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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ituary] ‘어머니’가 떠났다

2월17일 작고한 배우 황정순

한국영화 속 영원한 어머니, 황정순이 2013년 2월17일 작고했다. 1925년 8월20일(음)생이니 향년 88. 1940년 15살의 어린 나이에 동양극장 전속 극단인 청춘좌에 입단하여 연기생활을 시작했고, 1941년 허영 감독의 <그대와 나>로 데뷔한 이후 1989년 <잡초들의 봄>까지 출연했으니 영화 연기로만 거의 50년의 세월이다. 출연작은 400편에 가깝다(영상자료원 KMDb 기준). 그러나 황정순이 한국 영화사에서 가지는 영향력은 수치로 표현되는 단순한 이력보다 훨씬 깊고도 넓다.

올해 초 한국영상자료원은 한국영화 100선(동률작 포함 101편)을 발표했다. 주연 및 비중 높은 조연으로 참여한 배우를 다작순으로 꼽을 때 김진규(13편), 안성기(12편), 신성일(11편)순인데, 황정순은 11편으로 여자배우 중에서 가장 많은 편수를 기록했다. 최은희, 김지미, 엄앵란, 1960~70년대 트로이카 등 기라성 같은 여배우들을 제치고 황정순이 1위에 올랐다는 사실은 다소 의외로 느껴진다. 그녀는 물론 ‘원톱’이나 ‘투톱’급의 배우는 아니었다. 굳이 구분하자면 대표적인 조연배우였지만 적어도 100선 리스트를 기준으로 할 때 조연보다는 공동 주연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그것은 1970년대까지 가족영화가 많았고, 이 경우 가족 구성원이 골고루 주연을 맡았기 때문이다. 물론 출연한 대부분의 영화에서 그녀는 거의 대체 불가능한 어머니의 역할을 맡았다.

그녀가 가진 토속적이고 인자한 이미지는 우리가 상상하는 전통적인 어머니의 모습에 어울렸을 뿐 아니라, 나아가 그러한 어머니상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실제로 그녀가 연기한 어머니가 온전히 인자한 것만은 아니었다. 때로 이기적이고, 속좁으며, 자식과 이웃에게 악다구니를 쓰고, 가족에게 상처받는 평범한 어머니, 심지어 악처였다. 그녀가 쇳소리가 섞인 약간의 저음으로 잔소리를 해대기 시작하면 엄처가 따로 없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딸을 화류계에 보내려 남편과 딸을 다그치는 야박한 계모(<혈맥>), 세무공무원들을 구박하고 ‘혁명도 별수 없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남편 상사의 부인에게는 뇌물을 바치는 수완 좋은 생활형 어머니(<삼등과장>), 정력을 강화하기 위해 요가와 각종 비법에 몰두하는 성을 밝히는 부인(<말띠 신부>)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맡은 어머니(혹은 부인)상은 다양하다.

그러나 어떤 영화들에서 그녀는 이 보통의 어머니가 가족 구성원, 나아가 역사적 비극과 스스로의 죽음까지도 감싸안는 마법과 같은 순간을 선사한다. 끊임없이 닥치는 가족의 비극적 운명에 좌절한 그녀가 신성한 느티나무에 온갖 원망을 퍼붓고 돌아서다, 더한 비극이 닥칠까 겁내며 급히 신령께 용서를 비는 그 절절하게 비굴한 장면(<김약국의 딸들>), 자신의 아들이 남한군으로 참전하여 죽게 되자 아들이 빨치산으로 들어간 사돈과 갈등하다, 빨치산 아들이 죽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돈을 대신해 구렁이에게 치성을 드리고 천도를 기원하는 감동적인 화해의 장면(<장마>), 고향이 수몰되어 장성한 아들딸이 있는 서울로 올라와 온갖 마음고생에도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다 맞이하는 그 평범하고도 비범한 죽음의 순간(<장남>)….

이들은 단순히 황정순의 연기 이력에서만이 아니라, 한국 영화사를 통틀어 가장 빛나는 장면들이기도 하다. 그녀가 등장하는 순간 영화의 격이 달라진다. 모성 신화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다가도, 이런 황정순의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어쩔 수 없이 무장이 해제되고 코끝이 시큰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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