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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무)자막의 무게
김혜리 2014-04-24

* 3월21일 일기에 <론 서바이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사방이 레드 라이트다.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온리 갓 포기브스>에 없는 것은 동기와 캐릭터이고 넘치는 것은 운명과 조명이다.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감독에게 특별히 헌정된 영화답게 <온리 갓 포기브스>에는 조도로프스키의 컬트 <성스러운 피>의 그녀 못지않은 ‘지옥에서 온 엄마’(크리스틴 스콧 토머스)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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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과 실화에 기대지 않은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소수파로 밀려나고, 예고편은 물론 예고편의 예고편, 예고편의 속편이 시간차 배포되는 시대에, 신작 영화를 아무 정보 없이 보러 가는 일은 점점 드물어진다. 경험이 축적되면서 ‘나쁜 전조(前兆)’의 목록도 나름 생긴다. 촬영 과정의 잡음, 밑천을 몽땅 노출하는 트레일러, 뷔페식 장르 명명(예컨대 ‘휴먼액션멜로 대서사극’), 언론 시사가 없거나 늦다는 소식 등등을 접하게 되면 영화 기자들은 <스타워즈> 속 한 솔로의 대사를 속으로 복창하게 된다. “이거 느낌이 좋지 않은걸.”

<노아>의 경우 선입견의 요인은 소재와 포스터였다. 샌들 신은 러셀 크로의 모습은 불가피하게 <글래디에이터>의 잔상과 포개졌고, 성서에 기초한 스펙터클이라는 대전제는 과거 세실 B. 드밀 감독의 종교서사극이 펼쳤던 물량공세를 현대판 CGI로 확대 계승한 기획일 거라는 속단으로 이어졌다. 대런 애로노프스키라는 만만치 않은 감독의 이름부터 고려하기에는 1억달러를 상회하는 제작비 규모가 너무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막상 뚜껑, 아니 수문이 열리자 나는 제대로 물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노아>의 예기치 못한 위력은 기발한 상상력보다 구약과 코란의 행간을 인간적인 실제 상황으로 독해한 데에서 나온다. “선택받은 선인이 신의 명을 잘 받들어 정화된 세계에서 새 역사를 열었다”라는 우리 머릿속 ‘노아의 방주’ 설화는 사필귀정의 깔끔한 교훈담이다. 비밀도 의심도 없는. 그러나 대런 애로노프스키 감독은 메타포의 포근한 담요를 걷어버린다. 그는 노아가 더 많은 사람을 수용할 공간이 있는데도 문을 닫아걸었음을, 방주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살려달라는 처절한 아우성이 잦아들 때까지 외면했음을 상기시킨다. 실제로 노아의 가족들이 배 안에서 대화하는 장면에는 물이 덮친 바깥세상으로부터 들려오는 비명의 음향이 희미하게 울린다. 또한 애로노프스키는 노아가 죄지은 적 없는 갓난아기들을 구한 게 아니라 동물을 구했다는 ‘불편한’ 사실을 명백히 한다. 이른바 의인이었던 노아였으니 제 식구라고 해서 다른 인간들과 달리 살아남아 마땅한 미덕을 가졌다는 아전인수를 하기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니 <창세기>에 적힌 대로 어찌 그가 취하지 않고 견딜 수 있었겠는가. 어찌 미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나아가 대런 애로노프스키 감독은 노아가 받은 계시를 불분명한 이미지로 표현함으로써, 그가 정말 광인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 신과 직접 교통한다고 믿는 인간은 무서운 일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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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종장에 이르러 자기혐오와 무력감에 사로잡힌 노아를 바라보며 라디오헤드의 <Creep>이 배경에 흘러도 그리 어색하지 않겠다고 엉뚱한 상상을 했다. <노아>를 본 많은 관객이 ‘괴작’이라는 단어부터 떠올린다. 영혼과 신앙의 문제를 다룬 영화치고 포지션이 특이해서일 거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신과 인간의 관계를 소재로 택한 영화들은 웅장하거나 헐벗거나 둘 중 하나였다. 세실 B. 드밀의 서사극이나 <벤허>가 전자에 해당하고 로베르 브레송의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라든가 칼 드레이어의 <잔 다르크의 유혹>, 마틴 스코시즈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같은 영화가 후자다. 전자의 영화들은 주로 투명한 진리로서 자기를 선포하고 기념하는 신앙을 그리는 반면, 후자는 신과 독대한 개인의 윤리적 나침반으로 작동하는 신앙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노아>는 느닷없이 두 계보를 섞어버린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판타스틱한 CGI로 한껏 성장(盛裝)을 하고, 가난한 영혼의 회의(懷疑)를 시작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맥락에 입각하면 <노아>는 벌거벗은 고통스런 육체의 비주얼을 빌려, 모든 회의와 질문을 숭고한 엑스터시로 덮어버렸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대척점에 있는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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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 뉴스 화면의 충격, 리얼리티 쇼의 유행, 3D와 디지털 영상 테크놀로지의 비약. 이 모든 사태는 스크린으로 흘러들어 촉각적 체험을 21세기 액션영화의 지배적 특성이자 경쟁적 목표로 만들어놓았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해병대원의 수기에 기초한 영화 <론 서바이버>도 전쟁의 아픔을 생생히 전한다. 비유가 아니라 이 영화는 교전 중 군인들이 입는 부상의 통증을 관객에게 감염시키는 데에 대단한 기량을 발휘한다. ‘감염’이라는 표현이 적합한 까닭은 이 과정이 관객에게 유추나 상상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론 서바이버>를 보는 동안 정교하게 재현, 편집된 사운드와 촬영에 힘입어 염좌, 타박상, 뇌진탕, 열상, 골절, 총상이 인체에 주는 조금씩 질이 다른 통증을 간접 체험하게 된다. 씁쓸하게도 <론 서바이버>의 고통은 인간의 질기고 강한 생명력에 의해 배가된다. 영화 속 해병대원들은 수십 군데의 총상을 입고도 의식을 잃는 자비를 얻지 못한다. 깨지 않는 백주의 악몽처럼. 전투를 재현하는 영화의 기술은 이제 하도 정밀해진 나머지, “전쟁은 참담하다”는 아주 단순한 반사적인 생각도 할 겨를이 없다.

