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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기사와 공주
김혜리 2014-06-26

레이스 양말에 얌전한 단화를 신은 또래 여자애들 틈에서, 씩씩한 와즈다(와드 모하메드)는 목 높은 컨버스 운동화를 고집한다. ‘올 블랙’만 강요하는 엄한 교사에게 신발의 별무늬를 지적받자 소녀는 집에 돌아와 매직으로 별의 테두리 안쪽을 칠한다. 영화 <와즈다>가 이슬람 사회의 여성 억압에 의문을 던지는 화법도 이 일화처럼, 부드럽지만 꿋꿋하다. 와즈다의 척 테일러스 컨버스화가 왠지 눈에 익어 DVD를 뒤져보았다. 오래전 시드니 루멧 감독의 <허공에의 질주>에서 리버 피닉스도 같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5/30

내가 제이슨 본 시리즈를 유보 없이 좋아하게 된 장면은 2편 <본 슈프리머시> 후반에 있다. 모스크바로 날아가 사선을 넘나드는 격투를 치른 제이슨 본(맷 데이먼)은 부상당한 몸을 끌고 한 가정집에 숨어들어 주인이 귀가하길 기다린다. 그녀는 오래전 제이슨이 비밀요원 생활 중에 암살하고 오명을 씌운 부부의 딸이다. 한때 기억을 상실했던 제이슨에게도 이 악행은 희미한 전생의 꿈과 같다. 그러나 아무리 흐릿해도 그것은 분명 그의 손으로 저지른 일이다. 생면부지의 여자에게 본은 자신이 살인자라고 고해성사를 한다. 그런다고 억울한 망자들이 되살아날 리 없지만 부모의 죽음에 얽힌 추문이 거짓임을 (세상은 모른다고 해도) 확인한 여자는, 적어도 마음의 얼룩 하나를 지우고 살아갈 수 있다. 제이슨은 피해자 앞에 죄인으로 자신을 세우고, 처분을 그녀의 의지에 맡긴다. 이미 일어난 과오는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나야말로 당신이 저주해야 마땅한 대상이라고 밝히고, 그로써 생존자가 앞으로 살아갈 시간을 위해 최소한의 예의를 다한다.

갑자기 10년 전 영화의 장면을 떠올린 계기는 오늘 관람한 <우는 남자>에서 킬러 곤(장동건)의 속죄 방식이 제이슨 본의 그것과 아주 대조적이었기 때문이다. 곤은 본인이 해친 사람들의 유족 모경(김민희) 앞에 출몰하지만 죄인이 아니라 ‘키다리 아저씨’를 자처한다. 법의 심판으로 죗값을 치르거나 피해자의 증오를 감당하는 대신, 그림자처럼 모경의 주변을 얼씬대며 호위하는 비련의 기사가 되려고 한다. 죽음으로 죗값을 치르겠다는 곤을 겁쟁이라 부를 수는 없겠으나, 처벌의 형식을 본인의 연출 아래 두려고 한다는 점에서 그는 이기적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손에 피를 묻힌 여자에게 남는 것은 복수의 후련함이 아니라 끔찍한 악몽일 것이다. 곤의 산화(散華)는 누구를 위한 사과인가? 그가 짠 속죄의 각본은 모경이 자기를 미워할 시간을 제거해버린다. 모경은 원망할 대상도 모르는 비탄으로부터, 곧장 새로운 트라우마로 건너뛰어야 한다. 영화가 끝나고 모경이 살아갈 시간은 끔찍할 터다. <우는 남자>의 곤은, 욕심 사납게도 합당한 증오와 눈물의 카타르시스마저 피해자 여성에게서 빼앗아 독식한다. 전작 <열혈남아>에서 그랬듯 여성은 사건의 전모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남자주인공이 만든 비장한 연극의 객석으로 난데없이 불려가 안타까움과 암묵적 용서의 시선을 제공한다.

6/2

“날개가 어떻게 다시 붙었어?”

