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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웅의 일상어 사전] 안알랴줌
권혁웅(시인) 2014-09-19

[ 아날야줌 ]

겉뜻 안 알려주고 싶을 때 쓰는 말 속뜻 이미 알려주었을 때 쓰는 말

주석 한 여학생이 카카오스토리에 올린 짧은 글에서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아무도 왜 내가 힘들다는 걸 몰라주지.” 이 혼잣말에 아홉명이 ‘힘내요’란 느낌을 남겼고 한명이 이런 댓글을 달았다. “먼일잇냐 ㅋ.” 그러자 여학생이 대답한다. “안알랴줌.” 차마 말할 수 없는 사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고 싶은 사연이 한데 얽힌 말이다. 내용으로는 알려주지 않겠다는 뜻이지만, 운을 맞춘 부드러운 발음은 입을 막아도 새어나오는 어떤 누설의 표현이다. 그 이후 엄청난 속도로 사람들에게 패러디물이 퍼졌다. 이 작품들에 카카오스토리식으로 느낌을 남겨보자.

먼저 ‘화나요’ 버전이 있다. 기상 캐스터가 나와서 말한다. “오늘의 날씨는… 안알랴줌.” 불쾌지수가 매우 높은 날씨라는 걸 직접 경험하게 해주는 버전이다. 사실은 기상 캐스터의 복장에서부터 사달이 났다. 하필이면 입고 나온 원피스가 파란색이어서, 블루 스크린 앞에서 그녀가 투명인간으로 변했던 것이다. 화나요 버전이 아니라 야동 버전이었던 셈이다. ‘무서워요’ 버전도 있다. 김성모 화백의 만화에 대사를 입혔다. 선글라스를 쓴 건장한 사내가 세 남자를 해치우고는 말한다. “아무도 내가 힘든 걸 몰라주지.” 쓰러져 있던 남자 하나가 애원하듯 묻는다. “뭔일인데 그러세요?” “… 안알랴줌.” 이 버전의 주인공은 쓰러진 남자1이다. 선글라스 남자의 눈빛을 볼 수 없으므로 남자1은 자신이 더 맞을지 그만 맞을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다. ‘슬퍼요’ 버전의 주인공은 한창 탈모가 진행 중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축구선수 루니다. “입만 산 것들은 종일 나불나불 아무도 모르지 내 진짜 속마음, 상처받는 거 이제 익숙하지만 가끔씩은 조금 힘들다.” 박지성이 묻는다. “먼일잇냐.” “… 안알랴줌.” 세계 최고의 공격수에게서, 헤딩 때 마찰의 슬픔을 캐치한 안목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안알랴줌” 패러디가 가장 흔한 분야는 정치다. 2014년 7월24일 쿠키뉴스는 22일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이 변사체로 발견된 뒤에 그를 소재로 한 패러디물을 소개했다. 여기서 유 전 회장은 “아무도 왜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몰라주지”라고 한탄하고, 여러 정치인들이 ‘슬퍼요’, ‘멋져요’, ‘어디요’, ‘이름 뭐요’, ‘미안해요’ 등의 느낌을 남긴다. “살아 있냐ㅋ”라는 이준석 선장의 물음에 유 전 회장은 예의 대답을 해준다. “안알랴줌.” 검경의 부실 수사를 두고 제기된 갑론을박을 음모론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여기엔 ‘슬퍼요’와 ‘무서워요’와 ‘웃겨요’와 ‘화나요’가 다 들었다. 실은 이 분야 최고의 패러디 작품을 아직 소개하지 못했는데 지면이 다 차버렸다. 그래서 서둘러 짧게 소개해야겠다. 최고의 작품은 바로… 안알랴줌.

용례 급기야 이 단어는 패러디 국어사전에까지 등재되었다. “안알랴줌”이란 “안알랴주고 싶을 때 쓰는 말”이란다. 사전은 아무것도 풀어주지 않으면서도 한 가지를 가르쳐준다. 저 말은 한 단어라는 것. ‘안알랴줌’이란 사실은 ‘안알랴준 것’으로 이미 다 알려주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