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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죽은 귀족들의 사회
김혜리 2014-03-20

※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웨스 앤더슨 감독의 첫 호텔 영화는 아니다. <다즐링 주식회사> 의 프롤로그로 공개된 13분 길이의 소품 <호텔 슈발리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코디네이션을 고집하는 앤더슨의 영화로서는 드물게 벌거벗은 감정을 담은 작품이기도 하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과거의 사연을 가진 남녀(제이슨 슈워츠먼, 내털리 포트먼)가 한 호텔에서 계획되지 않은 재회를 한다. 그리고 미처 묻지 못한 것들을 묻는다.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둘 중 한 사람이 이 호텔에서 잊기 힘든 대사를 남겼다. “난 절대 당신의 친구는 되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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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좀 막 다뤄주세요.”

내가 만약 고(故) 다이애나 왕자비라면, 그녀 특유의 눈치 보듯 상대를 올려다보는 사슴 같은 눈망울로 영화 <다이애나>의 올리버 히르비겔 감독에게 청원했을 것 같다. 이 영화의 치명적 한계는 고인을 지나치게 정중히 예우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결과는 구식 연속극처럼 평이하기 짝이 없는 멜로드라마다. 다이애나가 생전에 남긴 <BBC> 인터뷰나 뉴스 영상이 차라리 더 영화적이고 여운이 풍부하다. “심장도 부서질까요? 사람이 그래서 죽을 수도 있을까요?”와 같은 대사를 영화에서 듣다니 얼마 만의 일인가. 극중에서 연인과 다투고 귀가한 다이애나는 곧장 그랜드피아노로 달려가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하며 슬픔을 해소한다. 실제로 죽은 왕자비가 상심을 달래는 방법이 그러했다고 해도 영화는 재고해야 했다. 혹은 덜 생뚱맞은 맥락을 잡아 연출해야 했다. 다이애나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인간이었는지 이야기하려는, 오직 호의로만 똘똘 뭉친 영화가 대상을 드라이플라워같이 납작하게 눌린 생기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렸으니 아이러니다. 예의바른 히르비겔 감독은 다이애나 왕자비뿐 아니라 관련된 어떤 인물의 비위도 거스르지 않으려고 한다. 다이애나와 그녀의 연인을 제외한 영화 속의 모든 인물은 다이애나가 지나갈 때 주목하고 수군거리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그녀의 인생에 중대한 변수였던 전남편과 시집 식구들, 아들들의 이야기를 부자연스럽게 회피한다. 생의 마지막 날 저녁 호텔을 나서는 다이애나의 뒤를 줄곧 따라다니다가 그녀가 복도 끝에 이르는 순간 경호원에게 제지라도 당한 양 뒤로 쑥 빠져버리는 도입부의 카메라는, 영화 전체에 대한 꽤 정확한 예고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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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테넌바움>(2001) 이후 웨스 앤더슨의 영화를 ‘인형의 집’에 빗대는 일은 다반사가 됐지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좀더 센 표현을 요구한다. 이 영화는 차이니즈 박스(큰 상자 안에 그보다 조금 작은 상자가 층층이 들어 있는 세트)에 포장된 러시아 인형(큰 인형 안에 그보다 조금 작은 인형이 차례로 들어 있는 세트)을 방불케 한다. 먼저 상자를 살펴보자. 현대 동유럽 도시의 공원묘지에서 한 소녀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라는 책을 펴면, 1985년의 저자(톰 윌킨슨)가 셀프 인터뷰로 과거를 회고하기 시작하고, 1968년으로 영화가 다시 플래시백하면 젊은 날의 저자(주드 로)가 그랜드 부다페스트의 벨보이 출신 소유주 무스타파(F. 머레이 에이브러햄)를 호텔에서 만난다. 영화의 본론은 무스타파가 저자에게 들려주는 회고 속으로 한번 더 진입해야 나오는데 1932년 수습 벨보이로 취직한 소년 제로(토니 레볼로리)가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인 궁극의 호텔리어 구스타브(레이프 파인즈)를 만나 겪은 모험담이다. ‘상자 속 상자’라는 표현이 은유 이상인 까닭은, 웨스 앤더슨 감독이 여러 층을 이룬 플래시백의 각 단계에 맞춰 스크린의 화면비율까지 2.35:1, 1.85:1, 1.37:1로 갈아타기 때문이다. 즉 시간 프레임이 화면 프레임으로 직역된 형상이다. 겹겹의 상자(들) 안에 든 인물과 오브제 역시 러시아 인형처럼 계열화돼 있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웨스 앤더슨 감독이 그러하듯 단일한 비전과 엄격한 취향으로 호텔을 꾸미고 운영하는 지배인 구스타브의 그랜드 부다페스트와 등가물이며, 극중 제로의 애인 애거사(시얼샤 로난)가 유서 깊은 빵집에서 만드는 정교한 페스트리 케이크에서 우리는 다시 호텔의 축소판을 발견할 수 있다. 지배인 구스타브에게 호텔은 생업을 넘어 자아의 확장이고, 웨스 앤더슨에게는 영화가 그렇다. 