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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호의 오! 마돈나] 아일랜드의 들꽃

모린 오하라 Maureen O’Hara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존 포드의 영화는 헨리 폰다와 존 웨인의 이야기다. 정의와 존엄을 지키기 위한 숭고한 용기(주로 헨리 폰다 주연의 작품들), 그리고 희생과 의무를 위한 불굴의 투지(주로 존 웨인 주연의 작품들)들이 전면에 나와 있다. 이런 ‘존 포드의 미덕’을 실현하는 두 남자, 곧 헨리 폰다와 존 웨인의 그림자가 너무 커서, 그의 영화에서 여성의 이미지를 기억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포드의 영화에선 여성 배우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작고, 또 두 남자 배우처럼 연속하여 여러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도 거의 없다. 단 한명의 예외가 있는데, 그가 바로 모린 오하라다. 포드의 영화에서 다섯번 주연으로 나왔다. 만약 존 포드 영화가 여성의 이야기라면, 그것은 모린 오하라의 이야기다.

존 포드의 여성 스타

모린 오하라와 존 포드는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1941)에서 처음 만났다. 소위 ‘포드의 절정기’ 때 발표된 작품이다. 포드는 ‘경이의 연도’로 불리는 1939년에 <역마차> <젊은 날의 링컨> <모호크족의 북소리> 등 세 작품을 한꺼번에 내놓았다. 최소한 두 작품은 걸작이고, 다른 하나도 수작이다. 나이도 40대 중반이고, 감독 경력도 20년쯤 됐을 때다. 바로 이어 발표된 두 작품이 사회비판극인 <분노의 포도>(1940)와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이다. 말하자면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는 연출가로서 최절정기를 맞았을 때 나온 작품이다.

웨일스 지방의 광산이 배경인 이 영화에서 모린 오하라는 아들 6명을 둔 광부 집안의 유일한 딸로 나온다. 포드 고유의 테마인 아버지와 아들간의 충돌, 이것이 비유하는 과거와 미래, 전통과 도전, 정주와 이주의 테마들이 극의 긴장을 몰고 온 작품이다. 은밀하게는 오이디푸스의 근친상간 테마도 들어 있다. 웨일스 지역의 신화와 같은 ‘달콤한 풍경’을 배경으로 오하라는 노래를 부르며 등장하는데, 특유의 소프라노 목소리가 얼마나 청아한지 그 순간만은 마치 천사처럼 보일 정도였다(모친은 한때 오페라 가수였다).

오하라는 늘 웃음을 잃지 않으며, 포드의 여느 여성들처럼 건강하고 용기도 갖고 있다. 그녀는 마을의 목사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 마음도 그녀가 먼저 보여준다. 뭐랄까, 헨리 폰다의 자존심과 용기를 여성 인물에게서 찾으면 모린 오하라가 될 것 같다. 다른 여성들처럼 수동적이거나 숨어서 수군대는 성격이 아니다. 여성이 먼저 목사를 찾아가고, 그렇지만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해 예의를 갖추려고 무던 애쓴다. 하지만 가족을 위해 광산주의 아들과 결혼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요청은 거절하지 못한다. 결국 원치 않는 결혼을 한 날, 얼음처럼 굳은 그녀의 얼굴은 이 드라마의 비극성을 예고하고도 남았다. 말하자면 오하라는 이 영화를 통해 강인함과 용기, 그리고 여성의 체념이라는 전통적인 가치까지 복합적으로 연기해냈다. 오하라는 아일랜드의 더블린 출신인데,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로 할리우드에서도 스타가 됐다. 그녀가 21살 때다.

잘 알다시피 존 포드도 아일랜드계다. 거친 뱃사람을 연상시키는 캐릭터가 아일랜드인들의 특성이다. 포드는 그런 점을 자랑스러워했다. 겉으론 야수처럼 거칠지만 속엔 인정이 숨어 있는 인물로 아일랜드 사람을 주로 그렸다. 감독 자신이 그런 남자로 보이기도 했다. 존 웨인이 연기하는 서부 사나이는 전부 ‘황야의 아일랜드인’이라고 봐도 된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서 오하라가 연기한 딸이 바로 아일랜드 여성의 특성이다.

