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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문득, 나의 슬픈 아코디언

<짱> <스쿨 오브 락> <코러스> 등에 등장하는 음악 교사

<스쿨 오브 락>

나는 아코디언을 켤 줄 안다. 이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짠한 눈으로 나를 보며 밥값을 내주곤 한다. 피아노나 바이올린과는 다르게 아코디언이라고 하면 저녁 끼니를 걱정하며 동전 그릇 놓고 연주하는 거리의 악사가 떠오르나 보다(그래서 내가 바이올린도 했다는 건 굳이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코디언을 배우게 된 이유가 내 숱한 불행의 씨앗 중 하나이기는 하다. 가난 때문이 아니라 그걸 가르친 음악 선생 때문이었는데… 그걸 밝히기 전에 먼저 음악 선생이란 어떤 존재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음악을 가르치려면 뻔뻔해야 하는 건가. 오래전 <>을 보며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랐던 나는 진짜 선생님처럼 생긴 선생님들만 가득했던 시골 초등학교에서 홀로 베토벤처럼 헝클어진 머리에 지휘자 스타일의 검은 정장만 입고 다녔던 나의 음악 선생, 정확하게 말하면 밴드부 지도교사를 떠올렸다. 초등학교였으니 음대가 아니라 교대 나왔을 텐데, 카라얀 행세를 했었지.

당시 한창 인기 많았던 차인표가 이번엔 색소폰 대신 트럼펫을 들고 나왔던 <>은 한반의 모든 학생이 문제아인데 그 문제아들 모두가 음악에 재능이 있어서 하루아침에 밴드부를 결성하는 기묘한 학교가 배경이다. 그 학교에 새로 부임한 교사 차인표는 문제아들과 만나자마자 1990년대 초반에 유행했던(참고로 <>은 1998년 영화) 춤을 추고 문득 한밤중에 트럼펫을 분다(버릇됐나). 그것도 낮술 한잔하지 않은 맨 정신으로. 차인표가 지금 자기 영화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들까 싶다.

물론 밴드부를 지도한다고 하여 모두가 차인표처럼 채신없는 행동만 일삼아야 하는 건 아니다. 똑같이 음악 교사가 주인공인 <홀랜드 오퍼스>를 보라. 평생 막춤과는 인연 한번 맺지 않고 근엄하게 살아도 제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있다. 그러니까 이상한 노력은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선생님… 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러기엔 마음에 걸리는 영화가 한편 있으니, 선생님으로서도 이상하지만 그냥 사람이라고 쳐도 이상한 잭 블랙이 나오는 <스쿨 오브 락>이다.

어찌나 실력이 없는지 자기가 만든 밴드에서 쫓겨난 듀이(잭 블랙)는 집세가 없어 보조 교사인 친구의 신분을 도용해 학비가 1만5천달러에 달하는 사립 초등학교에 임시직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기묘한 학급이 등장하니, 반 아이들 과반이 음악에 재능이 있는데, 그중 두어명은 천재다. 어쨌든 듀이는 이 꼬마들을 데리고 밴드 경연에 나가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록의 기술보다 먼저 ‘록 스피릿’을 가르치고자(가르칠 기술이 별로 없기도 하지만) 아이들 마음속의 분노를 터뜨리게 한다.

<짱>

그렇다, 부잣집 꼬맹이들에게도 울분은 있다. 그런 데다 너그럽기까지 하다. 예전에 없이 자란 어느 선배는 “부잣집 애들이 성격도 좋다”라고 우기며 부잣집 막내딸과 결혼하겠다는 허황된 꿈을 꾸곤 했는데, 선생은커녕 두집 건너 동네 아저씨라고 쳐도 꺼림칙할 잭 블랙을 받아들이는 걸 보면 부잣집 애들이 성격이 좋긴 하다.

엄청나게 없는 아이들만 모인 <코러스>의 기숙학교를 보면 더욱 그렇다. 이 아이들은 한마디로, 난폭하다. 장난도 범죄 수준으로 승화하는 이 아이들을 합창으로 대동단결시키려면 보살에 버금가는 인내심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합창부 활동을 방해하는 교장을 무시할 담대함도. <코러스>의 음악 선생 마티유는 그런 미덕을 가지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나의 음악 선생 또한 그처럼 인내심이 풍부하고 담대한 인간이었다.