둘은 무시무시한 규율로 탐미적 세계관을 전투적으로 방어하는 쾌락주의자다. <로얄 테넌바움>부터 인구밀도가 높아지기 시작한 웨스 앤더슨의 세상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이르러 감당 못할 숫자의 인물로 북적인다. 주요 인물을 빼고도 마티외 아말릭, 밥 발라반, 레아 세이두 같은 굵직한 배우들이 컵케이크의 아이싱마냥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다(혹시 운집한 배우들을 소화하기 위해 다중 액자구조를 채택했나 싶은 실없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하지만 이들은 앙상블 연출의 대가 로버트 알트먼 감독(<MASH> <내쉬빌> <숏 컷> <고스포드 파크>)의 영화를 채운 예측 불가한 인물들과 달리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움직이고 말한다(연기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반대로 앤더슨의 영화는 아주 능청맞고 세련된 배우만이 소화할 수 있다). 살아 있는 배우로 스톱모션애니메이션을 찍는다고 해도 좋다(실제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액션 신에는 미니어처 애니메이션이 포함돼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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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자아내는 비평적 의구심의 한 자락을 단순히 요약하자면 “역사를 ‘인형극’으로 만들어도 괜찮은 걸까?”일 것이다. 앤더슨은 당연히 괜찮다고 선포한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웨스 앤더슨 영화로서는 예외적으로 2차대전의 야만과 나치즘이라는 역사적 사태를 다루지만 역사는 어디까지나 ‘인형극’이 요구하는 갈등의 형상으로 변형된 다음에야 영화 안으로 입장할 수 있다. 호텔의 지리적 배경인 주브로브카는 가상국가이고 1932년으로 적시된 연도는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군사행동을 감행하기 6년 전이다. 웨스 앤더슨은 일부러 딱 한뼘 비껴감으로써 현실의 연표에 영화의 영토를 열어주지 않겠노라 선언한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속 세계 대전의 전선(戰線)은 ‘민주주의 vs. 파시즘’이 아니라 ‘아름다움 vs. 야만’이다. 구스타브와 웨스 앤더슨 감독에게 정의의 근거는 미학이다. 돈만 아는 가족 대신 친구 구스타브에게 유산을 물려준 마담 D(틸다 스윈튼)의 행위가 대변하듯,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가치는 혈연이나 법이 아니라 개인의 감식안을 통해 선택한 대상이다. 그래서 구스타브는 본인이 후계자로 ‘입양’한 고아 제로를 나치로부터 보호하고자 하고, 마담 D가 남긴 그림을 예술적으로 무지한 무리로부터 훔쳐서라도 가지려 한다. 인간적 정이나 그림의 값어치는 부차적 동기다. 정치적 신념이 아니라 오랜 친구와 약속한 바는 지켜야 한다는 구세계에 속한 품위 있는 인간의 존재 미학이 구스타브의 이데올로기다. 영화 속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무도한 파시즘 세력이 잠시 승리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만 웨스 앤더슨 감독은 하찮은 풍문처럼 내레이션으로 전할 뿐 그 사태를 프레임 안에 들여놓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다. 요컨대 판타스틱하게 우아한 미스터 앤더슨이 세상과 싸우는 방식은 경멸이다. 혹은 무시다. 그는 적수가 정치건 역사건 무조건 홈그라운드로 끌어들여 승부를 보는 유형의 예술가다. 이 점에서 앤더슨씨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장고: 분노의 추적자>를 만든, 하나도 안 우아한 타란티노씨와 동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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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파크랜드>의 목격자들

비극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목격했으나 막지 못한 사람들은, 가해자나 공모자가 아닌데도 죄책감을 나눠갖곤 한다. 1963년 11월 케네디 대통령 암살 직후 의료진, 경호원, 시민 등이 경험한 사흘을 재현한 <더 파크랜드>의 착안점이다. 영화의 관찰 중 제일 흥미로운 대목은, 보는 행위가 불러일으키는 “나도 연루됐다”라는 감각, 즉 폭력을 목도함으로써 폭력에 동참하고 있다는 죄책감이다. 대통령의 퍼레이드를 구경갔다가 JFK의 머리를 흉탄이 날려버리는 순간을 우연히 8mm 카메라에 담은 남자 에이브러햄 자프루더(폴 지아마티)는 FBI 수사관에게 문제의 1초만은 대중에게 공개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한다. 이 살인의 영상이 자신을 ‘공범’으로 만든다는 직감 탓이다. “그분은 좋은 사람이었잖습니까?” 자프루더는 대통령이 사냥감처럼 저격되는 장면을 이미지로 남긴 자신이 훌륭한 인간을 모독했다고 느낀다. JFK 암살은 공적인 영역을 넘어 시민 자프루더의 여생에 개인적 비극으로 따라붙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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