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권혁웅의 일상어 사전
[권혁웅의 일상어 사전] 잠깐 쉬었다 가자
권혁웅(시인) 2014-10-31

[ 잠깐 쉬얻따 가자 ]

겉뜻 잠시 휴식하자는 말 속뜻 여기서 살자는 말

주석 회식은 무섭다. 여기저기서 폭탄이 터지기 때문이다. 소주와 맥주와 양주를 섞어서 만든 폭탄은 메가톤급이어서 방금 먹은 저녁까지 도시락폭탄으로 만든다. 까딱 잘못하면 화장실에 가기도 전에 터져서 부장님 구두를 양변기로 만든다. 밑이 막힌 양변기가 방문 앞에 나란히 늘어서 있다. 먹일 때에는 “술이 들어간다, 쭈욱 쭉 쭉 쭉” 합창을 하더니, 언제까지나 어깨춤을 출 것 같더니, 지금 그녀는 팽개쳐진 부대다. 일차가 끝나고 이차가 끝나고 노래방이 끝날 때까지 그녀는 한구석에서 조용하다. 그래도 감자에 싹이 나고 잎이 나서… 주먹과 가위와 보자기가 흩어질 때는 언젠가 온다.

비밀 연애의 약점은 저런 때 말리지 못한다는 것. 지금 그녀를 업고 가는 그는 잡채를 생각하는 중이다. 그녀의 긴 머리는 당면 가닥 같다. 길고 매끄럽고 윤기가 난다. 쇠고기 조각이 조금, 양파 조각이 조금 묻어 있다. 아까 폭탄의 흔적이다. 머리카락 사이로 얼비치는 붉은빛은 가늘고 길게 썬 당근의 그 빛이다. 사내는 참기름 대신 땀을 흘리며 생각한다. 여기 어디였는데? 모퉁이를 돌면 ‘특급’ 표시가 있을 텐데? 그는 지금 아주 급하다. 특급이다. 그곳 이름은 홀인원쯤이 좋겠다. 아까도 그토록 자주 “원샷”을 외쳤으니까. 한번에 털어넣었으니까.

그러나 이 길은 도시괴담에 나오는 그 길과 비슷하다. 길은 끝날 생각이 없고 그녀는 잘못 업은 할머니 귀신처럼 점점 무거워진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미로에 든 것 같다. 이러다가 새벽이 오면 어쩌지? 아니, 그녀가 깨지 않으면 어쩌지? 그녀를 세워놓고 말을 걸어야 하는데, 잠깐 쉬었다 가자고 제안해야 하는데. 그녀는 잡채처럼 너무 빨리 쉬었다. 저렇게 쉬었다간 정작 쉴 곳에서 쉬지 않을 텐데.

쉬었다 가자는 말, 농담처럼 던지는 말이다. 넘어진 김에 쉰다는 말도 있으니까. 어? 힘든 길 끝에 쉴 곳이 있네? 참새에겐 방앗간이 있고 연인에게는 여관이 있지. 그런데 실은 이 말, 너무 노골적이어서 뼛속까지 환히 비치는 말이다. 쉬는 건 잡채로 족하다. 그는 지금 중노동을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세상에서 제일 힘든 노동은 그가 생각하는 그 노동이 아니다. 최고의 중노동은 바로 손만 잡고 자는 일이다. 그러니 쉬었다 가자는 말, 전혀 농담이 아니다. 그의 속내와 상관없이, 이 말은 그녀를 위해 가장 힘든 노동을 하겠다는 말이다. 가장의 역할을 하고 싶다는 말이다.

용례 영화 <색즉시공>에서 현희(함소원)는 오바이트한 입으로 달환(조달환)에게 기습적인 키스 세례를 퍼붓는다. 고백이나 키스가 폭탄의 일종이라는 걸 웅변하는 엽기적인 장면이다. 폭탄주와 도시락폭탄처럼 입술도 한번에 터진다. 요플레처럼 달콤하게 혹은 시큼하게.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