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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sh on] “신경증에 걸린 첩보영화 같은…”
정지혜 2014-05-29

<에너미> 드니 빌뇌브 감독

<그을린 사랑>으로 단숨에 전세계 평단을 사로잡은 캐나다 출신 감독 드니 빌뇌브의 신작 <에너미>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작품이다.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도플갱어>가 원작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하듯, 영화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인간의 잠재의식 속을 헤집고 들어간다. 똑같이 생긴, 그러나 어딘가 많이 다른 역사학 교수 아담과 배우 앤서니가 도플갱어로 만나는 미스터리 심리극이다. “내 작품 중 가장 사적인 영화”라고 감독 스스로가 말할 정도로 <에너미>는 그가 오랫동안 관심을 기울여온 인간의 정체성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과연 인간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그의 궁금증이 만들어낸 ‘에너미’의 실체가 궁금해졌다.

-원작 소설의 어떤 점에 강하게 이끌렸나. =주제 사라마구는 인간의 나약함과 문명의 취약성에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접근하고 풀어가는 작가다. 나는 그의 환상적인 유머 감각과 뛰어난 지성에 감탄한다. 책을 읽자마자 현기증을 느꼈다. 성적 관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잠재의식을 탐험해간다는 설정이 매우 흥미로웠다.

-평소 잠재의식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나. =누구나 자기 안에 다양한 성격과 욕망이 존재한다. 그중에서 사회적 가치관에 맞춰 드러내는 모습은 일부일 테고, 자신도 모르는 숨은 자아가 또 있을 것이다. 아담(제이크 질렌홀)의 경우 마음 깊은 곳에서 성에 대한 강박에 사로잡혀 친밀한 관계나 진정한 사랑에 대한 희망과는 단절된 채 살아간다. 그것이 앤서니(제이크 질렌홀)라는 인물로 표현됐다. 잠재의식의 힘과 그 부작용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누가 결정권을 갖고 있는지, 당신 내면을 지배하는 주인은 누구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영화 제목이 ‘에너미’인 것도 이런 잠재의식과 연결되는 것 같다. =단순히 나와 같은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의 또 다른 자아와 충돌하는 인물을 통해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가장 강력한 적은 어쩌면 자신인지도 모른다. 사라마구는 특유의 잔인한 유머로 이 남자가 또 다른 자신과 경쟁해야 하는 설정을 만들어냈다.

-1인2역을 소화한 제이크 질렌홀은 당신의 할리우드 진출작 <프리즈너스>에도 출연했다. =그는 미묘한 디테일을 표현하는 놀라운 재능을 지닌 배우다. 처음부터 우리는 아담과 앤서니의 차이는 미묘하게 표현돼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내가 신경을 쓴 건 1인2역을 표현하는 기술적 측면이 아니라 제이크가 테크놀로지 영역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느냐 하는 부분이었다. 나는 특별히 디렉션을 주기보다는 즉흥연기를 제안했고, 그는 환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할리우드 시스템을 경험한 소감도 궁금하다. =할리우드는 한해 동안 쓰일 액수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에 걸맞은 감독과 시나리오, 배우가 한번에 필요하다. 하지만 영화화가 되는 과정은 언제나 확실하지 않고 불안정하다. 내가 할리우드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내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혼자 휴 잭맨에게 가서 <프리즈너스>에 참여해 달라고 확신을 심어줘야 했다. 휴 잭맨은 항상 나를 믿어줬고 그 뒤 모든 게 빠르게 진행됐다.

-<에너미>로 다시 돌아와서, 아담과 앤서니가 메리(멜라니 로랑), 헬렌(사라 가돈), 아담의 엄마(이사벨라 로셀리니) 등 여성을 통해서 서로 연결된다는 점이 특이하다. =메리는 아담이 성적으로 억눌렸던 욕망을 분출하는 대상이자 안정적인 삶을 위해선 결국 없어져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앤서니의 임신한 아내인 헬렌은 자아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는 아담이 돌아갈 수 있는 안식처다. 임신으로 인해 배가 나온 그녀의 모습은 영화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사용된 거미와도 닮아 있다. 아담의 엄마 캐롤라인은 아담이 자신의 혼란스러운 상황에 대해 조언을 구하기 위해 찾아간다. 나는 그녀에게서 자아도취적인 면모와 모성애가 동시에 보이길 바랐다.

-말한 대로 <에너미>에는 원작에는 없던 크고 작은 거미가 등장한다. 메갈로폴리스에 나타난 거대한 거미는 루이스 부르주아의 조형물 <마망>을 떠올리게 하는데. =텍스트를 영상으로 옮길 때 굉장히 중요한 걸 잃어버렸다고 느꼈다. 그래서 관객이 원작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압박과 공포를 보다 육체적인 방식으로 느낄 수 있길 바랐다. 거미는 그런 내 생각을 구현하는 데 완벽히 들어맞는 이미지였다. 그러던 중 나의 생각을 가장 잘 표현한 조형물 <마망>을 발견한 거다.

-복합단지나 아파트의 부감숏, 안개에 휩싸인 거대한 도심의 전경을 인서트숏으로 계속 삽입했는데. =도시의 크기에 따라서 오는 긴장감과 편집증, 불안이 있다. 도시는 그 자체로 괴물과 같다. 원작과 영화의 배경이 되는 도시는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한 캐릭터다. 소설 속 도시는 수만명이 사는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메갈로폴리스로 묘사됐다. 그래서 우리는 토론토를 그러한 방식으로 촬영했다. 우리는 아담이 겪는 답답하고 억압적이고 편집증적인 감정을 색감과 구름을 통해 재창조하고 싶었다.

-관객이 이 영화의 어떤 점을 충분히 봐주길 바라나. =감독의 시선에서 바라본 <에너미>는 존재론적 에로틱 스릴러로, 북미의 끝없는 메트로폴리스 너머 자신의 도플갱어를 추적하는 한 남자의 여정이다. 이것이 내가 이 영화를 신경증에 걸린 첩보영화로 보는 이유다. 이 첩보영화가 ‘무기’를 갖고 있다면 그건 아주 강력한 무기다. 바로 아담이 처음으로 앤서니를 만나는 초현실적인 상황이 주는 충격이다. ‘존재’의 문제이기도 하다. 존재론적인 위기, 나 자신과의 대면, 다른 존재로 나타난 나 자신을 과연 견딜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 말이다. 이 만남의 무게를 전달하는 것은 내게 영화적인 모험이었다. 관객이 이 무게를 오롯이 감당해보길 바란다.

-차기작 계획이 있다면 귀띔해달라. =확정된 제목은 아니지만 <시카리오>(Sicario)라는 프로젝트를 맡게 될 것 같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 사이에서 벌어지는 군사작전에 대한 내용이다. 난 이미 이 작품에 푹 빠져버렸고 매우 강력하고 어두운 느낌의 시나리오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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