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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백퍼센트의 소녀와 백퍼센트의 사나이를 만나는 일
김혜리 2014-07-17

※6월10일 일기에 <와즈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케빈 스페이시는 2003년부터 런던에 거주하며 극단 올드빅(Old Vic)의 예술감독으로 일해왔다. <나우: 인 더 윙스 오브 어 월드 스테이지>(Now: In the Wings of a World Stage)는 샘 멘데스가 연출하고 스페이시가 제작과 주연을 맡아 세계 12개 도시에서 공연한 <리처드 3세>의 메이킹 다큐멘터리다. <하우스 오브 카드>의 넷플릭스 체험을 통해 신형 플랫폼의 위력을 실감해서일까? 스페이시는 이 다큐멘터리를 본인의 웹사이트(www.kevinspacey.com)에서 자체 온라인 배급 중이다.

6/9

자전거는 아름다운 탈것이다. 이 기계는 안장과 손잡이, 페달로 운전자의 신체와 연결돼 원래부터 한몸인 양 감쪽같은 실루엣을 이룬다. 통상 지면과 직각을 긋고 다니는 우리는 자전거의 매개로 땅과 둥글게 화해한다. 자전거는 원래 발명된 목적대로 걷고 달릴 때보다 인간을 편안하고 빠르게 이동시키면서도, 대기를 가르고 발바닥으로 지면을 밀어내는 걷기의 본원적 촉각은 보존한다. 자전거의 생김새는 투명하다. 엔진룸이 감춰져 있는 자동차와 달리 작동 원리를 훤히 드러내며 달린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자전거가 포함된 풍경은 대개 눈에 흡족하지만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는 모습에는 특별한 감동이 있다. 아직 운전면허를 딸 수 없는 소년과 소녀들은 자전거에 올라타 난생처음 원하는 속도와 뜻하는 방향으로 세계 속을 움직여간다. 여리지만 앞으로 더 강건해질 날이 남아 있는 팔다리에서 흘러나오는 의지와 기운이 정직한 기계장치를 통해 속도로, 다시 물리적인 거리로 변환되는 광경은 구경꾼에게도 살아 있음의 기쁨을 감염시킨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 아이들은 자기의 궤적으로 세상의 표면에 연필 선을 긋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순간만큼은 이 세계가 난마같이 얽힌 수상쩍은 시스템이기를 멈추고 담박한 도화지로 변한다. 영화가 이 찰나를 놓칠 리 없다. 몇해 전에는 <자전거 탄 소년>이, 그리고 오늘은 <와즈다>가 자전거 탄 아이들의 아름다움을 환기시켰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의 열살 소녀 와즈다(와드 모하메드)가 자전거 안장에 올라앉는 모습을 보기까지 관객은 오래 기다려야 한다. 그녀가 사는 사회에서 여자아이가 자전거를 바라는 일은 일탈이다. “여자애가 자전거 타면 나중에 아이를 못 낳는다”라는 미신이 표면상 이유지만, 근본적으로는 사우디 사회의 이슬람 문화가 여성이 본인의 신체를 뜻대로 하고 자유롭게 이동할 기본권을 제한해서다. 와즈다의 선생님은 쉬는시간 학교 뜰에 나온 여학생들이 옆 건물 남자들의 눈에 띈다며 실내로 몰아넣고, 여성의 목소리는 나체와 같으니 건물 밖으로 흘러나가선 안 된다고 훈계한다. 즉, 여자는 되도록 보여서도 들려서도 안 된다(무엇을 하느냐 마느냐보다 수동태의 규범이 우선한다). 자연스런 일상의 활동을 음란한 것으로 보는 이 사고방식이야말로 여성을 외설적인 존재로 비하한다. <자전거 도둑>이 부자의 이야기라면 <와즈다>는 모녀의 드라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여자아이의 자전거는 금기지만 성인 여성의 운전은 아예 불법이다. 직장이 먼 여성들은 남자가 운전하는 카풀에 하릴없이 의존해야 한다. 당찬 딸을 나무라는 와즈다의 엄마도 실상 동일한 모순에 시달리고 있다. 엄마가 이 사실을 뒤늦게 깨달을 때 영화는 비로소 오르막을 넘는다. 항상 마주서서 대립하던 딸과 엄마가 옥상 난간 아래 나란히 쪼그려 앉아, 같은 바람에 머리칼을 날리며 대화하는 순간 새로운 모녀의 의리가 탄생한다. 소녀가 몰래 자전거를 연습하는 장소이기도 한 옥상은 <와즈다>에서 몇몇 명장면의 배경이다. 이내 이유를 납득할 수 있었다. 옥상은 사우디 여자들이 편한 차림으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집의 일부이면서 바깥으로 열려 있는 중간지대다. 기술적으로는 야외지만 높이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일정 정도 보호받기도 한다. 한국영화에 빈번히 등장하는 학교 옥상과 아파트 옥상과는 또 다른 성격의 무대다(ps. <와즈다>의 성공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여성의 자전거 운행이 허용됐다는 정보를 접하고 내용을 살펴보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감싸고 남자랑 동행하면 레저 목적으로 제한된 지역에서 탈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안 타고 말지 싶다).

