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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호의 오! 마돈나] 배우가 ‘작가’라는 말을 들을 때

지나 롤랜즈 Gena Rowlands

<글로리아>

지나 롤랜즈는 ‘작가 배우’이다. 작가 배우란 ‘작가 감독’을 의식해서 존 카사베츠가 고안한 개념이다. 자기 스타일이 분명한, 혹은 예술적 입장이 뚜렷한 감독이 있듯, 그런 배우도 있다는 것이다. 예술적 영예가 감독에게만 너무 치우친 경향에 대해 시대의 반항아로서 카사베츠가 비틀기를 한 셈인데, 본심은 배우에게도 예술가의 월계관을 씌워주려는 데 있었다. 여기에는 아마 연극배우였던 자신의 경력도 이유가 됐을 터다. 그는 허구의 매끈한 연기보다 현실 속에 살아 있는 인물이 ‘되는’ 연기자들을 작가라고 봤다. 그렇지만 메소드 연기자와도 좀 달랐다. 그는 배우에게 메소드에 즉흥까지 요구했다. ‘작가 배우’라는 카사베츠의 주관적이고 모호한 개념을 스크린 위에 펼쳐 보인 배우가 바로 그의 아내이자 평생의 동료였던 지나 롤랜즈이다.

배우들의 배우

롤랜즈를 ‘배우들의 배우’로 각인시킨 작품이 <영향 아래 있는 여자>(1974)이다. 카사베츠의 영화는 대개가 자기 삶에 포로가 된 인물들의 탈출에 대한 욕망을 다루고 있는데, 이 작품의 내용도 그렇다. 주인공들은 똑같은 일상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실패가 예정돼 있다는 데서 존 업다이크의 ‘토끼’들과 비교되기도 한다. 업다이크의 소설 속 인물들이 주로 중산층 백인들이라면, 카사베츠의 인물들은 이주민의 후손 같은 주변인들인 게 다른 점이다.

<영향 아래 있는 여자>에서 롤랜즈는 이탈리아계 후손인 공사판 노동자 닉 롱게티(피터 <글로리아> 포크)의 아내 메이블로 나온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사랑하고, 세 아이들과 행복한 가정을 꾸린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의 조울증이 너무 심해 가족은 물론 주위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도입부에서 롤랜즈는 기다리던 남편이 특근 때문에 집에 오지 않자, 홧김에 시내로 나가 술집에서 다른 남자를 유혹한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지만 이미 눈동자는 초점을 잃었고, 상의는 멀쩡하게 입었는데 구두는 신지 않아 맨발이다. 누가 봐도 그녀는 ‘미친 사람’ 같다. 그녀의 광기에 가까운 불안은 그만큼이나 흔들리는 카메라의 움직임을 통해 숨 막히는 긴장을 몰고 오는데, 이런 팽팽한 분위기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풀어지지 않는다. 카사베츠 영화의 매력이 이런 것이고, 그 중심에는 지나 롤랜즈의 진짜 같은 연기가 있다.

카사베츠 영화 특유의 즉흥연기가 장점을 발휘하는 것인데, 실제로 그는 배우들에게 어떤 연기적 지침도 전달하지 않고, 카메라 앞에서 배우의 연기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곤 했다. 말하자면 배우들은 그 순간만은 자발적이고 즉흥적인 인물을 연기해야 했다. 곧 메소드에 즉흥을 더할 수 있는 배우, 카사베츠의 입장에 따르면 그런 배우는 ‘작가’이다.

카사베츠는 <영향 아래 있는 여자>를 3막 연극처럼 꾸몄고, 세 부분 모두에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명장면을 넣어놓았다. 1막에선 롤랜즈와 남편 친구들(주로 이탈리아 이주민과 흑인들)과의 식사 장면이 있다. 롤랜즈는 남자들과 함께 스파게티를 먹는데, 여전히 불안한 눈동자를 하고 남자들을 이리저리 쳐다본다. 그러곤 하필이면 흑인 남자를 지목한 뒤, ‘난 저런 얼굴이 좋아’라며, 삼가야 할 말을 예사로 한다. 남자들은 즐거움을 위장하기 위해 <돌아오라 소렌토> 같은 이탈리아 민요까지 부르지만, 이 식사의 분위기는 언제든 깨질 수 있다는 것을 롤랜즈의 불안한 눈빛이 한눈에 알게 한다.