존 포드는 고국 아일랜드를 다루는 영화를 늘 만들고 싶어 했는데, 그 결과물이 <아일랜드의 연풍>(The Quiet Man, 1952)이다. 말하자면 대가 대접을 받을 때에야 비로소 대단히 사적인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 포드는 아일랜드인 처녀로 당연히(?) 모린 오하라를 캐스팅했다. 그녀의 상대역으로는 존 웨인이 나온다. 그가 맡은 역할도 고국으로 돌아온 아일랜드계 미국인이다. 존 포드가 풍경을 얼마나 솜씨 있게 담아내는지는 아무 웨스턴이든지 한편만 보면 알 수 있다. 어릴 때 화가를 꿈꿨다는 감독의 고백이 허언이 아님을 확인할 것이다. 그 솜씨를 고국 아일랜드의 풍경을 담는 데 발휘하고 있다. 푸른 들판과 무리를 지은 흰 양들, 그 사이에서 야생의 들꽃 같은 여성으로 오하라가 나온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 남은 영원한 이미지

연극 무대의 신인이던 오하라가 영화계의 주목을 받은 것은 앨프리드 히치콕이 영국 시절 만든 <자메이카인>(1939)에 출연하면서부터다. 이때 협연했던 대배우 찰스 로튼이 오하라의 배우 경력을 적극 지원했다. 오하라라는 예명도 찰스 로튼이 정했고, 미국 진출도 도왔다. 이후 두 사람은 장 르누아르 감독의 <이 땅은 나의 땅>(1943) 등에도 함께 출연했다.

존 포드가 오하라를 다시 부른 것은 대략 10년이 지난 뒤였다. 1930년대 말의 ‘경이의 연도’와 비교되는 포드의 또 다른 왕성한 활동기는 1940년대 후반기다. 사실상 폰다와 헤어지고, 포드가 웨인을 자신의 주인공으로 내세워 소위 ‘기병대 3부작’을 만들 때다. 곧 <아파치 요새>(1948), <황색 리본을 한 여인> (1949), 그리고 <리오 그란데>(1950) 등인데, 모린 오하라는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리오 그란데>에 나왔다. 배경만 서부로 바뀌었을 뿐 오하라는 ‘아일랜드의 여성’ 캐릭터 그대로 나온다. 강인하고 품위 있다. 존 웨인이 군인의 의무를 양보하지 않듯 모린 오하라는 가족의 사랑을 양보하지 않는다. 남성의 의무와 여성의 사랑이 충돌하는 드라마인데, 만약 <리오 그란데>가 서부극이기보다는 멜로드라마로 기억된다면, 그것은 모린 오하라의 사랑의 폭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 터다. 그래서인지 <리오 그란데>에선 남자들이 밤에 부르는 세레나데가 대단히 매력적으로 표현돼 있다. <리오 그란데>는 서부극의 외피를 입은 멜로드라마이다.

존 포드와 협연한 나머지 두 작품은 <롱 그레이 라인>(1955)과 <독수리의 날개>(1957)이다. 1950년대 중반은 걸작 <수색자>(1956)가 없었다면, 포드의 필모그래피가 빈약해 보일 때다. 두 작품은 그럴 때 나왔고, 지금도 덜 사랑받는 작품들이다. 모린 오하라가 영화사에 남는다면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서 원치 않는 결혼을 하고 나올 때, 흰색 면사포가 바람에 휘날리는 짧은 장면 덕분일 테다. 마음은 바람 속의 면사포처럼 흔들리지만, 결혼을 승낙해야만 하는 체념은 얼굴 속에 그대로 각인돼 있다. 이 한 작품, 그리고 이 장면은 영화사라는 게 존재하는 한, 끝없이 반복되며 인용될 것이다. 배우에게 그건 큰 명예이다(존 포드가 죽기 몇달 전, 후배 감독들은 병상에 누운 그를 방문하여, 특별 행사를 준비하는데, 상영을 바라는 작품 하나만 말해 달라고 했다. 대답은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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