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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루시 인 더 스카이
김혜리 2014-09-25

※ 8월20일, 21일 일기에 <루시>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난 뭐 감추고 그러는 거 싫더라.” <프랭크>에서 줄곧 인형 탈을 쓰고 있는 뮤지션으로 분한 마이클 파스빈더의 대사다. 프랭크의 가짜 머리는 묘하게 표현적이다. 창피당하면 홍조가 오르는 듯하고 놀라면 동공이 커져 보이는 착시현상이 일어난다. 지금껏 전신 누드를 포함, 연기할 때 아무것도 가리지 않아온 배우라는 사실이, 파스빈더가 <프랭크>를 선택한 동기를 거꾸로 납득하게 한다.

8/20

최근 스칼렛 요한슨은 그녀의 몸으로부터 이리저리 탈출하느라 바쁘다. 인공지능으로 분한 <그녀>에서 요한슨은 육신이 아예 없고, <언더 더 스킨>의 몸은 빌려 쓴 껍데기이며, <루시>에서는 육체적 현존을 초월해버린다. 육체의 의미는 각기 다른 경로로 지워진다.

루시는 세명의 캐릭터 중 유일하게 보통의 인간 여성으로 등장하는데도, 관객이 가장 냉담한 심경으로 전말을 지켜보게 되는 인물이라는 점이 얄궂다. 심지어 루시는 호모 사피엔스의 ‘종 대표’다. 뤽 베송 감독은 자연사 박물관에 전시된 최초의 인류에 붙여진 이름이 ‘루시’라고 영화 초반 대사로 친절히 알려준다. 신종 약물이 몸에 퍼져 뜻하지 않게 뇌 기능이 증강된 루시는, 인류가 지닌 잠재력의 지평을 넓히는 개척자 역할을 맡는다. 이번 영화에서 뤽 베송의 야심은 참신한 액션의 구현보다 거창한 공상과학- SF의 오역이지만 이 경우에는 더 잘 어울린다- 의 천명에 있다(그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인셉션>에 <루시>를 빗댄 적이 있다). 기존 자연사 다큐멘터리 필름을 틈틈이 교차편집해, 루시의 모험을 광대한 문명사와 엮는 편집의 의도는 노골적이다. 그런데 왜 객석의 나는 루시가 획득한 엄청난 능력에 흥분하거나 그녀에게 동조하지 못했을까?

간단한 답은 루시의 안중에 ‘내’가 없었기 때문이다. 좀 복잡하게 말하면 <루시>에서 뤽 베송이 은연중에 상정한 이상적인 세계가 나의 관심사와 철저히 무관해 보였기 때문이다. 루시는 능력이 강해질수록 본인 이외의 사람은 특별히 살 가치가 없는 존재인 양 행동한다. 대만인 택시 기사가 영어를 못한다고 하자 다짜고짜 쏘아버리고, 어차피 죽을 것으로 판단되는 중환자를 절명시킨다. 본인이 빨리 수술받기 위해서다. 루시의 냉혹한 행동은 이기심보다 그녀의 초고속 두뇌회전이 도출한 순수하게 합리적인 결론으로 설명된다. 쓸데없는 지체 요인을 제거하고 루시의 복강에서 마약을 꺼내고 갱들을 제압하는 일이 더 중요하고 시급하기에 방아쇠를 당길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 전개 뒤에는 특정한 전제가 깔려 있다. 효율적인 것과 합리적인 것을 거칠게 동일시하고, 뇌의 계발은 EQ의 저하를 불가피하게 수반한다는 이분법이다. 이를테면, 슈퍼컴퓨터라면 문제 해결 과정에서 희생 따위 무시하는 전략을 짤 텐데 보통의 인간은 연민 탓에 못할 뿐이라는 암시가 읽힌다. 물론 영화는 스스로 세운 전제 내에서 드라마를 풀어갈 수 있다. <트랜센던스>와 <리미트리스>도 인간 지력의 확장과 통합이 부르는 휴머니티의 상실에 눈길을 던졌다. 하지만 <루시>의 전제는 편의적으로 작동해서 문제다. 길가의 무고한 시민은 미련 없이 제거하면서 원흉인 마약 조직 보스 미스터 장(최민식)의 목숨은 살려두는 루시의 행동은, 단지 액션 피날레의 상대가 없어지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이미 전능한 경지에 도달한 루시가 구태여 몇 블록의 행인들을 모조리 다치게 하고 죽이며 강행하는 역주행 자동차 폭주도 극적 설정 내부의 어떤 목표에도 효율적으로 봉사하지 않는다.

