가는 길>을 보고는, 실화를 효과적인 영화로, 즉 실화라서 강렬하고 재미있는 영화로 만드는 요령은 무엇인지 돌아보게 되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약을 운반했다가 프랑스에서 제대로 된 재판을 받지 못하는 국민의 수난기인 <집으로 가는 길>에는 주인공 송정연(전도연)의 통탄할 처지가 희화화된 악역(주프랑스 한국대사관 관계자들)과 교도관의 강간미수 행위를 통해 강조된다. 방은진 감독은 인터뷰에서 강간 사건이 허구적으로 보태진 하부플롯이라고 밝힌 바 있다. 감독의 고민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연출자는 오히려 대사관 직원들의 직무유기를 희화화하고 배우들의 연기도 얼마간 영화적 악인의 그것으로 양식화함으로써 우리가 보고 있는 이야기가 픽션화된 것임을 강조하고 실제 당시 관련 공무원의 불필요한 명예훼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결과물만 놓고 보면 이 선택은 그리 ‘경제적’이지 못했다. 가정은 두 가지다. 만약 <집으로 가는 길>이 대중영화로서 호소력의 초점을 한국 정부의 직무유기에 대해 고발하는 사회 드라마에 두었다면 시나리오는 최대한 장식을 제거하고 보다 철저히 사실에 입각하는 편이 맞다. 반면 <집으로 가는 길>이 영화보다 더 영화적인 실화로부터 훌륭한 픽션의 모티브를 취한 드라마로 자기 정체성을 규정했다면 훨씬 세련된 각본이 필요했다. 악역을 캐리커처화하고 누가 봐도 치 떨리는 성추행 일화를 넣어 관객으로 하여금 가해자를 주저없이 단죄하게 해주며, 결국 한국 네티즌(=관객)의 실력행사가 주인공을 구했다고 설명해 관객이 집단적 자기만족을 공유할 수 있도록 설계된 <집으로 가는 길>의 이야기는 매우 이해하기 쉽지만 바로 그 이유로 가볍고 평이해진다. 나는 작가/감독이 애초 장미정씨의 실화에 끌린 이유는 달랐으리라 짐작한다. 가령 외교부 공무원들이 현재 영화 속 묘사와 달리 평소처럼 상식적으로 일했으나 단지 충분히 근면하지 않고 부주의해 송정연이 부당한 고초를 겪었다면 이 캐릭터의 극한 체험과 삶의 모순이 덜 부각됐을까? 심지어 나는 이렇게까지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정말 영악하고 엄격한 스토리텔러라면, 실제 취재 과정에서 만난 인물과 사건이 뻔하게 부도덕하고 상투적으로 추악하다고 해도 그것을 극적인 설득력과 풍부함을 위하여 복잡하고 모호하게 각색할 거라고. 두 노선 어느 쪽에도 철저히 입각하지 못할 때 대체로 실화는 영화한테 핑계 아니면 등골 휘는 짐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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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 <만찬>을 개봉 앞둔 시사회에서 보았다. 인생에서 대단한 걸 바라지 않는 가족이 불운과 악의에 휘말려 넘어지고 지쳐가는 이야기를, 장남을 중심축으로 그렸다. 좋은 영화라 느꼈고 동시에 감독에게 질문할 거리가 많은 영화라고 생각했다. 둘은 반드시 일치하진 않는다. 몹시 아름다우면서도 감독에게 굳이 의도를 묻고 싶지 않은 영화도 있다. 김동현 감독의 구상이 궁금했던 까닭은 <만찬> 전반에 “적어도 이러저러한 연출은 하고 싶지 않다”는 고집스런 취향과 금제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명백한 예로, 이 영화는 이제껏 인물들이 갈등하던 사안이 매듭지어지는 순간이나 폭력과 언쟁의 정점을 생략해버린다. 관객으로서 감독이 무엇을 추구했는지를 알아차리긴 상대적으로 용이하지만 창작자로서 무엇(들)을 피하려고 애썼는지 넘겨짚는 건 만용이다. 그냥 질문하는 편이 낫다. <만찬>이 함정을 피하기 위해 신중을 기하는 영화라고 유추한 데에는 가족이란 소재가 워낙 많은 한국의 영화, 드라마, 소설이 물고 빨고 기리고 고발한 대상이라는 점이 작용했다. 숱한 전례와 상투형이 이미 산적해 있는 길이니, 다르면서도 작위적이지 않으려면 조심스런 궁리가 필요하다.