그럼 이쯤에서 심각한 이야기를 하나 해볼까. 나는 초등학교 6학년 초반, 두어달에 걸쳐 밴드부 지도교사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그 일이 심각한 트라우마를 남겨 남자의 손끝이 닿기만 해도 몸이 움츠러들며 연애도 결혼도 하지 못하고 홀로 고목처럼 늙어가는 노처녀가 되었는가 하면, 그건 아니다(아, 노처녀는 맞구나). 사실 아무렇지도 않아서 나는 남자를 매우 좋아하는 정상적인 성인 여성으로 자라났다. 아코, 씩씩하기도 하지. 심지어 이런 생각도 해봤다. 그 남자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아방궁이 따로 없었겠다. 밴드부는 전교에서 발육이 가장 좋은 여학생들만 모아놓은 곳이었으니 말이다.

<코러스>

나는 그 아이들 중에서도 가장 성숙한 편이었다(그 키가 아직도 그대로다, 흑). 수업이 끝나고 교실로 불려가 구석구석 더듬더듬과 키스를 당하곤 했던 내가 그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건 절대 비밀로 해야 한다던 그 남자의 부탁과 협박 때문이 아니었다. 그 남자는 무섭지 않았다. 그 일을 말하고 나면 내가 겪을 일들이 무섭고, 귀찮았다. 엄마가 학교로 쳐들어오고 여기저기 불려다니고 아이들이 수군거리고… 생각만 해도 심란해서 대충 견디다 보니 신기하게도 아빠의 전근 때문에 전학을 가게 됐다. 그제야 나는 잊지 못할 일을 겪었다.

전학 하루 전날, 동네 목욕탕에서 나보다 키가 크고 가슴도 컸던 밴드부 동급생을 만났다. 그 애는 말했다. “요새 배추(음악 선생)가 맨날 수업 끝나고 불러.”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서자니 귀찮고, 입을 닫자니 쉬운 일이었으니까. 어차피 지금부터는 내 일 아니니까. 하지만 결국 쉽지 않은 일이었다.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나처럼 무신경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를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궁금하고 걱정되고, 최고로 무섭다.

그것이 내 침묵의 대가였다. 침묵한다고 끝나는 일은 없다. 내버려둔다고 하여 묻히는 것도 없다. 지금 침묵하면 죄책감만이, 아주 오래,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문제아들은 왜 노래를 잘할까

음악 교사를 기쁘게 하는 것들

청출어람 1998년, 장혁은 ‘진짜 사나이’가 아니라 반항의 아이콘으로 성장할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그로부터 1년 뒤, 나는 대학생인 주제에 장혁이 나오는 드라마 <학교>를 보느라 월요일 저녁마다 술을 마시다 말고 집으로 뛰어들어가곤 했다. (월요일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됐을 텐데.) 그랬던 장혁은 <>에서 좋아하는 여자애를 데려다놓고 뜬금없이 색소폰을 연주한다. <사랑을 그대 품 안에>에서 차인표가 그랬던 것보다 500배쯤 뜬금없다. 프로 깡패와 주먹질하느라 바쁜 고등학생이 색소폰은 언제 배웠을까. 과연 청출어람이다. 이제 그만 하산해도 되겠다.

주인공 음악 교사도 사람일진대 이왕이면 배경보다는 무대 중심에 서고 싶을 것이다. 그것도 시험 쳐서가 아니라 사기 쳐서 교사가 된 인간이라면 말할 필요가 없겠지. <스쿨 오브 락>의 듀이는 엄청나게 노래를 잘하는 꼬마들을 몽땅 코러스로 세우고 자기가 리드 보컬을 맡는데… 욕하고 싶지만 사실 욕할 수가 없다. 반올림해서 나이 마흔이 되니 꼬마들 농락하는, 무능하여 미래가 없는 뮤지션에게 마구 동화가 되는 것이다. 미안하다, 하는 것 없이 나이만 먹었다! 경로사상 배운다, 생각하고 잠깐만 참으렴, 똑똑한 음악 천재 부잣집 아가들아.

문제아 초등학교 3학년 시절, 담임은 합창부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반 아이들까지 부려먹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우리 반 여자아이들만으로 합창부를 꾸리기로 마음 먹고 오디션을 봤는데, 나는 1.5:1의 얄팍한 경쟁률을 뚫지 못하고 탈락했다. 굳이 뚫고 싶었던 것도 아니지만 왠지 마음에 상처가 되어 나는 지금까지도 오디션 지정곡 <도라지꽃>의 가사를 잊을 수가 없다. “언니는 보랏빛 저고리 나는 다홍치마~~~ 나들이옷 갈아입고 외할머니 댁에 갈~~ 때에” 봐, 다 기억하잖아. 창피해서 등교 거부하는 문제아가 될 뻔했다. 그런데 진짜 문제아들은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노래도 연주도 잘하는 걸까. 그게 확률적으로 말이 되는가. <시스터 액트2> <> <코러스>…. 문제아들이 노래만 불렀다 하면 천상의 하모니가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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