6/10

알 만수르 감독이 와즈다 모녀에게 공통적으로 부여한 또 하나의 장치는 남성 캐릭터와의 관계다. 엄마에겐 아빠, 와즈다한테는 이웃집 소년 압둘라가 있다. 와즈다의 부모는 사랑으로 맺어진 부부였지만 남자는 슬슬 두 번째 결혼을 계획함으로써 아내의 종속적 지위를 일깨운다. 학창 시절 첫사랑으로 만난 그들의 관계에도 한때 평등한 우정이 포함돼 있었으리라 상상하고 나면, 와즈다와 압둘라의 관계를 더욱 유심히 지켜보게 된다. 두 친구가 아직 이성을 경쟁자로 의식하는 사춘기 이전 어린이들이라는 사실은, 다행히도 영화가 로맨스 서사의 상투성을 피해 야무진 통찰을 끌어내게 한다. 애초 와즈다가 자전거를 욕심내기 시작한 계기는 장난칠 때마다 자전거로 앞서가는 압둘라에게 약이 올라서다. 모종의 대가를 받고 교습을 해주기로 약속한 소년이 자전거에 보조바퀴를 붙여왔을 때 와즈다는 불같이 화를 낸다. 날 뭘로 보고! 그녀는 핸디캡의 수혜를 원치 않는다. 그러므로 좌절한 와즈다에게 압둘라가 큰맘 먹고 제 자전거를 가지라고 제안했을 때 소녀의 거절은 예상된 바다. 예상 못했던 것은 거절의 대사다. 와즈다는 잠깐의 사이도 두지 않고 대꾸한다. “(바보야) 그럼 시합을 못하잖아!” 소녀는 지금 미안해서 사양하는 중이 아니다. 내 힘으로 사겠다고 자존심을 세우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소녀는 아주 단순하게 소년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와즈다가 정말 탐낸 것은 자전거라는 물건이 아니라 친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전거를 타는 시간이다. 영화의 주제와 태도를 단 한 문장으로 낚아챈 총명한 대사다. 이처럼 <와즈다>를 뜻깊은 사회문제 영화 이상으로 들어 올리는 매력은, 소녀의 ‘저항’이 정치적 각성이 아니라 즐겁게 살고 싶다는 욕망에 솔직한 소녀의 됨됨이에서 비롯된다는 점에 있다. 예컨대 주인공이 작정한 투사였다면 코란 암송 대회 상금으로 자전거를 사겠다는 묘안은 불가능했을 터다. 와즈다는 원하는 것에 집중할 뿐 상황의 역설에는 관심이 없다. 생각은 관객의 몫이다 소녀가 벌이는 일련의 사건은 장애물을 만나면 타고 넘어 줄기를 벋는 덩굴식물의 생명현상과 비슷하다.

