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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전영객잔] 그들의 고통은 제대로 표현되었나

<도희야>의 인물들이 겪는 고통의 부자연스러움에 대하여

불쌍한 아이를 동정하는 마음은 유별난 것이 아니다. 그 아이를 하룻밤 내 집에서 재워주는 것도 쉽다. 이 아이는 선의를 베푸는 어른에게 처음엔 머뭇거리며 몸을 의탁하지만 차츰 매달리려는 기색을 보인다. 이러면 선의로 시작한 어른이라도 누군가와 함께 지낸다는 것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것이 <도희야>의 도입부 설정이다. 나는 그다음이 궁금했지만 예상보다 영화는 뭔가 답답했다. 그 이유를 찾고 싶은 게 이 글을 쓰는 목적이다.

나는 이 영화가 소심하며 어느 쪽으로도 깊게 들어가지 않고 주춤거리는 자세를 취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게 신중한 윤리적 태도로 섬세한 비평적 거리를 유지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앞서 말한 아이가 짐승의 시간을 살았으나 짐승의 내면을 드러낼 기회는 적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게 온당할 것 같다. 이 아이의 이름은 도희(김새론)이며 영화의 주인공이다. 도희는 의붓아버지에게 상습적인 폭행을 당하고 할머니에게도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한다. 도희는 학교 친구들한테서도 일상적으로 린치를 당하는 것 같다. 도희가 사는 외딴 바닷가에 모종의 이유로 좌천당해 파출소장으로 부임한 영남(배두나)은 마을에 도착한 순간부터 그런 도희와 수 차례 조우한다. 불쌍한 길고양이 같은 도희에게 영남이 선의를 베풀어 자기 집에 머물게 해주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하다. 게다가 영남에게는 도희를 찾으러 온 몰상식하고 폭력적인 의붓아버지 용하(송새벽)를 권위 있게 물리칠 수 있는 파출소장으로서의 권력이 있다.

앞서 도희가 짐승의 내면을 드러낼 기회가 적었기 때문에 영화가 심심했다는 것은 이렇게도 바꿔 쓸 수 있다. 도희는 가녀리고 연약한 소녀지만 만성적 폭력을 체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체화된 괴물성을 갖고 있다. 아이는 버림받는 순간의 감정을 이겨내기 위해 스스로 먼저 자기학대를 행하거나 어른의 폭력적 행태를 흉내내곤 한다. 도희의 그런 괴물성을 영남이 목격하는 순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영남이 자신을 찾아온 애인을 만나고 늦게 들어온 날 도희는 집요하게 영남에게 전화를 걸다가 응답이 없자 영남의 집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고 자신의 몸도 엉망으로 학대한다. 영남은 도희의 그런 행동에 당황하면서 엄마처럼 꼭 껴안아주고 도희에게 화나지 않았다는 것을 거듭 확인시켜준다.

도희의 처지는 갈 곳 없는 고양이와 비슷하지만 당연하게도 고양이와 같은 짐승은 아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예기치 않은 순간에 발톱을 드러내고 제어할 수 없는 야성을 표출할 수 있다. 이성의 영역 너머에 있는 그 아이의 무엇이 아이의 괴물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 영화는 도희의 그런 괴물성을 물리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자제하고 영화에 암시적으로만 남겨놓는다. 아이의 의외성은 애정을 갈구하는 공세적인 성격으로만 부각된다. 영화 속 한 장면에서, 영남이 소주를 마시며 목욕을 하고 있을 때 도희는 화장실에 들어와 오줌을 누고 스스럼없이 욕조 안에 들어온다. 영남은 도희의 등에 난 상처를 어루만지며 복잡다단한 심경을 느낀다. 이런 장면이 낯설고 당혹스러운 것은 도희를 엄마의 입장에서만 대할 수 없는 영남의 처지 때문이다. 영남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이 시골 마을에 좌천당했다. 경찰대 엘리트인 영남의 선배를 비롯해 경찰 조직 내에서 영남의 성정체성을 범죄 전과로 취급하는 듯 구는 상황에서 영남의 헤어진 애인은 끈질기게 전화를 걸어온다. 요컨대 다수가 소수에게 가하는 폭력을 경험하는 측면에서 영남의 입장도 도희와 같다.

