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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전영객잔] 그 (여)자는 무엇을 원하는가

데이비드 핀처가 설계한 나르시시즘의 미로, <나를 찾아줘>에 대한 상상적 추궁

*이 글은 <나를 찾아줘>의 결말 부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를 찾아줘>의 부부 닉(벤 애플렉)과 에이미(로저먼드 파이크)의 애증으로 얼룩진 결혼 생활사에 관한 설명이 간략하게나마 필요한 것 같다. 결혼 5주년이 되던 날 에이미가 홀연히 사라진다. 영화는 닉과 에이미의 황홀했던 첫 만남에서부터 결혼 뒤 관계가 서서히 악화되어간 과정까지를 주요하게 술회하는 한편, 속속 드러나는 정황에 따라 닉이 에이미 실종 사건의 주범이자 피의자로 지목받는 과정을 전개해간다. 여기까지를 이 영화의 1부라고 부를 수 있다. 2부에서는 시작과 함께 버젓이 살아 있는 에이미가 돌연 등장한다. 그녀는 실종되지 않았고 죽지도 않았다. 이것은 그녀 스스로 꾸민 일이고 일종의 남편 체벌 프로그램이다. 에이미는 남편이 자신을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당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에이미에게도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벌어지고 계획은 수정된다. 결국 에이미는 자신을 짝사랑해온 갑부 콜링스가 자신을 납치하여 감금했던 것으로 일을 조작한다. 그를 죽이고 겨우 탈출한 것으로 위장한 뒤 집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 부부는 장안의 화제가 되고 둘은 세상의 눈들을 의식하여 서로 사랑하는 척 꾸미며 지옥 같은 결혼 생활을 다시 이어가기로 한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국내의 어떤 감상자라도 <나를 찾아줘>를 보고 나면 이 친숙한 한국 소설의 제목을 금방 떠올릴 만하다. 이것이 <나를 찾아줘>에 대한 가장 즉각적인 해석의 버전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끔찍한 갈등과 위협 이후에 재결합하게 된 영화의 후반부에서 닉이 에이미에게 “이렇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같이 살아야 하는 것이냐”고 물었을 때 에이미조차 “그런 것이 결혼”이라며 한마디로 일축한다. 결혼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제도가 상투화해놓은 것들을 최대한 받아들이며 살아가야 한다는 포기와 위악의 말로 들린다. <나를 찾아줘>를 설명하기 위해 간간이 막장 드라마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가정사와 결혼사와 복수극을 둘러싼 해괴한 갈등 전개와 돌발적인 해결법으로 무장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나를 찾아줘>나 막장 드라마나 둘 다 유사하다.

<나를 찾아줘> 감상에 따른 유력한 해석의 버전 하나를 더 제기해볼 수도 있다. 결혼은 갈등의 외적 구실에 해당할 뿐 진정으로 신랄한 다른 갈등은 닉과 에이미의 이야기의 대결과 승부에 있다는 해석이다. 이 영화가 두명의 화자를 앞세우고 있으며 각자의 진술의 힘으로 부딪친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신중한 경우다. 영화 전체를 닉과 에이미의 대결 구도로 상정하되 결과적으로는 에이미의 서사가 닉의 서사를 철저히 농락하고 지배하게 되는 과정으로 판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각만큼 감상자 편의의 가설도, 지나친 낭설도 아니며 영화 속 인물들조차 확연하게 인식하는 중요한 대당이다.

관련하여 세개의 대화 장면이 주목을 요한다. 첫 번째, 닉이 그의 변호사를 처음 만났을 때 변호사는 “아내쪽이 훨씬 더 완벽한 이야기를 가졌다”라고 말한다. 그는 아내쪽이 훨씬 더 완벽한 정황, 주장, 사실 등을 가졌다고 표현하지 않고 “이야기”라고 표현한다. 두 번째, 돌아온 에이미가 형사들을 모아놓고 조작된 사건을 꾸며내는 도중 그녀를 의심하는 여형사가 의문을 제기하자 에이미는 “당신처럼 무능한 형사가 이 사건을 계속 맡았더라면 남편은 사형당하고 나는 계속 침대에 묶여 있었을 것”이라며 제압한다. 완벽한 이야기를 가진 자에게 의문을 제기한 여형사는 졸지에 무능해진다. 세 번째, 닉의 쌍둥이 여동생 마고는 닉에게 다음과 같이 촌철살인으로 양자의 승부를 최종 정리해낸다. “놀라운 에이미와 그 초라한 남편의 이야기.”