<와즈다>가 무거운 주제를 비교적 밝게 운반할 수 있는 결정적 이유는 사실 와즈다가 어려서다. 그녀는 사우디 사회가 성차별 규범으로 관리하고 속박하는 여성의 범주에 아직 진입하기 전이다. 지금은 딸을 귀여워하는 아빠도 소녀의 독립적 행보를 응원해 주진 않을 것이다. 친구 압둘라 역시 몇년 뒤엔 여자를 2등시민으로 여기는 이슬람 청년이 될 수 있다. 조혼한 급우처럼 와즈다도 오래지 않아 결혼에 발목을 잡힐지도 모른다. 이 당당한 소녀가 조금씩 의지가 닳아 체념한 성인 여자로 살아갈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높다는 판단은 관객의 얼굴에서 미소를 서서히 거둬간다. <와즈다>의 슬픔은, 그렇게 영화 바깥으로부터 슬금슬금 다가온다. 도래하지 않은 위기와 영화가 찍지 않은 상황까지 관객이 내다보고 반응하게 하는 효율만점의 사례다. 극중 인물을 관객이 진심으로 염려하도록 이끈 연출 덕택이다.

6/11

“아! 우리 이 차에서 못 내리겠구나.”

<로크>의 관객은 각자의 눈치 빠르기에 따라 러닝타임 5분에서 15분 사이에 상황을 접수한다. <로크>의 유일무이한 주연 톰 하디는 영화가 시작할 때 맨 BMW 운전석의 안전벨트를 끝까지 풀지 않는다. 순전히 1시간 반의 드라이브로 채워진 이 영화는 <폰부스> <베리드> <127시간>과 같은 부류의 밀폐 공간 스릴러다(<127시간>은 툭 터진 자연이 배경이지만, 인물이 옴짝달싹 못하니 마찬가지다). 그러나 <로크>에서 위협받는 것은 통상의 폐소 스릴러가 매달리는 생사와 육체적 안위가 아니다. 로크가 이 밀실에서 구제해야 할 것은 책임과 윤리다.

그럼 어쩌다 이 남자의 모럴은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나? 로크는 영국 최고의 콘크리트 타설 전문가이며 성실한 가장이다. 아버지에게 외면당한 혼외관계의 아들로 자란 탓에 가정은 그에게 더욱 중요하다. 인생을 훌륭하게 건축해온 그는, 몇달 전 취중에 치명적 실수를 저질렀다. 잘 알지도 못하는 여성과 하룻밤을 보냈고 상대(올리비아 콜먼)는 임신한 아이를 낳겠다는 결정을 통보한다. 출산 예정일을 두어달 앞두고 아내(루스 윌슨)한테 고백할 기회를 기다리던 로크에게 갑작스런 조산 소식이 날아든다. 공교롭게도 그는 몇 시간 뒤 중요한 공사 감독을 앞두고 있다. 로크는 우선순위를 판단한다. “아버지가 그랬듯 내 아이를 홀로 세상에 나오게 할 순 없다”가 그가 택한 정언명령이다. 이리하여 버밍엄에서 런던으로 향하는 차 안의 블루투스 곡예가 시작된다. 로크는 진통에 들어간 산모를 안정시키는 한편 아내에게 충격적인 외박 사유를 고백해야 하고, 내일 공사 현장에 갈 수 없음을 고용주에게 설명하는 동시에 긍지 높은 프로페셔널로서 당장 해고되건 말건 수하 직원을 전화로 움직여 공사를 차질 없이 완수하려 든다. 설득, 사과, 조종, 그리고 자아의 통제. 대충 간추린 로크의 멀티태스킹 내역이다.

<로크>는 외부로부터 변수를 추가해서 드라마를 고조하고 해소하지 않는다. 흉악한 히치하이커가 불쑥 뛰어들거나 트렁크에서 시체가 튀어나오는 일 따윈 없다. 대신 <로크>는 안쪽으로 더 파고들어 서스펜스와 재미의 계기를 찾는다. 주인공이 애착하는 물질 콘크리트는 이 영화의 훌륭한 키워드다. 일단 스티븐 나이트 감독이 쓴 대사는 무모할 정도로 구체적(concrete)이다. 관객은 로크의 통화를 통해 콘크리트의 물량과 공정, 도로 통제 실무에 관해 한수 배운다. 이 고집스런 시나리오 작법이 타전하는 의미는 두 가지다. 첫째, 로크라는 남성의 핵심은 일이다. 직업적 성취와 자부심이 최후에 그를 지탱한다. 실용주의자인 이 사내는 건축물을 묘사할 때만 시적인 표현을 구사한다. 둘째, 스티븐 나이트는 관객에게 아첨할 의사가 없다. 이를테면 “캐릭터가 흥미를 끄는 데에 성공한다면 그가 떠드는 콘크리트 공법에도 관객은 귀기울일 거다. 그게 안 된다면 무슨 화제를 꺼내도 어차피 실패다”식의 태도다. 구체적인 데에 목숨 걸기로는 극중 인물 로크도 감독 못지않다. 그는 강박적으로 정확한 단어를 고집한다. 산부인과 의료진한테 “산모의 파트너는 아니고 아이 아빠”라고 꼬박꼬박 바로잡고 분만에 들어간 여자를 다독이는 와중에도 “댁을 사랑할 것도 미워할 것도 없다. 난 댁에 대해 모르니까”라고 자른다. “10년이나 회사에 공헌한 건 고맙지만”이라고 상관이 허두를 떼면 “9년입니다”라고 바로 잡지 않고는 못 견디는 남자가 로크다.

