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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사의 아수라장] 갈팡질팡하는 인간들
김곡(영화감독) 2014-05-02

아수라란 무엇인가

<월드워Z>

<괴물>

아수라 백작? 아니다. 아수라는 그렇게 양념 반 프라이드 반으로 깔끔하게 떨어지는 혼돈이 아니다. 아수라는 더 어지럽고 난잡한 것이다. 아수라는 고대 인도 신화에 나오는 선신이었는데, 어쩌다가 불교로 흡수되면서 원하지 않는 악역을 맡은 신이라고 한다. 제석천이랑 싸워서 재앙과 기근을 경품으로 타갔단 얘기도 있고, 아수라들이 죽어서 쌓인 전쟁터가 혼돈에 빠지자 그걸 경품으로 착각하고 일부러 져주었다는 얘기도 있고. 믿거나 말거나. 어쨌든 본의 아니게 불교에 위장취업하게 된 아수라는, 섭섭함을 숨기지 못하게 깽판을 치게 되었으니, 그게 바로 아수라다.

그래. 난장판 혹은 깽판이란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주의할 것. 더 어지럽히고, 더 어질러놓는다고 해서 아수라장이 되진 않는다. 특히 요즘같이 삶 자체가 아수라장인 시기엔 웬만한 아수라장으로는 전두엽에 기별도 안 간다. 살면서 깽판을 하도 보니 이젠 영화 속에서 어설프게 연출된 깽판 장면을 보게 되면 감독과 제작진의 고충을 거꾸로 이해하고 심지어 동정이 갈 때도 있다(아수라 연출을 방해하는 쪽으로 계속 진화 중인 영화제작 시스템도 범인 중 하나일 텐데, 이는 오늘의 주제와 거리가 먼 관계로 패스). 아수라도(度)를 측정할 때 또 하나 주의해야 할 것은, 아수라의 정도는 규모와 스케일에 정비례해서 꼭 증가하지만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피를 많이 뿌린다고 해서 슬래셔 무비가 더 잔혹해지지 않는다. 귀신이 많이 나온다고 해서 귀신영화가 더 무서워지는 건 아니다. 실제로 슬래셔의 거장들은 칼질을 얼마나 많이 할까가 아니라 칼질을 얼마나 더 적게 할까, 그 대신 칼을 어느 구석에 들이밀까를 고민한다. 괴물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좀비 장르야말로 아수라가 규모의 경제학에 지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분야다. <월드워Z>는 이제까지 나온 좀비물 중 가장 대규모의 ‘좀비 떼샷’을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좀비물 중에 가장 아수라도가 높은 건 아니다(오히려 이 영화는 가장 얌전한 좀비물에 속할 것이다). 재난영화는 또 어떤가. 무너지는 빌딩이 더 높다고 해서, 침몰하는 배가 더 크다고 해서 아수라도가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희생자 수가 늘어난다고 해서, 파괴되는 물품의 배상액이 늘어난다고 해서, 아수라도가 정비례해 늘지는 않는다. 재난은 작은 집에서도, 골방 안에서도 일어나고, 사실 두세 사람만 있어도 가능하다(심지어 ‘나홀로 재난’을 그리는 모놀로그 재난영화도 요즘 꽤 등장하고 있는 것 같고).

결국 아수라는 혼돈과는 또 다른 거다. 혼돈에 빠졌다고 해서 다 아수라장은 아니다. 오히려 혼돈은 편안할 때가 있지 않은가. 잘 때 틀어놓는 데스메탈을 생각해보라. 하도 두들겨대니깐 둔감한 잠귀에는 일정한 패턴으로 들리고, 어느새 데스메탈의 빽빽한 드럼비트는 달콤한 자장가가 되지 않는가. 아니면 말고. 반대로 혼돈은 오히려 정직할 때가 많다. 예컨대 모든 혼돈의 근원인 괴물은 비록 혼돈을 연기하고는 있지만 꽤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거나 임무수행에 충실할 때가 많다. 슬래셔 살인마의 미션은 살인이고, 귀신의 미션은 복수이고, 좀비의 미션은 전염이다. 이 얼마나 정직하고 명징한 목적의식인가. 재난영화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무너지는 빌딩과 침몰하는 선박보다 정직한 것은 없다. 그들은 정확히 중력의 법칙을 준수하고 있고, 물과 쇠를 지배하는 자연법칙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그렘린>

