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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는 어제, 어디 있었나
2001-03-14

LA에서 USC 한국영화제,관객들 근대화의 그늘에 관심

우기를 맞아 연일 비가 내리는 로스앤젤레스 USC(남캘리포니아대학)에서 지난 2월9일부터 18일까지 한국영화의 현재를 돌아보는 영화제가 열렸다. ‘근대화의 그늘: 한국사회의 변화와 뉴 코리안 시네마’라는 주제로 열린 이 행사는 최근 해외영화제나 <춘향뎐>의 상업적 배급망 진출 등 외형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는 한국영화의 현재를 있게 한 뒤안길을 돌아보는 의미있는 행사였다.

우울한 근대, 한국영화는 뭘 했나

‘근대화의 그늘’이 상징하는 바처럼 80∼90년대 영화를 통해 되짚어본 한국사회의 근대화 모습은 대부분 우울한 이미지였다. 채윤정(USC한국학연구소 객원연구원), 곽한주(USC 영화비평 전공 박사과정)씨가 선정한 상영작들은 <바보선언>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우묵배미의 사랑> <서편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칠수와 만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깊고 푸른밤> 등 12편. 영화제를 주관한 이 학교 영화과 데이비드 제임스 교수는 “이 시대의 한국영화들은 한국 국민들이 이뤄낸 사회적 성취에 대해 후한 점수를 주고 있는 것 같지 않다”며 영화에 대한 인상을 이야기했다.

비내리는 주말에 열린 탓인지 영화제 초반에는 영화과 학생들이 관객의 대부분이었으나 <넘버.3> 상영 때 영화의 명성을 익히 들은 듯한 20대 동포관객이 몰려와 송강호의 코믹연기에 열띤 환호를 보내면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상영 마지막날 박광수 감독과의 대화로 이어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상영 때도 일반관객을 포함해 200여명의 관객이 몰렸다.

감독과의 대화를 이끈 제임스 교수는 <…전태일> 상영이 끝난 뒤 눈물을 글썽이며 무대에 올라 관객의 분위기를 이끌었다. 감독과의 대화에서는 “전태일의 분신 뒤 한국의 노동상황이 어떻게 개선됐는가”라는 질문을 비롯, “70∼80년대 정치적 격변기에서 한국의 감독들이 사회주의적인 리얼리즘에 입각한 영화들을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 “한국에서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제도권 영화들은 이들의 인권 문제에 대해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쏟아내 외국의 많은 관객에게 한국은 아직 정치적, 사회적 특수성을 가진 나라로 인식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소재는 소외, 주제는 파괴

영화 상영과 함께 열린 강연회에서는 한국의 근대화 과정이 낳은 소외계층에 대한 분석과 함께 김기영, 홍상수, 이창동 감독에 대한 작품 분석 등이 소개됐다. 크리스 베리(UC 버클리)는 한국인들이 근대화 과정에 매혹됨과 동시에 두려움을 나타내는 양가적인 정서적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면서, 이는 김기영 영화에서 공포와 함께 존재하는 유머와 환상으로 표출되고 있다고 발표했다. 같은 김기영 감독을 주제로 발표한 정은선(USC)씨는 근대화 과정에서 소외된 여성 노동자계층들이 그의 영화 속에서 어둡고도 전복적인 힘을 소유한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표현된다고 주장했다.

이 밖에 D.스콧 디프리언트(UCLA)는 홍상수 감독의 전 작품을 통해 내러티브의 분열을 시도한 점이 입체파 회화의 기본 이론과 상통한다며 그의 작품을 ‘큐비즘 시네마’로 명명했고 유지나(동국대)씨는 영화학자 린다 윌리엄스의 개념을 원용, 70년대 호스티스영화와 이후 에로영화들을 ‘Female Body Genre’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묶어 이 속에 나타난 여성들의 시대적인 변화상에 대해 주목했다. 채윤정씨는 한국사회의 근대화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은 폭력의 일반화이며 이것이 ‘호스티스 무비’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초록물고기> 등에서 전통적인 가족관계의 파괴 등으로 나타난다고 발표했다.

임재철(<필름컬처> 주간)씨는 영화의 소재와 주제에 초점을 맞춘 여타 주제 발표자와는 달리 한국 근대화 과정의 특수성 때문에 한국영화가 자기 반영적인 영화생산으로 연결되지 못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는 한국의 80년대의 정치적인 특수성이 정치적인 리얼리즘을 우선시하는 상황을 낳았고, 이것이 90년대의 대중주의로 연결되면서 한국영화의 형식이 모던화할 기회를 잃었다고 주장했다.

공감대 형성, 시간문제

“한국영화를 보고 싶어도 볼 기회가 너무 없었다”고 입을 모으는 관객과 영화과 학생들이 한국영화에 보여주는 관심들은 아직은 영화 속에서 표출되는 여성들의 낮은 지위, 권위적인 정부와 검열로 상징되는 한국영화의 정치적 배경에 대한 것 등 한국적인 특수상황에 모아졌다. 이는 한국영화가 아직은 세계영화계에 새로운 예술적 가능성을 던져준 나라라기보다는 이제 막 정치적 격변과 근대화 과정을 끝낸 개발도상국의 영화라는 수준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했다. 그러나 이번 영화제에 온 한 관객의 말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했다. “독특한 정치적 배경을 가진 아시아영화들이 서구관객에게 완전한 이해를 받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한국영화도 미국관객에게 자신들의 정치적인 이슈를 내건 내러티브를 이해시키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최근의 아시아영화들이 미국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듯 이것은 시간문제라 생각한다.”

LA=이윤정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