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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말을 던지다
2002-02-27

심재명/ 명필름 대표 myungfilm@com

2월3일 일요일

3월에 개봉할 영화사운드 본 믹싱 마지막 날

일주일 가까이 진행된 사운드 믹싱에 마침표를 찍는 날이기도 하다. 1권부터 5권까지, 총 95분의 영상과 소리를 보며 복잡한 심경이 되다.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작업이 모두 끝나고, 그러나 감독은 여전히 이것저것 아쉬운 표정이다. 그때까지 저녁을 못 먹은 우리는 양수리 근처의 포장마차에 들러 국수 한 그릇씩 비우다. 어둠에 싸인 양수리의 팔당대교를 달리는 차 안, 새벽 2시. 오늘 이렇게 한편의 영화를 일단락했다. 그런데 왜 마음이 텅텅 빈 듯하지.

2월4일 월요일

아침부터 회사 이사회의. 회사 운영이 어떻고, 올해 라인업이 어떻고, 팀장 체계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 등등 긴 대화가 오가다. 바로 이어서, 또다른 영화 마케팅 회의. 포스터 시안이 맘에 들지 않는데, 요렇게 조렇게 좀 고쳐보시지 하며 ‘영화의 내용과 주제’를 정확하게, 확실하게, 폼나게 전달해야 한다고 주절거리고 있는 나. 맞는 얘기 하고 있는 거야, 지금? 내가 스무살 감성을 뭘 얼마만큼 안다고?

점심 먹고 바로 4월에 크랭크인할 영화, 제작점검 회의. 예산, 일정, 미술 부서 이하 준비상황 검토. 오전엔 스무살 감성을 이야기하다가, 지금은 100년 전 이야기. 타임머신이 필요해.

2월6일 수요일

<씨네21> 인터뷰 끝나자마자 새로 들어갈 영화의상 점검회의 자리에 끼어들다. 20여명이 넘는 캐릭터들의 의상 스케치들을 훑어보며, 호! 배우 S씨, K씨가 저 옷을 입을 걸 머리 속으로 상상하며 잠시 가슴이 뛰다.

영화 일은, 고되지만 ‘즐거운’ 비즈니스임에 틀림없어. 재능과 의욕이 번뜩이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정말 미치게 기쁘거든. 그 사람들의 에너지란 구슬을 꿰는 일이 만만치 않은 일이지만, 빛나는 그 구슬을 발견했을 땐 정말 설레거든.

회의 끝나자마자 모 매니지먼트 대표와 미팅. 구슬의 기쁨 어쩌고는 일순간 날아가고, 접선을 시도하는 연기자의 스케줄 때문에 도저히 캐스팅 제의에 응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대답으로 순간 실망. 또다른 사람을 찾아야겠다.

2월8일 금요일

아침 10시부터 3월에 개봉할 영화 TV 및 기타 광고용 동영상물 편집. 연휴 직전의 교통 지옥을 뚫고 양수리로 기어가 사운드 믹싱. 밤 11시가 되어서야 겨우 끝나고, 다시 편집실로. 새벽 2시에 다시 사무실행. 마케팅실 식구들은 그때까지 회의중. 입사 당시엔 통통했던 볼의 신입사원 M양의 안색이 피로로 가득하다. M양 부모님은 날 얼마나 원망할까.

2월13일 수요일

연휴의 마지막 날. 설날 제사상 차리기와 설거지로 금세 거칠어진 손이 어쩌고 하며 엄살을 떨다가, 한두 사람만 나와 있는 사무실로 출근. 새로 제작하기로 한 영화의 감독과 미팅. 시나리오 모니터와 간단한 의견 제시가 오가다.

휴일이라 같이 따라나온 아이는 내 방 저편에서 신나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데 나는 섹스 묘사가 어떻고, 중년여성의 심리가 어떻고, 불륜이 어떻고 떠든다.

2월14일 목요일

점심시간을 활용해 세차장으로 달려가다. 대기용 사무실에서 동계올림픽 1500m 쇼트트랙 결승에 출전한 우리 소녀들의 모습을 TV로 보다. 금메달, 은메달을 목에 건 그녀들의 담대한 얼굴을 보며 눈물을 짜다.

제작실장의 호출에 후닥닥 다시 사무실로. 회의, 미팅, 회의. 오후 7시부턴 여성영화인모임 이사회의까지. 회의로 점철된 하루가 어두워지고, 오늘 막 촬영을 끝낸 또다른 영화 쫑파티장으로 직행. 오랜 촬영 일정을 마친 감독 이하 수십명의 스탭들이 건배를 하고, 덕담을 나누고, 노래를 불러젖히니, 어느덧 새벽 3시.

지친 몸으로 귀가. 마루에 양말을 던지며 그대로 납작하게 엎드려 마룻바닥과 입맞추다. 그러고보니 지난 10일간, ‘영화’에 온몸을 던졌네. 양말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