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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웅의 일상어 사전] 나 잡아 봐라
권혁웅(시인) 2014-05-02

[ 나 자바 바ː라 ]

겉뜻 연인 사이에서 사랑의 술래잡기를 시작할 때 하는 제안 속뜻 당신은 결코 나를 잡을 수 없을 것이라는 선언

주석 해변이거나 눈밭과 같은 탁 트인 곳에 이르면 여자가 남자를 치고 달아나며 말한다. 자기야, 나 잡아 봐라. 이상한 일이다. 여자가 슬로모션으로 달려도 남자는 여자를 따라잡을 수 없다. 여자가 느리게 달리면 남자의 속도도 똑같이 느려지는 것이다. 꿈속에서 하염없이 달려도 제자리인 체험, 해보셨는지? 남자는 글자 그대로 꿈을 꾸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에 담긴 역설이기도 하다. 둘 사이 거리가 10m라고 하자. 남자가 10m를 전진할 때 여자는 1m를 가고, 남자가 그 1m를 따라잡으면 여자는 10cm를 더 간다. 하염없이 가까워지지만 결코 추월할 수 없는 거리가 둘 사이에는 있다. 간혹 남자가 여자를 얼싸안고 모래밭이나 눈밭을 뒹구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이 장면의 본질이 아니다. 그다음 풀밭이나 운동장이 나오면 여자는 다시 남자의 뒤통수를 치며 말한다. 자기야, 나 잡아 봐라. 아까 잡은 건 가짜라는 듯이. 그건 정말로 꿈이었다는 듯이. 난 여전히 네 앞에서 달아나고 있다는 듯이.

이 장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빛의 속성을 알아야 한다. 빛은 정지해 있지 않으며, 늘 광속, 즉 299,792.458km/s의 속도로 움직인다. 상대성이론은 이 속도가 불변한다고 말한다. 속도란 일정한 시간 동안 일정한 공간을 이동한 값이다. 따라서 광속이 불변한다는 것은 이 속도를 지키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이 가변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빛의 속도에 가까워질수록 우리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가서, 마침내 빛의 속도에 도달하는 순간 시간은 정지한다. 그러나 그 속에 든 우리에게 시간은 동일한 것으로 체험된다. 따라서 빛은 우리 눈앞에서 원래의 제 속도로 달아난다. 공간에 대해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우리가 빛의 속도에 가까워지면 우리의 길이가 축소되며, 따라서 빛은 유유히 저 앞에서 달아난다.

여자가 나 잡아 봐라, 하고 외친다고 해서, 남자가 아무 여자나 추격하는 것은 아니다. 여자가 빛일 때에만, 그러니까 빛의 속도로 달아날 때에만 남자는 슬로모션으로 그녀를 따르기 시작한다. 아, 그에게 그녀는 너무 눈부신 것이다. 빛은 처음부터 광속으로 달리고 있으므로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이 말은 빛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이를 먹지 않았다는 뜻이다. 빛은 생후 0살이다. 내 앞에서 빛나는 그녀가 바로 그렇다. 그녀는 생생한 현재다.

하지만 그녀가 태양의 그 빛이 아니라면, 그에게 월면(月面)과 같은 낯빛으로 지각된다면, 지금까지 말한 모든 상황은 취소된다. 그때에는 진정한 추격전이 시작된다. 너, 걸리기만 해봐. 죽었어.

용례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이 바로 ‘나 잡아 봐라’ 이야기다. 여성 관객에게는 이 영화의 주인공인 매력적인 사기꾼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환한 빛이겠지만, 그를 추격하는 FBI 요원 칼(톰 행크스)에게 그는 ‘잡히기만 해봐. 죽었어’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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