<론 서바이버>를 보면서 손거스러미처럼 신경이 쓰인 한 가지는 자막이다. 번역 문제가 아니다. 이 영화는 아프가니스탄 주민과 탈레반의 대사에 대부분 자막을 달지 않았다. 철저히 미군의 시점에 입각한 이야기이므로, 주인공들이 말이 통하지 않는 대상 앞에서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그대로 전하려고 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그러나 어차피 제3자의 입장에서 영어 대사도 자막으로 접수하는 비영어권 관객으로서는 어쨌거나 인위적으로 동일시를 강제당하는 상황이긴 하다). 진짜 문제는 <론 서바이버>의 자막 배제 방침이 오락가락한다는 점이다. 영화 후반 적의 무리에 쫓기는 개인은 무조건 보호한다는 고귀한 전통을 가진 파쉬툰 부족 사람이 미군 생존자를 거둬 보호한다. 추격해온 탈레반이 파쉬툰 주민과 대치하는 장면에서 영화는 줄곧 생략했던 영어 자막을 갑자기 제공한다. “그는 내 손님이다. 우리 마을에서 나가라.” “미국놈을 위해 죽겠다고? 너희들 다 죽여주지.” 이것이 영화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아프가니스탄인들의 대화다. 즉, 제작진이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관객이 알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유일한 아프가니스탄 언어 대사다. 이런 편의주의적인 대접이 있나! 기분이 상한 나는 알아들을 수 없기에 그저 음흉하고 위험하게만 들렸던, 앞서 나온 아프가니스탄 인물들의 모든 대사 내용이 격하게 궁금해졌다. 동시에 톰 행크스가 알아듣건 말건 소말리아 해적의 대사를 자막으로 옮긴 <캡틴 필립스>와 이 영화가 가진 좌표의 차이를, 옳고 그름을 떠나 두 영화가 이야기로서 추구하는 목표의 차이를 좀더 선명히 가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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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빙 MR.뱅크스> 중 아버지의 치욕

<세이빙 MR.뱅크스>는 알고 보면 부녀 관계의 애증을 그린 멜로드라마다. 영화는 작가 P. L. 트래버스가 <메리 포핀스>를 디즈니의 손에 맡겨 각색하는 과정이, 어린 날 지극히 사랑했던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가 준 상처를 객관화하고 극복하는 경험이었다고 해석한다. 12세 관람가인 만큼 중독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진 않지만 <세이빙 MR. 뱅크스>에는 그로 인한 소녀의 불안을 깊이 공감케 하는 대목들이 있다. 만취한 아버지(콜린 파렐)가 마을 축제 연단에 올라 횡설수설하며 구경거리가 되는 장면이 하나다. 소녀는 무너지는 아빠를 간절히 돕고 싶지만 굳어버린다. 부모가 나약함을 드러내고 남들 앞에서 스스로를 욕보이는 모습이 유년의 정신에 얼마나 막대한 공포인지 보여주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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