<28주 후>

정직한 괴수, 좀비, 재난과 다른 인간

반대로 아수라를 이루는 것은, 그 혼돈을 대하는 인간들이다. 정직하게 달려드는 좀비와 괴수 앞에서, 정직하게 기어오는 귀신 앞에서, 정직하게 무너지는 빌딩 속에서, 우왕좌왕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들이다. 인간들은 자기가 먼저 살겠다고 약속이나 법규를 스스로 위반하거나, 아니면 서로를 불신하거나 심지어 속이고 배신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혼돈, 진정한 아수라를 만들어낸다. 살아야 하는 목적 자체(인간성)를 버리면서 살아보겠다는 발버둥 자체가 아수라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밑도 끝도 없는 반칙과, 종잡을 수 없는 변칙과, 치사하기 짝이 없지만 그렇다고 예측도 안 되고 예방도 안 되는 견제와,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눈치코치 신경전이 있고, 그로 인해- 아수라 신화에서 일찍이 묘사했던 것처럼- 존재의 한복판에 즐비하게 쌓여가는 인간성의 시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자연법칙을 따르는 빌딩이나, 도덕법칙을 따르는 처녀귀신, 그리고 배꼽시계를 준수하는 좀비들은 얼마나 정직한가! 결국 아수라란 무엇인가. 나는 감히 아수라는 갈팡질팡, 우왕좌왕, 동분서주, 주무주주(住無住住)라고 말하고 싶다. 인간이 괴수와 재난보다 월등히 아수라도가 높은 이유는, 그는 인간성과 야수성, 아군과 적, 신성과 폭력, 청결과 불결 사이에서 동분서주하고 갈팡질팡하고 우왕좌왕하기 때문이다. 괴물보다는 그에 의해 우왕좌왕하는 인간이 더 아수라다.

적이 보이지 않을 때 아수라장이 심해진다는 것이 이 가설의 주요한 증거가 아닐까. 존 카펜터의 <괴물>에서, 괴물(바이러스)이 누군가의 몸속에 숨어서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또 서로를 테스트한다. 피 한 방울 안 튀기고 눈동자만 또르르 굴렸는데도 최고의 아수라장이다. 그래서 아수라장은 내분이고, 내전이다. 괴물과 재난이 인간과 집단의 안쪽으로 숨어들고, 그래서 점점 불빛이 가닿지 않는 등잔 밑으로 숨어버리는 백스테이지로 숨어들 때 아수라도는 더 증가하기 때문이다. 그러게. 아수라가 그렇게 깽판을 칠 수 있었던 것도 불교 신화에 위장취업한 덕이 아닌가.

얼추 정리가 된다면, 아수라 랭킹이라도 매겨볼까? 일단 좀비물에서 <월드워Z>는 대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아수라 하위권을 면치 못한다. <월드워Z>엔 적과 동지, 괴물과 인간, 가족과 외부인을 분간할 수 없어서 갈팡질팡하는 내분이 없기 때문이다(브래드 피트는 단지 멋질 뿐! 단지 곱게 늙었을 뿐!). 내가 본 좀비물 중에서 가장 아수라장이었던 건 <28주 후>의 한 장면이다. 도망치는 인간들과 쫓아가는 좀비들이 뒤섞이는 바람에 누가 누구인지 분간이 안 되자 “다 죽여라”라는 발포 명령이 내려지는 장면 말이다. 하지만 좀비 배꼽시계의 정직함이 아무래도 감점요인이다. 괴물이 나아갈 수 있는 최고의 아수라 경지에 오른 캐릭터를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그렘린>(감독 조 단테)을 뽑겠다. 그렘린은 괴물 주제에 결코 정직하지 않다. 그는 놀고 장난치는 것 이외엔 다른 명확한 목적도 없다. 춤추고 까불고 가끔은 폼잡거나, 그러다가도 백설공주에 열광하는 그들은 귀엽다가도 사악하고, 사랑스럽다가도 끔찍할 뿐이다(이 사랑과 혐오가 뒤섞인 기괴감이야말로 조 단테의 주특기일 것이다). 재난영화 중에 최고의 아수라도를 꼽으라면- 이 영화를 재난영화에 끼워줄지는 모르겠지만- <크림슨 타이드>(감독 토니 스콧)를 꼽으리라. 이 영화에선 재난의 실체조차 없기 때문에 나는 감히 재난영화의 최고봉이라고 말하고 싶다. 대신 이 영화는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은 재난을 두고 지휘권을 서로 쟁취하거나 박탈하는 두 분파의 내분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실체 없는 갈팡질팡, 원인 없는 우왕좌왕, 근거 없는 주무주주, 타깃 없는 내전을 다룬다는 점에서, 진정한 아수라장 영화다.

p.s. 물론 최근 본 가장 처참한 아수라 영화는 현실에 있다. 세월호의 참사 앞에서도 기득권 과시와 서민 코스프레 사이를 동분서주하는 일부 정치인과 공직자, 그리고 이 비극마저 이용해보려는 몇몇 허언증자들과 자뻑주의자들, 그들이야말로 아수라다. 실종자들의 무사귀환을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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