일단 <만찬>의 인물들은 경제사회적으로 한국 평균치에 해당하는 가족이지만, 영화 속 가족으로서 흔히 보던 사람들이 아니다. 이른바 ‘콩가루 집안’이 등장하는 한국영화에서 가족 구성원들은 세파에 찌든 나머지 본인들도 세상이 찌드는 데에 일조하고 있는 위악적 인물로 그려지는 경우가 잦다. <돈의 맛>의 재벌 집이건 <고령화 가족>의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가정이건 마찬가지다. 등장인물들은 몇번 뒤통수를 맞은 뒤 인간적 품격 따위는 이 ‘정글’에서 사치로구나 결론짓고 처분했으며, 서사는 그것을 불가피한 일로 묘사한다. 모든 품위는 사치 아니면 가식으로 치부되는 사회의 착실한 반영이기도 할 터다. <만찬>에서 인철(정의갑)네 식구들은 조금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다. 장성한 남매의 사연을 보자. 그들은 조기명퇴를 통보받고 ‘스펙’이 달려 모멸을 겪는가 하면, 무책임한 남편 탓에 결혼 실패의 후유증을 고스란히 떠안고 산다. 은퇴한 부모는 아이들을 성년까지 길러내고도 치하받으며 노후를 만족스럽게 보내기는커녕 뭔가 더 물려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위축돼 있다. 공평하지 않다(학자금 대출 상환으로 궁지에 몰린 막내의 전화를 받은 노모가 “엄마 믿지 마…”라고 가냘프게 대꾸하는 장면은 <만찬>에서 가장 서글픈 대목이다). 그러나 이 가족은 스스로 괴물이 되어 자신들에게 가해진 위해를 남에게 적극적으로 전가하는 인간형이 아니다. 한강에서 욕먹었다고 남산에서 욕하고 제가 사기당했다고 이웃에 사기치는 연산이 빨리 안 된다. 그들은 한국 사회의 일그러짐을 거스르지 못하고 대세에 휩쓸려 약자의 고통을 겪지만, 차마 세상이 무례하고 탐욕스러운 만큼 무례하고 탐욕스러워지지 못한다. 그러나 이들을 묘사하는 데에 ‘선량한’이라는 형용사는 불필요한 과잉이다. 예컨대 이혼한 딸/누이가 대책 없이 갓난아이를 떠맡고 돌아오자 가족 중 누구도 흔쾌히 손을 내밀지 않는다. 그들은 딱 평균의 우리만큼 무력하고 이기적이다. 하지만 몇년이 흐른 뒤 아이만 두고 누이가 죽었을 때 여전히 쪼들리는 인철네 가족들은 전처의 조막만 한 유산을 노리고 나타난 생부에게 “우리는 아이만 원해. 재산은 필요 없어”라고 적어도 망설이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인철과 가족들은 혜택받지 못한 ‘불쌍한’ 계층의 표본으로 영화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관객은 자학하는 위악적 캐릭터들에게 허락받는 은밀한 상대적 우월감을 <만찬>에서 가질 수 없다. 그들의 인생을 감히 가엾게 여길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그들 서로뿐이다.

여기까지 쓰고 깨달았다. 어쩌면 <만찬>에 대한 나의 반사적 호감은 한국영화에서 호감 가는 인간형, 마주 앉아 대화하고 싶은 인물을 좀더 많이 보고 싶다는 해묵은 허기의 결과일 수도 있다. 웬일인지 국적 불문하고 대중영화의 스크린에서 악덕은 널리 보급되고 미덕은 영웅의 전유물로 기우는 추세인 것 같다. 혁명을 일으키고 지구를 구할 메가톤급 미덕이 아니면 있으나마나 한 것으로 반내림된다. 평범한 사람의 미미한 미덕. 이 세상을 간신히 궤도 위에서 돌아가게 하는 아직 마모되지 않은 조그만 톱니바퀴들. 관객으로 영화관에 다니는 시간이 쌓일수록 나는 그런 것들을 영화에서 점점 더 보고 싶어진다. 위악적인 인물과 삶을 방기한 인물 군상이 현실적 캐릭터의 부분집합일 수 있지만, 등호는 성립하지 않는다. 넓게 보면 세상과 개인은 경향적으로 더불어 망가지고 흥성하지만 둘의 속도가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 시간차를 세심히 형상화하는 작업도 영화가 해볼 만한 가치 있는 일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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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 학자금 대출을 상환하고 임신한 연인과 가정을 꾸려야 하는 <만찬>의 막내 인호(전광진)는, 대리운전을 하다 오만한 손님을 만난다(김동현 감독은 좀처럼 말을 섞을 일이 드문 사회구성원들을 만나게 하는 장치로 대리운전과 택시를 즐겨 이용한다). 손님은 서른에도 대리운전하고 있는 인생은 벌써 글렀다는, 충고를 가장한 막말을 한다. 자존심을 다친 인호는 분노의 여운 탓에, 곧이어 벌어진 우발적 갈등 상황을 맞아 찰나 동안 망설이게 되고 이 몇초가 예기치 못한 비극으로 비화된다. 나락이, 눈 깜짝할 사이에 발밑에 닥친다.

