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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사의 아수라장] 갑자기 나타난 노루와 만나다
김선(영화감독) 2014-08-22

영화 속 ‘에피퍼니’ - 느닷없는 깨달음의 순간에 대해

<마지막 황제>

에피퍼니(epiphany)라고 들어봤는가? 그리스어인데, “드러나다”란 뜻이다. 성서에서는 주님이 그 모습을 인간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의미하는데,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강림하심” 정도 되겠다. 좀더 멋진 단어로는 ‘현현’(顯現)이 있다. 모습을 “실제로 보여주다”에 방점이 찍힌 번역어다. 하지만 문학쪽에서의 에피퍼니는 “드러나는 주님”보다는 “그 모습을 본 인간들의 놀라움”에 방점을 맞춘다. 그래서 옛날 옛적 내가 열심히 문학공부를 할 때만 해도 에피퍼니는 깨달음/깨우침(enlightenment) 정도로 배웠다. 그리고 그 깨달음엔 전제조건이 있다. “(큰 사건이 아니라) 사소하고 일상적인 사건들 속에서 깨닫는 갑작스러운 깨달음”이어야 한다는 것. 즉, 6•25 전쟁이나 나치 홀로코스트를 통해서 전쟁의 비인간성과 인류애의 소중함을 깨닫는 게 아니라, 저녁 반찬으로 뭘 해먹을까 궁리하다가 쌀통에 쌀이 없는 걸 보고 “아, 내가 쌀도 없는 주제에 반찬 걱정을 하고 있었구나”라고 깨닫는 정도랄까. 물론 이 깨달음은 일상성에 균열을 일으키며 이제까지의 편견과 무지를 박살낼 정도로 강렬한 것이어야 한다. 말하자면 “아, 내가 가난한 이유는 주제파악을 못해서였구나”까지 깨달음이 확장되어야 에피퍼니다. 또한 그 깨달음은 갑작스러운 것이어야 한다. “아!”보다 더 느닷없는 감탄사 “흐미!” 정도는 붙어야 에피퍼니다.

내가 에피퍼니란 말을 처음으로 배운 텍스트는 제임스 조이스였다(그 당시 에피퍼니란 개념은 영문학에서 주로, 영문학에서도 조이스를 위주로 연구되고 있었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아일랜드 출신의 이 천재작가는 에피퍼니를 염두에 두고 작품을 쓰진 않았겠지만, 이 개념은 지금도 조이스를 논할 때 반드시 다뤄야 할 조이스적 개념이 되어버렸다. 이 독보적 개념은 그의 대표작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통해 익히 알려져 있지만 내가 보기엔 그의 단편집 <더블린 사람들>에 더 “짧고 굵은 에피퍼니”들이 즐비하다. <애러비>에서 주인공 꼬마는 좋아하는 누나에게 줄 선물을 사려고 고군분투하지만, 바자회가 폐점되는 바람에 아무것도 사지 못해 절망하던 그때, 상점의 언니흉아들이 주고받는 음담패설을 듣고는 전율을 느낀다. 꼬마의 목숨을 건 숭고한 분투를 순식간에 천박한 것으로 전락시키는 저 일상성. 우리는 그 일상 속에서 살고 있고 그것을 이루는 것은 투쟁이 아니라 추락이라는 느닷없는 깨달음.

<스탠 바이 미>

물론 에피퍼니는 조이스의 전유물이 아니다. 조이스보다 좀더 종교적이고 아메리칸적으로 에피퍼니를 다룬 작가로는 레이먼드 카버가 있고, 스스로를 카버의 제자라고 칭한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에피퍼니 전문가다. 또한 그의 대선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도 <라쇼몽> <가을> 등의 작품을 통해서 “일상 속 느닷없는 깨달음”을 그려왔다(문학 소녀들이여. 가을이 온다. <가을> 꼭 봐라). 일본 문학이 나와서 덧붙이자면,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구 ‘하이쿠’야말로 에피퍼니를 위한 에피퍼니에 의한 에피퍼니의 시 아니겠는가. 너무 일상적이고 너무 느닷없고 너무 명쾌해서 심지어는 이 지면에도 실을 수 있다. “아이들아, 벼룩 죽이지 마라. 그 벼룩에게도 아이들이 있었으니.” 뭐 이런 식으로 일상의 디테일로 ‘니주’를 깔다가 느닷없이 생로병사의 거대한 주제를 들이미는 “흐미!”스러운 현현.

(서론이 길었다.) 그렇다면 영화에서의 에피퍼니는 어떻게 표현될까? 미리 말해둘 것은 영화의 서사는 극적 터닝을 중심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일상 속 느닷없는 깨달음”이 들어갈 여지는 많지 않다. 하지만 영화에도 다양한 속도와 흐름이 존재하기에 에피퍼니적 현상들이 종종 목격되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장면은 단연 <스탠 바이 미>의 “노루샷”이라 하겠다. 시체를 찾으러 간 사춘기 소년이 역경 중에 느닷없이 노루를 목격하며 마음의 평온을 찾는 장면인데, 영화의 극적 구성에는 하등 도움도 안 되지만, 소년 캐릭터의 감정상으론 있으면 좋을 (꼭 있어야 할, 이라고는 말 못하겠다) 에피퍼니적 순간이다. 아름답게 찍혀서 망정이지 후지게 찍혔거나 영화 전체가 재미없었다면 편집실에서 투자자들의 러닝타임 축소 압박에 못 이겨 삭제되었을 비서사적 컷이었다.