막장 드라마론과 이야기 승부론은 일부분 흥미롭다. 지금의 논의와도 관련성이 있어서 전제했다. 하지만 영화를 관람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체감상의 몇 가지 질문들이 내게 그 이상을 고려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 같고 <나를 찾아줘>에 관한 나의 호기심의 자리도 여기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단단하고 치밀한 구조를 지녔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이 영화는 예상 밖이다. 1부가 상당히 혼란스럽다면 2부는 그냥 당혹스럽다. 이건 해석 이전에 솔직한 관람의 경험담이다. 그럼에도 이 혼란함과 당혹감의 이유는 당연히도 영화의 어떤 형식적 근거들과 연계되어 있을 것이다. 예컨대 1부의 혼란함은 영화라는 매체가 내장한 이야기와 이미지의 복잡한 결합성에 관계되어 있고 2부의 당혹감은 테마를 완성해내려는 이 영화의 내밀하고 외골수적인 의지와 관계되어 있다. 이러한 1부와 2부에 대한 형식적 관심을 거치며 우리는 데이비드 핀처의 관심사에 새로운 주석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핀처는 “집단적 자기애”가 이 영화의 동기가 됐다고 말했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가 말한 이 집단적 자기애라는 테마의 그물망이 그 자신이 의식하며 던진 크기보다 훨씬 크고 복잡하여 그의 의도 너머의 것들까지도 끌어올린다는 데 있다. 앞서 전제한 해석들과 비교하건대, 나는 이 영화를 막장 드라마가 아니라 일종의 결혼우화라고 부를 생각이다. 아니 결혼우화도 부정확한 말이며 더 정확히는 재혼우화라고 부르고 싶다. 이 과정에서 핀처로서는 거의 고려치 않았을 영화의 어떤 오래된 장르성이 역설적으로 이 영화에 거대하게 드리워진다는 것이 나의 추론이다. 그러니 이야기의 대결론이나 승부론에 그치지도 않는다. 대결이나 승부의 구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위장된 결탁과 공모라는 서사적 협업을 통해서 재혼우화라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게 되며 그로써 핀처가 말한 자기애의 테마에 애타게 닿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게 가능한 것일까.

공동의 것으로 요약된 사랑과 갈등의 연대기

이미 밝힌 것처럼 1부는 혼란스럽다. 1부가 일목요연하게 경험된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나는 이 영화에 관한 그의 전체 의견을 신뢰하지 못하겠다. 1부의 시작에 관하여 말할 때 우리는 은연중 ‘닉의 아내 에이미가 홀연히 사라진다’로 곧잘 시작한다. 앞서 나도 고의적으로 그렇게 썼다. 그런데 그 문장은 영화 전체의 내용을 축약하는 시작으로는 어울리지만 1부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에는 쓸모가 없다. 무엇보다 그렇게 시작하면 1부에서 이야기와 이미지가 서로 모호하게 주고받는 결탁의 거래를 알아채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에이미의 실종이라는 잠시 후에 있을 중대한 사건이 아니라 닉의 행방이라는 첫 번째에 발생하는 사소한 동선을 따라가야 맞다. 1부의 시작은 에이미가 실종되는 것이 아니라 닉이 바에 가서 동생 마고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마고는 심지어 너와 아내의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시시껄렁하고 지겨운 이야기로 너를 괴롭히겠다고 닉을 부추긴다. 그렇게 해서 닉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하지만 그건 비교컨대 <소셜 네트워크>의 첫 장면처럼 구성되지 않는다. <소셜 네트워크>의 첫 장면은 두 남녀의 속사포 대사로 구성되어 있다. 반면에 <나를 찾아줘>는 여기서부터 이미 교차가 발생한다.

닉이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찰나 그러니까 닉의 대사가 등장하려는 찰나, 대사는 사라지고 “2005년 1월8일”이라 쓰여 있는 일기장의 자막과 함께 에이미의 음성을 따라 닉과 에이미가 만난 첫날이 이미지로 회상된다. 닉은 에이미가 조작해낸 (때로는 사실을 적어놓은) 그 일기장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으므로 이것을 두고 에이미의 일기장에 대한 혹은 그걸 읽었던 닉의 회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는 일기장의 존재를 알기도 전에 이미 이 일기장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될 뿐만 아니라 사실로 추론하게 된다. 동시에 이것을 닉의 회상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닉은 진술의 제스처를 취했을 뿐이고 정작 진술은 이미지로 재현되고 있는데, 그 이미지가 불려나온 저장소는 닉으로서는 알 길 없는 일기장이며 무엇보다 일기장에 적힌 활자의 주인이 에이미이고 회상 장면의 강력한 주인이 되는 음성의 존재가 에이미다. 닉은 몇 차례 더 말하지만 회상 장면은 매번 유사한 방식으로 되풀이하여 재현된다.

