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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웅의 일상어 사전] 늙으면 죽어야지
권혁웅(시인) 2014-04-25

[ 늘그면 주거야지 ]

겉뜻 노인들이 탄로(歎老)의 정서를 담아 토해내는 한탄 속뜻 열렬히 누군가를 사랑하겠다는 의지의 표현

주석 이 말을 온전한 문장으로 쓰면 이렇다. “만일 내가 늙는다면, 나는 죽겠다.” 전반부는 가정법이니 실은 자신이 아직 늙지 않았다는 말이고 후반부는 그때가 되면 자기 의지로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말이다. 그러니 저 말을 하는 이는 자신이 노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버스나 지하철에서도 한사코 경로석을 찾아가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죽겠다는 건 무슨 뜻일까? 생물이 죽지 않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방법은 무성생식으로 번식하는 방법이다. 아메바나 짚신벌레처럼 몸이 둘로 나뉘어서 번식하는 생물(이분법), 히드라나 말미잘처럼 몸의 일부가 혹처럼 떨어져 나와서 새로운 개체가 되는 생물(출아법), 고사리나 이끼처럼 몸의 일부에서 만들어진 포자가 떨어진 뒤 거기서 싹이 트는 생물(포자법) 등이 이 방법을 쓴다. 자기 유전자와 똑같은 개체를 만들어 번식하는 방식이므로 자손이 자기 자신인 셈이다.

이런 생물은 불멸이다. 내가 나를 낳고, 주니어 내가 3세 나를 낳고… 이렇게 세세만년 이어진다. 그러니 죽지 않겠다는 것은 고작 아메바나 짚신벌레, 말미잘이나 고사리 같은 삶을 살겠다는 뜻이다. “늙으면 죽어야지”에 담긴 첫 번째 뜻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유성생식을 하겠다. 골방에 웅크려 자기 몸이나 어루만지는 짓은 하지 않겠다. 그래서 노인대학에서도 젊은이들이 다니는 대학에서만큼이나 로맨스가 끊이질 않는 것이다.

죽지 않는 두 번째 방법은 몸이 죽음을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 몸의 세포는 자기 역할을 다하면 스스로 죽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이를 아토포시스라 하는데, 이런 예정된 자살을 거부하는 세포가 있다. 바로 암세포다. 쓸모없는 세포가 영생을 탐해서 무한히 증식할 때 암이 된다. 헨리에타 랙스의 충격적인 실화는 이 불멸의 정체를 폭로하는 이야기다. 그녀는 1951년 자궁암으로 죽었으나, 그녀의 암세포는 채취되어 실험실에서 배양되었다. 그녀의 성과 이름에서 두 글자씩 따서 헬라(Hela)라고 이름 지어진 이 암세포는 무게 5천만t에 이르는 괴물로 성장해서 전세계에 퍼졌다. 헬라는 원자폭탄이 터질 때에도 거기 있었으며 인류 최초의 우주선에도 타고 있었다.

이 정신 나간 돌연변이가 무한히 증식해서 정상세포들의 자리를 차지하면 몸이 부서져 죽음에 이르게 된다. 불멸이란 생명을 갉아먹는 것이다. 따라서 “늙으면 죽어야지”에 담긴 두 번째 뜻은 이런 것이다. 나는 사랑하는 당신에게 암적인 존재가 되지는 않겠다. 나는 당신을 위해 이타적으로 살겠다. 곧 나는 죽어서 당신의 일부로서의, 내 역할에 충실하겠다.

용례 영화 <죽어도 좋아!>가 말하는 죽음이 바로 이런 죽음이다. “좋아 죽겠네”란 표현에 담긴 역설을 바로 실천하기. 이 영화를 둘러싼 소동이란, 좋아서 죽을 수 없는 어린것들의 질투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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