부정확한 언어가 만들어내는 혼탁한 ‘번짐’을 혐오하는 이 남자가, 문제의 해결을 지체시킬 뿐 도움이 되지 않는 감상(感傷)을 장애물로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가 합리적 경험론 철학자 존 로크와 같은 성(姓)을 가졌다는 사실을 새삼 지적할 필요는 없을 터다. 로크는 오로지 콘크리트처럼 견고한 것들에만 관심이 있다. 배신에 분노한 아내에게 로크는 이미 저지른 과오는 미안하지만 감정으로 본질을 흐리지 말고 피해를 최소화할 실질적인(practical) 대책을 이야기하자고 청한다. 로크의 이와 같은 태도는 아내를 격분하게 만드는 반면, 어슷비슷한 남성 영웅 캐릭터에 질린 관객의 관심을 끈다. 로크는 우리가 익히 아는 영화의 남자주인공처럼 죄의식을 타인이나 자신을 향한 장렬한 폭력으로 발산하거나 우울증 속으로 도피하지 않는다. 그는 멜로드라마를 멀리하며 실수를 책임지고 수습하려 한다. 이는 로크가 가부장적 남성 캐릭터가 아니라는 말과는 다르다. 일과 사생활에서 제반 문제의 통제권을 행사하려는 로크는 오만한 마초다. 누구보다 본인이 해결책을 가장 잘 안다고 확신한다. <이스턴 프라미스>의 목욕탕 액션을 썼던 스티븐 나이트는 <로크>에서 액션을 배제한 채 태도만으로 이상적인 남성성을 구축하는 ‘사나이 영화’를 시도한다.

6/13

<로크>를 곱씹으며 운전하다가 어릴 적 감탄했던 폴크스바겐 골프 자동차의 CF가 퍼뜩 떠올랐다. 이 광고는 밤새 도박장에서 모든 것을 잃은 남자가 새벽 거리에서 자동차에 키를 꽂으며 “그래도 나에겐 골프가 남아 있다”고 되뇌는 모습으로 끝난다. 90분의 드라이브가 끝나갈 즈음 로크도 말한다. 차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갖고 있었던 직장을 잃었고, 가정도 잃을지 모른다고. 지금 자기에겐 운전해 가고 있는 이 차가 있을 뿐이라고. 가만, <로크>는 혹시 가장 주도면밀한 BMW 자동차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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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픽션 다이어리>의 고병천 전 강력반장

1990년대 한국 사회를 복기하는 <논픽션 다이어리>의 여정에서 ‘두개의 탑’은 지존파 사건과 삼풍백화점 붕괴다. 당시 서초경찰서 고병천 강력반장은 전자의 살인을 직접 수사했고 후자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학살 현장을 목격했다. 고 반장은 흡사 <논픽션 다이어리>의 주제의식을 인물의 형상으로 옮겨놓은 듯한 절묘한 인터뷰이로서, 그를 확보한 정윤석 감독의 행운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고 형사를 이 영화의 심장으로 만드는 것은, 그의 공교로운 숙명만이 아니다. 고 형사의 인터뷰는 소외된 개인의 오도된 폭력과, 공익보다 탐욕으로 움직이는 시스템의 폭력이 동기와 결과에서 어떻게 닮았고, 얼마나 판이한 방식으로 청산됐는지 들려준다. 그는 누구보다 끈질기게 생각해온 것이다. 이 전직 형사의 통찰에 갖다대면 영화 속 TV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한 당대 전문가들의 고견과 개탄은 허섭한 한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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