8/21

“인간은 존재보다 소유에서 더 큰 만족감을 얻는다.” (Humans are more contended in having than being) <루시>는 이 대사로, 인간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며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내면의 잠재력을 돌아보라고 권장한다. 고작 뇌의 10%만 사용하며- 과학과 무관한 영화적 가설이다- 아등바등 살아가는 구차한 현실에서 고개를 들어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을 바라보라고 고무한다. 이는 소비의 노예이기를 멈추고 선(禪)을 통해 해방을 찾으라는 의미 같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난 내게 <루시>의 교훈은 어쩐지 신자유주의 시대에 난무하는 자기 계발 캠페인의 SF적 극한처럼 들린다. 루시는, 이를테면 자기 계발의 끝에 도달한 슈퍼 엘리트다. 나머지 평범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영화가 보여주듯 엘리트의 도정에 거치적거리지 않도록 조심하는 일뿐이다. 어쩌면 루시는 <트랜스포머: 사라진 시대>에 나오는 만능 소재 트랜스포뮴의 인간판이다. 모든 걸 알고 원하는 대로 자기를 변화시키며 내키는 대로 세상을 움직인다. 극중에서 노먼 교수(모건 프리먼)는 “당신이 이런 희생을 감수할 만큼 ‘우리’가 가치 있는 존재이길 바랍니다”라고 자못 송구스럽게 말한다. 뤽 베송은 과학자들에게 루시가 전달한 한개의 USB 메모리에 담긴 정보를 인류 전체의 진보로 간주한다. 하지만, 정말? 과연 그럴까? 뇌 활용도가 높아진 인간은 자기를 완벽히 통제하고 나아가 타인을 뜻대로 움직이며 마침내 물리적 시공까지 뛰어넘을 수 있다고 <루시>는 가정한다. 루시의 능력에 대한 영화의 정의는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라는 모 기업의 슬로건을 상기시킨다. 둘 이상의 ‘루시’는 대혼란을 야기할 터다. 일등은 한명이어야 하고 그래야 제일 멀리 갈 수 있다. 하지만 그때 나를 포함한 세계의 나머지로 이루는 사람들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8/22

두달에 한번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영화 산책’을 진행한다. 8월에는 <에어포트>(1970)를 상영하고 재난영화의 역사를 돌아보기로 했다. <에어포트>를 복습하다 한 장면에 눈길이 머물렀다. 공항 매니저 멜(버트 랭커스터)이 폭설로 활주로에 파묻힌 비행기를 촌각을 다투며 끌어내는 대목이었다. 멜은 동료들과 협력해 아슬아슬하게 동체를 치워낸 이후에도 활주로를 바로 뜨지 않는다. 불시착할 다른 여객기에 장애물이 될 잔해가 없는지 활주로를 다시 점검한다. 오늘날 재난영화라면 없을, 실무자 관점의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났다. 평론가 닉 로딕은 <에어포트> <포세이돈 어드벤처> <타워링>으로 이어지는 1970년대의 미국 재난영화를 검토하면서, 다수의 주요 인물 중 백인 남성 캐릭터가 상황을 최종 통제하는 리더로 부상하며, 이들은 사태에 대한 최고의 지식과 판단력을 가진 브레인인 동시에 팔을 걷어붙이고 필드에서 직접 뛰는 행동대장 역을 겸한다고 관찰했다. 넓게 보아 이 전통은 CG 스펙터클이 부흥시킨 90년대 중반 이후 재난영화에서도 면면하다. 할리우드는 예나 지금이나 관제탑에서 무전만 치는 리더를 싫어한다. <인디펜던스 데이>에서 전투기를 직접 모는 대통령(빌 풀먼)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변화도 보인다. 최근 영화로 올수록 사태를 분석하고 전략을 수립하는 주인공의 활동은 시늉에 가까워지고 화염과 파편 속을 돌파하는 액션의 비중이 커졌다. 주인공이 학자건 군 통수권자건 “상황을 인지하고 있다”는 설정은 그대로지만 구체적 내용 설명은 요식행위에 그치고 긴급성만 강조된다. 첫 번째 이유는 영화가 다루는 재앙의 범위와 규모가 CG의 발달과 함께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커졌기 때문일 것이다. <에어포트>를 위시한 70년대 재난영화의 재앙은 배, 빌딩, 항공기 등 특정 공간에 한정되기에 어디를 막고 뚫어야 수습할 수 있을지 비교적 명료하다. 그러나 21세기 스크린의 재난은 터졌다 하면 전체적 조망이 불감당인 전 지구적 종말의 엄습이다. 남성성을 확인하는 방식의 세대차이도 무관하지 않을 터다. 과거 할리우드영화의 남성 영웅들이 관록과 추진력, 프런티어 정신으로 문제 해결 능력을 입증함으로써 가부장의 권위를 재확인했다면, 90년대 후반 이후 재난영화의 영웅들은 애초에 회복할 안정적인 자리가 없다. 그들의 활약은 억눌렸던 남성성을 곤경을 맞아 한꺼번에 폭발시킴으로써 불안을 해소하는 행위에 가까워 보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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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두 얼굴>의 로케이션

<1월의 두 얼굴>의 아테네와 크레타 섬은 <도브>의 베니스나 <킬러들의 도시>의 브뤼헤만큼 영화의 결정적 변수다. 관객 눈을 즐겁게 하는 병풍 역할을 넘어,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극중 인물의 심리와 결단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속내가 복잡한 사기꾼 체스터(비고 모르텐슨)와 라이달(오스카 아이작)은 유적의 풍경에 무관심하지만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주문에 걸린 것처럼 그리스신화 속 비극적 부자 관계를 재연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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