이처럼 영화에서의 에피퍼니는 오히려 영화의 서사구축에 위배되는 경우가 많다. 이유는 에피퍼니의 전제조건이 영화 서사의 전제조건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에피퍼니는 “일상 속 느닷없는 깨달음”인데, 영화 서사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이 “느닷없음”이다. 영화 서사는 정합성을 철칙으로 한다. 아무리 작은 디테일이더라도 시작이 있으면 마무리가 되어야 정합적이다. 그래서 아무리 하찮은 조연이라도, 아무리 하찮은 소품이라도 영화 속에선 최소한 한번 이상 기능해야 한다(<로보캅>의 거울을 상기해보자. 폴 버호벤의 정합성 강박이란). 하지만 에피퍼니는 느닷없어야 한다. 다시 말해, 영화에서의 에피퍼니는 사건 전개에 있어서 어떤 기능도 해서는 안 되며, 그래서 언제든지 삭제될 운명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하지만 영화감독들은 자신이 찍은 모든 컷을 보여주고 싶다. 그 컷이 에피퍼니처럼 멋진 컷일 경우엔 더 그럴 것이다. 그래서 감독들은 에피퍼니를 지켜내는 꼼수를 생각해냈는데, 엔딩 장면에 넣는 방법이다. 마지막에 관객은 (투자자들도) 긴장감을 풀기 때문에 엔딩은 감독의 한마디를 넣기에 좋은 포인트가 된다. 그래서 탄생한 위대한 에피퍼니는 <마지막 황제>의 귀뚜라미 엔딩이다. 느닷없이 튀어나온 미물은 영화의 주제 ‘황실의 몰락과 서글픈 노스탤지어’를 잘 표현해주는 것이었는데, 이는 당시 대한극장에서 영화를 본 꼬마 김선에게도 “에이~ 저 곤충이 어떻게 저리 오래 살어?”라는 “곤충학적 의심”을 갖게 할 정도로 강렬했던 것이다.

하지만 강렬하다고 해서 다 살아남지 못하는 게 이 에피퍼니 컷이다. 아주 처참한 예로는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가 대표적이다. 영화는 다시 봐도 지루할 정도로 이미지 중심의 영화인데, 형사 데커드가 꿈꾸는 유니콘이 그 이미지의 중심에 있고, 엔딩에는 넘어진 유니콘 종이인형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데커드의 클로즈업이 있다. 그런데 (예상컨대 “느닷없다”라는 이유로) 유니콘 장면은 개봉 당시 삭제당했고, 엔딩의 에피퍼니 끄덕임만 남아서 그야말로 반쪽짜리 에피퍼니 엔딩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물론 1992년 재개봉한 디렉터스 컷에는 이 유니콘 장면이 당당히 들어가 있었고, 여전히 당당히 지루했다).

<블레이드 러너>

한국영화에서의 에피퍼니적 순간들은 어떨까? 한국영화는 극적 구성이나 캐릭터의 감정 굴곡을 특히 중시하기 때문에 “느닷없는 깨달음”의 순간들을 더더욱 찾기 어렵다. 그나마 발견할 수 있는 에피퍼니적 순간들은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이나 <올드보이> 등에서 드문드문 나오는 만화적 형식의 컷들이다. 오대수가 원수와 사투를 벌이는 동안, 미도는 날개를 선물받고 파닥거려보는 느닷없는 장면 등이 그것인데, 이는 박찬욱 특유의 만화적 감성과 그의 작가적 고집이 결합된 레어한 경우다. 이런 거 말고 <스탠 바이 미>의 노루샷 같은 거 없냐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진 않지만, 꼭 하나 꼽아보라면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꼽고 싶다. 가난한 뮤지션의 일상을 다룬 영화에 에피퍼니적 순간들이 많지 않겠냐고 하시는 분들은 영화를 다시 한번 보시라. 뮤지션들의 일상은 (임 감독의 전작 <세친구>와는 달리) 묘사보다는 전개되고 있고, 따라서 에피퍼니적 순간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단 한순간, 아니 여러 순간, 관객의 뇌리를 강렬하게 때리는 깨달음의 순간들이 있었으니, 바로 주인공 주변인물들이 떠나가는 순간들이다. 어떤 구도로 잡았길래 강렬했냐고? 어떤 구도로도 잡지 않았다. 주변인물들이 “안녕~” 하고 작별인사를 하고 프레임 밖으로 나가버리면 주인공은 혼자 남고 작별 끝. 영화의 주제가 ‘흩어짐과 홀로 남음’인데, 떠나는 사람들의 뒷모습조차 잡지 않다니. 강조해야 할 것을 무심하게 생략하니 그게 더 “흐미!”스럽다. 노루나 유니콘처럼 보여지는 에피퍼니가 아니라, 보이지 않아서 더 강렬한 작별 에피퍼니다. 임순례 감독의 무덤덤한, 아니 대담한 현현적 결단에 환호를 보낸다. (임순례 감독님께 류승범이 떠날 때 왜 뒷모습을 잡지 않았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감독님께선 아무 대답 안 하시고 씩~ 웃기만 하셨다. 아직도 그 웃음의 의미가 궁금하다. 아마도 “짜식아~ 그게 고단수 에피퍼니야”라는 대답이리라. “찍었는데 투자사가 빼라고 해서 뺐어”라는 대답이 아니라. 임 감독님, 대답해주세요이이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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