이 순간은 허구라기보다는 어느 노동자 집안의 불안한 점심식사를 그대로 관찰하는 현실이나 마찬가지이다. 앙드레 바쟁이 <자전거 도둑>(1948)의 리얼리즘 미덕을 찬양하며 했던 말, “시나리오도 없고, 연기도 없고, 결국 영화가 없다”는 경우는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영화가 곧 현실이라는 과찬의 수사인데, <영향 아래 있는 여자>로 지나 롤랜즈는 70년대 미국의 대표적인 메소드 연기자로 입지를 굳혔다. ‘배우들의 배우’라는 별칭이 이때부터 나왔다.

그리고 2막에서 정신병원 입원 문제를 놓고 시어머니(카사베츠의 진짜 모친이 연기한다)와 말다툼을 벌이는 시퀀스, 종결부에서 갑자기 죽은 백조를 연기한다며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에 맞춰 황당한 춤을 추는 시퀀스는 지금도 롤랜즈 연기의 정점으로 찬양받고 있다.

카사베츠-롤랜즈-가자라의 인연

지나 롤랜즈와 존 카사베츠는 뉴욕에 있는 명문 연기학교인 드라마예술 아카데미(American Academy of Dramatic Arts) 동문이다. 이들은 1954년 결혼하여 카사베츠가 죽을 때인 1989년까지 함께 살았다. 말하자면 롤랜즈는 카사베츠의 배우자이자 평생의 미학적 동지로 지냈다. ‘카사베츠 사단’에서 만난 배우들과도 동지적 관계를 맺으며 서로의 경력을 빛냈는데, <영향 아래 있는 여자>에선 ‘형사 콜롬보’로 유명했던 피터 포크와 공연했고, 곧이어 역시 걸작 평가를 받는 <오프닝 나이트>(1977)에서는 남편만큼이나 가까웠던 벤 가자라와 공연한다. 벤 가자라는 카사베츠와 형제 같은 우정을 나눴는데, 그래서인지 세 사람은 마치 가족처럼 보일 정도로 가까웠다. 무슨 우연인지, 카사베츠와 가자라의 기일이 같다. 카사베츠는 1989년 2월3일, 가자라는 2012년 2월3일 죽었다.

<오프닝 나이트>는 자기반영성의 테마를 다룰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작품이다. 여기서 롤랜즈는 연극계의 스타로, 카사베츠는 남자배우로, 그리고 가자라는 연출가로 나온다. 카사베츠와 가자라의 역할만 바꾸면 실제 그들의 삶을 그대로 무대에 올린 셈이다. 특히 주목되는 게 롤랜즈의 역할이다. 중년의 배우는 10대 때부터 무대에 섰고, 지금은 스타가 됐지만 여전히 그런 정체성이 어색하고 불편하다. 업다이크의 인물들처럼 기회만 된다면 자신의 운명에서 내리고 싶고, 다른 운명을 살고 싶은 것이다. 불가능한 삶에 대한 간절함이 롤랜즈의 몸동작에 그대로 새겨져 있음은 물론이다. 그 순간만은 롤랜즈가 실제로 그런 갈등으로 고통받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롤랜즈는 다른 감독들과는 별 성과를 내지 못했다. 아마 미학적 동지를 못 만난 게 큰 이유일 터다. 예외가 있다면 우디 앨런이 감독한 <또 다른 여인>(Another Woman, 1988)을 들 수 있다. 이 영화의 제목은 <오프닝 나이트>에서 극중에 공연되던 연극 제목 <두 번째 여인>(Second Woman)에서 따왔다. ‘배우들의 배우’ 롤랜즈에게 헌정한 영화라고 봐도 될 정도로 그녀의 내밀한 갈등이 허구의 스토리로 쓰였다. 허구가 사실처럼 실감난 데는 롤랜즈의 진짜 같은 연기 덕이 컸다. 이번에도 그녀는 연기라기보다는 허구의 현실 속에 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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