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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웅의 일상어 사전] 라면 먹을래요?
권혁웅(시인) 2014-05-09

[ 라면: 머글래요 ]

겉뜻 간단한 요기나 하자는 제안 속뜻 자고 가라는 제안

주석 바래다준 남자에게 여자가 묻는다. “라면, 먹을래요?” 소파에 나란히 앉아 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여자가 다시 묻는다. “재밌는 얘기 좀 해봐요.” “라면에 소주 먹으면 맛있는데. 나 재밌는 얘기 몰라요. 원래 썰렁해요.” 그러자 여자가 대답한다. “재밌다.” 그러고는 라면을 끓이러 주방 앞으로 가서는 남자에게 자고 가라는 엉뚱한 제안을 한다.

늦은 밤이니 ‘차 한잔 하고 가요’ 대신에 요기나 하자고 제안했을 테고, 간단한 식사로 라면만 한 게 없었을 테고, 물이 끓는 짧은 시간의 어색함을 감추려고 재밌는 얘기를 해보라고 했을 테지. 그런데 거기 담긴 얘기가 제법이다. 재밌는 얘기를 하라고 했더니 남자는 소주를 먹자고 한다. 이것은 카드 게임과도 같다. 여자가 라면으로 베팅했더니 남자가 라면 받고 소주 더, 하고 판을 키운다. 재미없죠? 이번에는 여자가 받는다. 콜(=재밌어요). 그러더니 최후의 베팅을 한다. “자고 갈래요?” 어색했는지, 여자는 생라면을 우걱우걱 먹는다.

그런데 왜 하필 라면일까? 첫째로 이것은 당연히 빠른 진도와 관련이 있다. 라면은 물을 끓이고 익혀서 내오는 데 5분밖에 안 걸리는 인스턴트 식품이다. 인스턴트(instant)에는 ‘즉석요리용’이라는 뜻과 함께 ‘긴급한, 절박한’(urgent) 혹은 ‘즉시의, 즉각의’(immediate)란 뜻이 있다. 둘은 지금 긴급하고 절박한 것이다. 여자가 생라면을 먹는 것도 그 때문이다. 3분이라고? 그걸 언제 기다려? 그냥 먹을래.

둘째로 이것은 그 생김새와도 관련이 있다. 라면의 면발은 꼬불꼬불하다. 면발을 튀길 때 더 많은 기름을 흡수하기 위해서 이기도 하고, 끓일 때 겉과 속이 익는 시간에 차이를 두어 쫄깃쫄깃하게 씹히는 맛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조그마한 봉지에 수십 미터나 되는 면발을 넣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라면은 조그만 직사각형 속에 끊어지지 않는 면발이 파마한 여자 머리칼처럼 촘촘히 들어 있다. 어떤가? 넓은 직사각형 속에 연결된 스프링들이 파마한 여자 거인족 머리칼처럼 촘촘히 들어있는 침대가 연상되지 않는가? 라면은 처음부터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수면과학, 라면은 가구가 아닙니다… 와 같은 말로 수식될 물건이었던 것이다. 저 촘촘한 스프링들이 어깨를 겯고 떠받치는 편안함이 이 집에, 당신과 나 사이에 있을 것이라는 전언이었던 것.

용례 이 모든 게 영화 <봄날은 간다>의 한 장면에 들어 있다. 안타깝게도 이 영화는 상우(유지태)가 은수(이영애)에게 건네는 안타까운 질문,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로 더 유명하다. 내가 보기에, 둘 사이에서 봄날이 간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은수가 끓인 라면의 상표를 잘 보라. ‘사나이 울리는…’ 바로 그 신라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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