정주리 감독은 아마 영남의 입장에서 이 영화의 시선을 정하고 있는 것 같다. 영남은 배두나의 존재감과 떨어뜨려놓고서는 생각할 수 없다.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가 주변을 응시할 때 그녀는 공간적으로 거기에 속하지만 거기에 융합될 수 없는 단독자의 기질을 은연중에 나타낸다. 그녀가 주인공이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녀는 대체로 도희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을 관찰하는 입장에 서 있다. 마을의 허름한 미용실 같은 공간에서 거꾸로 영남이 마을 아낙네들에게 관찰당하거나 감시당하는 듯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도 그녀의 존재감은 크게 위축되지 않는다. 영남이 지키고 있는 초월적 거리감은 이를테면 그녀 혼자 바닷가 도로를 조깅할 때 그녀가 숨쉬는 공기를 관객에게도 전달하고 싶어 하는 듯한 카메라의 동조적 입장을 통해 더욱 강화된다. 그녀는 도희와 비슷한 소수자이지만 자기만의 공기가 있다. 파출소에서도 그녀는 늘 책상에 고개를 묻고 뭔가를 쓰고 있는 모습이다. 이건 바닷가에서 혼자 곧잘 춤을 추는 듯이 보이는 도희를 카메라가 잡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다. 도희 역시 이 마을에 속하지 않는 존재이지만 철저하게 배척당하는 존재로서 이 마을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낸다. 카메라가 도희의 클로즈업을 잡을 때 우리가 느끼는 것은 격절된 그녀의 존재감이다. 영남이 표상하는 관찰자로서의 위엄과는 정반대다.

심지어 영남은 자신의 고통을 응시할 때조차도 관찰자처럼 보인다. 영화 초반 그녀가 슈퍼에서 점원의 의심스런 눈길을 받으며 수많은 소주병을 계산대에 올려놓을 때도 그녀의 시선은 배두나의 페르소나에 힘입어 그다지 위축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점원의 눈길을 맞받아쳤던 그녀의 시선은 다시 매맞는 도희의 모습으로 옮겨가고 도희를 구한 뒤 공터에서 소주를 페트병에 옮겨담은 뒤 빈 병들을 처리하는 영남을 도희가 바라보고 있을 때도 영남의 시선은 무심한 듯 담담하다. 영남이 퇴근 뒤 혼자 제복을 입은 채로 식탁에 앉아 소주를 홀짝거리며 마시는 장면은 그녀에게 이상한 초월적 나르시시즘을 부여한다. 그녀는 고통을 드러내 전시하지 않는다. 이 절대적인 무표정은 배우의 페르소나일 수 있지만, 그리고 오묘한 매력을 주지만, 영화의 후반부에 치러지는 인과적 전개에 따른 클라이맥스 부분에 이르러서는 곤경에 부딪친다.

앞서 거론한 부분으로 돌아가보자. 영남이 도희를 집에 들이고 초보적인 형태로나마 도희에게 엄마 역할을 할 때, 통상적인 유사 모녀 관계와는 다른 긴장이 발생하는 것은 그녀가 동성애자이기 때문이다. 영남은 동성애자란 이유로 좌천됐고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졌기 때문에 도희라는 아이가 드러내놓고 스킨십을 원할 때 망설인다. 영남의 애인은 영남을 찾아와 이별을 다시 실감하게 되자 영남을 향해 견딜 수 있을 만큼만 상처를 받는다고 비난한다. 그게 영남의 캐릭터일 것이다. 그렇지만 도희가 영남에게 자신의 의식적인 영역 외에 통제 불가능한 영역의 행위를 보여줄 때 그 묘사의 강도는 왠지 도희의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보다는 초월적인 시선을 지닌 영남의 캐릭터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도희의 행동 묘사가 강제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든다. 이 때문에 영남이 도희를 성추행한 누명을 쓰고 유치장에 갇혔을 때 도희가 영남을 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꾸미는 영리한 계략은 영화가 안전한 결말로 닻을 내리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하는 매끈한 스토리텔링 세공술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성급하게 장르적 장치를 유인한 건 아닌가라는 회의를 갖게 하는 것이다. 이 부자연스러움, 나만이 느꼈을지도 모를 두 캐릭터의 상반된 특징은, 곧 영남의 고통받는 자로서의 자기응시적 나르시시즘과 비이성적 괴물성을 감춘 도희의 이성적 가면은 억압받는 자의 또 다른 표징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에 반해 도희의 의붓아버지 용하의 캐릭터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신이 가해자임을 모를 만큼 정상성이라는 테두리 내에서 안전하게 자기 감정을 휘두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용하는 젊은 노동인구가 없는 마을에 불법 이주민 노동자를 알선한 브로커이며 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노예 노동을 강요하는 사람이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생존을 위해 그의 폭력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건 그가 딸 도희에게 휘두르는 폭력을 훈육의 다른 형태로 이해하는 무지와 몰염치와 통하는 반응이기도 하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건 용하는 자신이 할 수 있을 법한 행동을 하며 이는 그가 우연히 알게 된 영남의 성정체성을 빌미삼아 도희를 보호하고 있는 영남을 성추행범으로 고소하는 행위도 납득이 가게 만든다.