<말레피센트>의 어린 관객이 엄마에게 질문하는 소리가 뒷좌석에서 들렸다. 얘야, 그건 네가 안젤리나 졸리님을 아직 잘 몰라서 품는 궁금증이란다, 나는 속으로 대답했다. 요정 날개와 관련된 해부학적 수수께끼를 포함해 <말레피센트>는 서사의 많은 공백을 주연 스타의 개성과 카리스마로 채우는 영화다. 게다가 이 전략은 그럭저럭 성공하기까지 한다. 다시 말해 안젤리나 졸리는 <말레피센트>를 뛰어난 영화로 만들지는 못하지만 무너지지 않도록 떠받친다. 린다 울버스톤이 쓴 <말레피센트>의 시나리오는 요정 나라 무어스의 지도자로 말레피센트가 어떻게 선출됐는지, 말레피센트를 사랑했던 스테판(샬토 코플리)이 왜 배신을 저지르고 그녀에 대한 피해망상에 시달리며 여생을 보내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괄호는 관객이 알아서 채운다. 할리우드의 비공식 여왕 안젤리나 졸리가 주도권을 잡겠다는데 누가 이의를 품겠는가? 안젤리나의 남자라면 열등감이 애정을 압도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실상 이 영화 속 인물들에게 유의미한 타인은 오직 말레피센트뿐인 것처럼 보인다. (나머지 인물들끼리의 관계는 매우 허약하다.) 특히 무려 오로라의 생모이자 스테판 왕의 아내인 왕비는 남편과 딸의 뇌리를 스쳐가지도 않는다. 한데 졸리의 카리스마가 이 허술한 구도를 보아 넘기게 한다. 심지어 영화는 말레피센트 본인의 동기도 ‘그렇다치고’ 넘어간다. 스스로 저주한 아기를 먼발치서 감시하다가 “저러다 애 굶어죽겠다”며 은밀히 보살핌의 손길을 내미는 엄청난 변덕이 안젤리나 졸리라서 관객에게 순순히 받아들여진다. 혈연이 없는 아이들을 끌어안는 품 넓은 어머니로 알려진 졸리에게 우리가 친숙한 덕분이다. <처음 만나는 자유>의 아무도 통제할 수 없는 소녀를 거쳐, <에어컨트롤> <툼 레이더>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의 초현실적 섹스 심벌이었던 졸리는 언젠가부터 1960, 70년대 소피아 로렌이 점유했던 ‘대지의 여신’ 영역으로 넘어갔다. 저간의 이력을 생각하면 자연스런 결과다. 지난 십여년간 스크린의 졸리는 <베오울프> <알렉산더> <체인질링>에서 비관습적인 어머니 캐릭터를 연기했다. 한편 현실에서는 바이섹슈얼리티를 부정하지 않은 채 브래드 피트와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며 부모 역할을 수행했다. 유방 절제 수술을 공표하고, 강간 범죄와 싸우며 유엔 대사(goodwill ambassador)로 활동했다. 안젤리나 졸리는 최고의 배우는 아닐지언정 최고의 스타이며 그 스타성의 핵심이 ‘롤 모델’로서의 가치인 희귀한 사례다.

6/4

제아무리 안젤리나 졸리라고 해도, 여성 캐릭터가 서사를 주도하는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모성을 경유해야 하는 걸까? 이 물음은 21세기 디즈니 동화가 감당할 용의가 있는 변화의 폭과 관계 있을 터다. <겨울왕국>과 <말레피센트>는 디즈니 동화마다 만능열쇠로 등장해온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남녀 이성애자의 그것으로 한정시키지 않고 두 여성의 관계를 서사의 척추이자 감정의 심장으로 삼는 진보된 노선을 공유했다. 일종의 ‘마녀’인 엘사와 말레피센트에게 프로타고니스트의 자리를 배정한 선택도 큰 한 걸음이다. 그러나 한발 떨어져 이야기의 궤적을 보면, 착하고 아름답고 만인에게 사랑받는 오로라 공주와 못되고 아름답고 만인을 압도하는 말레피센트가 자리를 바꾸었을 뿐, 두 동화는 완벽한 여성이 잠깐의 불가피한 일탈을 거쳤다가 다시 정상 궤도로 복귀해 “이후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라는 바른 마침으로 귀결된다. 반면 불완전한 보통 여자인 오로라의 생모는 이상스러울 정도로 이야기에서 무시되며, 세명의 요정 대모에게도 오로라는 거의 마음을 쓰지 않는다. 디즈니는 ‘공주’를 포기하지 않고, 소녀 관객은 여전히 슈퍼우먼 강박에서 자유롭지 않다. 여자가 행복하고 충만한 인생을 살려면 어느 쪽으로건 완벽해져야 하는 것이다.

6/5

아마도 우리는 울어도 부모가 오지 않는 밤, 요람에서 인생 최초의 공포를 느끼지 않았을까? <샤이닝>이 그토록 무서웠던 이유도 아빠라는 사람이 가족 앞에서 미쳐 날뛰어서였다. 부모는 평균치의 인간이 상상하는 안전의 최후 보루다. 그들은 한동안 직접 온갖 공포와 불편을 제거해주고 아이가 조금 자라면 무서움에 어떻게 대처할지 알게 모르게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다름 아닌 부모들이 위협이 되고 집이 덫으로 둔갑할 때 아이들 혹은 우리 내면의 어린아이에게 밀어닥치는 불안은 어마어마하다. <오큘러스>의 마이크 플래너건 감독은 이 점을 정확히 간파함으로써 볼만한 호러를 만들었다. 주인공 케일리(카렌 길런)가 귀신들린 거울을 그냥 박살내버리지 않고 과거 거울이 부린 사술(邪術)을 입증하려고 위험하게 고생하는 이유도 납득할 만하다. 거울의 유죄를 밝혀 부모가 행한 폭력이 환각이었음을 증명 못하는 한, <오큘러스>의 남매에게는 온 세상이 위험한 장소이고 인생 전체가 공포의 구렁텅이일 테니 다른 방도가 없다.

좋아요

<그레이트 뷰티>의 티베르 강둑

영화에서 관광객은 대개 놀림감이다. 그들은 현지인의 삶과 무관한 상품화된 도시 이미지에 셔터를 눌러대는 부박한 무리로 그려진다. 하지만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은 <그레이트 뷰티>에 “관광객이야말로 로마에서 제일 훌륭한 사람들”이라는 대사를 넣었다. 혹시 비아냥? 하지만 티베르 강을 내려가는 크루즈선의 관광객과 주인공 젭의 시선이 얽히는 순간 의심이 걷힌다. 오만 인간사가 티끌처럼 느껴지는 고도(古都) 로마를 천천히 산책하는 이 영화는 찰나의 아름다움을 양껏 음미하는 관광객의 천진한 태도야말로 잘 사는 방법 아니냐고 속삭인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 시퀀스에서는 아예 카메라를 유람선에 싣고 로마를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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