방금 묘사한 시퀀스는 인호와 비슷하게 한국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의 생활 세계가 얼마나 위태로운가를 절감케 했다. 아기를 임신했다는 소식에 기뻐하면 “왜 그렇게 태평해?”라는 반문이 걱정스레 돌아오는 사회를 누구도 안전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위험사회’라는 단어부터 떠올랐다. 울리히 벡은 1980년대에 쓴 <위험사회>에서, 생태적 위기와 환경 재앙 탓에 궁극적으로 현대사회는 위험이 국경이나 계급의 울타리를 불문하는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는 요지를 논파했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만찬>의 한국 사회는 위험이 철저히 계급과 지위에 따라 분배되는 곳이다. 동일한 위험 앞에서 비숙련 노동자가 고용안정성이 약하다거나 저임금 노동자가 신체적으로 더 위험하고 비위생적인 작업에 노출된다는 사실이야 비단 특정 사회만의 일은 아니다. <만찬>이 새삼 환기시키는 또 다른 중대한 사실은, 돈 없고 무례한 대접받기가 일상다반사인 사회 구성원들은 위법의 유혹과 아슬아슬한 정당방위를 발동해야 할 분쟁에 더욱 빈번히 노출되기에 확률적으로 더 불운하다는 점이다. 반면 돈과 힘을 가진 사람들은 동일한 실수와 위기, 위험을 처리하는 더 많은 퇴로와 방책을 ‘살’ 수 있다. 얄궂게도 인호의 실수와 불운을 목격한 지점부터 나는 <만찬>의 주인공들이 아주 일상적인 행동을 하는 장면에서도 마음을 조이게 됐다. 화면에 식칼이 나오면 실수로 누군가의 손이라도 잘릴까 두려웠고 아버지의 산행 장면에서는 낙상 사고나 등산객과의 시비라도 벌어질까봐 바늘방석이었다. 급기야 법을 집행하는 경찰도, 반대로 불한당도 모두 위협적으로 보였다. 그리고는 곧 나의 발작적 불안이 슬퍼졌다. 가족의 가장 유서 깊은 쓰임새는 무엇보다 “안전하다”는 감정의 원천일 것이다. <만찬>은 천년 전과 똑같이 여전히 가족을 통해 안전과 평온을 간절히 구하는 인간을, 지금 여기서 그 일이 얼마나 지난해졌는지 예시하는 이야기 속에서 보여주기 때문에 지우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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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캔디 깡통

문학 수업에서 배운 첫사랑을 경험하기 위해 아델은 더듬더듬 나아간다. 또래 소녀들이 그러하듯 교실에서, 학생식당에서 시선이 얽힌 귀여운 소년을 파트너로 첫 탐색을 시도한다. 하지만 이건 아닌데 싶다. 나무랄 데 없이 상냥하고 멋진 소년을 거절한 소녀는, 죄책감에 몸이 떨리고 미지의 무엇을 얻자고 손에 잡히는 온기를 포기한 제 만용이 끔찍한 실수가 아닐까 무서워 훌쩍인다. 내 허기의 대상을 알지 못하는 사춘기의 공복감. 압델라티프 케시시 감독은 여자아이도 아니면서 직방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안다. 어차피 처방도 없는 증세라면 오직 ‘단 거’가 우릴 구원한다. 아델의 침대 밑 ‘구급상자’에는 사탕과 초콜릿이 그득하다. 어미젖을 겨우 붙든 새끼처럼 소녀는 초콜릿 바를 우적인다. 아델은 곧 다른 위로를 찾아야 할 것이다. 바야흐로 어린 짐승이 어른이 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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