여기서 나는 혼란을 느낀다. 용하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보여주는 자연스러운 행동은 그것이 여하튼 보통 사람들의 범주라는 우리의 보편적인 오해 아래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지는 것일까. 영남이 보여주는 절제된 행동, 심지어 도희의 경우에 본색을 감춘 팜므파탈의 기운마저도 느껴지는 것은 고통받는 소수자의 행동이기 때문에 거부감이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 의심하게 된다. 혹은 이들이 주인공이어서 장르적 해결로까지 여겨지는 클라이맥스를 위해 자기들의 감정을 맨 얼굴로 드러내지 않고도 스토리 라인과 화면 속 공간 안에서 매력적으로 버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들과 대조적으로, 영화 속의 또 다른 소수자들인 불법 이주 노동자들의 경우에 다수는 표정 없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위독한 노모를 보기 위해 고향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절규하는 한 노동자는 서슴없이 짐승의 모습으로 절규하고 있다. 그런 그를 폭력으로 다스리는 용하를 보며 영남이 경찰로서 간섭하고 제지하는 영화 속 한 장면에서 이들의 고통은 왠지 대상화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들의 고통을 깊숙이 다룰 시간은 영화 속에서 허용되지 않기에 그런 것이라 해도 스토리의 전개를 위해 기능적으로 소비된다는 의심을 완전히 피해가기도 어렵다. 이들의 불우한 처지를 법적으로 시정하기 위해 영남이 개입하면서부터 영화는 용하의 고소로 촉발되는 클라이맥스를 예비하기 때문이다.

영화 후반부에 유치장에서 나온 영남이 도희와 재회하고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아주 멀지 않은 결말 장면을 보게 될 때,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도희의 괴물성을 추측하는 상태로 영남이 도희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 아이를 안아주며 그 아이에게 동행을 제의할 때, 이 결말의 윤리적 진정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누군가를 껴안을 수 있게 되기까지 수많은 망설임과 좌절을 겪는 것이 당연지사라면 그전까지 감독이 조금 소심했다는 불만 역시 지울 수 없다. 영남이 도희를 태우고 마을을 떠날 때 그들이 탄 차창 밖으로 비가 내리고 앞면 유리창에는 비가 쳐들어온다. 흐릿해지는 차창을 닦기 바쁜 차 와이퍼가 화면에 보인다. 아마 앞으로 그들이 동행하는 앞날의 인생이 그 흐릿한 차창과 비슷할 것이다. 낡은 자동차의 와이퍼처럼 그들의 심신은 삶에 닥친 장애를 해결하기에 바쁠 것이다. 이 희미한 연대의 앞날에 박수를 치면서도 그들의 맨 얼굴이 드러나는 고통을 더 봤어야 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든다. 인물의 고통과 트라우마에 대한 이 영화의 접근법이 절충적인 게 문제가 아니라 인물의 고통을 묘사하는 응집력과 강도가 소심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주목할 만한 재능으로 인물의 고통을 다룬 이 영화에 상찬이 많았기에 불우한 흥행과는 별개로 다른 부분도 지적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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