핀처는 원작자이자 각본가인 길리언 플린이 이 영화를 ‘그가 말했다/그녀가 말했다’의 구조로 각색해냈다고 설명했는데, 핀처의 이 설명은 2부에서는 거의 들어맞지 않을 뿐 아니라 1부에서도 정확하지 않다. 사태는 좀더 심각해진다. 어느 순간부터는 닉의 진술의 제스처조차 사라진다. 일기장은 저 스스로 출몰하여 날짜를 알리고 과거를 불러온다. 그렇다면 이건 닉의 진술이 아니라 온전히 에이미의 진술로 보아야만 하는 것일까. 하지만 여전히 닉은 진술의 제스처를 주장하고 있으므로 닉을 구실로 삼은 에이미의 지배적 진술이라고 쉽게 단정하기도 어렵다.

여기에는 물론 애매함이라는 핀처의 노림수도 관계되어 있다. 그것은 순전히 핀처의 의도다. 예컨대 닉이 에이미를 밀치며 욕하는 회상 장면. 이 장면을 볼 때 우리는 닉이 당연히 그렇게 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녀의 조작된 일기장이 등장하기 이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닉은 그런 짓을 한 적이 없다고 얼마 뒤에 대사로 첨언한다. 당신은 에이미의 일기장의 이미지적 진술을 믿을 것인가 닉의 이야기적 진술을 믿을 것인가, 핀처는 야심차게 묻고 있다. 이 애매함이 정교하기는 하다. 하지만 부분적인데다 놀랍지 않다. 처음 경험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1부에서 경험한 혼란함은 이것과 좀 다르다. 핀처가 노린 애매함은 둘 중 누구를 믿을 수 있을 것인가의 딜레마다. 내가 말하는 혼란함은 핀처의 의도와 무관하게, 여기 누구도 믿지 못하거나 양쪽 다 믿어야 하는 상태에서의 혼란함이다. 닉과 에이미 양쪽 다 화자로서 주체성을 상실하였거나 그 반대로 주체라고 주장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이야기와 이미지가 서로 간섭하면서 핀처 그 자신조차 예기치 못한 제2의 애매한 굴이 만들어져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는 것이다.

1부가 착오 없이 해내려는 어떤 기본적인 기능 때문에 이런 혼란함이 발생한 것 같다. 놀랍게도 그 기능이란 더없이 간략한 기능이다. 닉과 에이미의 사랑과 갈등의 연대기를 요약하라, 다만 어느 한쪽의 것이 아니라 그들 공동의 것으로 요약하라, 그렇지 않다면 그들 누구도 갖지 못하도록 요약하라. 심지어 피의자로 몰리게 된 닉의 누명이라는 사건도 이 사랑과 갈등의 맥락 안에 있거나 그 부차물로 보인다. 우리가 1부에서 확실히 알게 된 건 그러니까 한 가지다. 그들이 한때 열렬히 사랑했고, 결혼했고, 지금은 미워하게 됐다는 것이다. 혼란함은 오히려 이 한줄의 서사를 공고히 하기 위한 공모의 결과다.

대결이 아닌 해결의 서사 모드

2부는 1부와 사태가 확연히 다르다. 1부는 복잡해서 혼란이 오지만 2부는 지나칠 정도로 간단한데 집요하게 굴어서 당혹스러운 것이다. 구체적인 이유 세 가지를 간명하게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 당혹감, 이건 갑작스러운 전환, 압축, 요약의 도입부 때문에 온다. 이 도입부는 놀랄 정도로 갑작스러우며 쾌활하며 확신에 차 있다. 두 번째 당혹감. 갑작스러운 캐릭터의 단순화, 라는 문제다. 이건 다소 결함이거나 의도적인 퇴보다. 몇 가지 장면을 예로 들 수 있다. 에이미는 캠핑장에서 만난 여자와 텔레비전을 본다. 에이미의 일화가 방송되고 있다. 옆 사람이 당사자인 줄도 모르고 “부잣집 외동딸이 바람둥이와 결혼해서 생긴 일”이라고 여자가 비난한 뒤 화장실에 가자, 에이미는 그녀가 마시던 음료수에 가래침을 뱉는다. 드물지만 핀처의 영화에 적절한 유머가 아주 없는 건 아니므로 웃으며 볼 수 있는 그런 장면이다. 다음이 다소 문제가 된다. “미주리주에는 사형 제도가 존재합니다”라는 뉴스 앵커의 말을 듣고 바깥으로 나온 에이미는 남편이 사형당할 거라는 기대에 아이처럼 즐거워하며 천진난만하게 폴짝 뛴다. 복수의 성공을 예감한 기쁨 혹은 지독한 병적 징후를 묘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다소 갑작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다.

이렇게 더 말해보자. 에이미 역할을 맡은 로저먼드 파이크의 연기는 뛰어난 편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분량이나 무게감과는 반대로 그녀의 연기가 훨씬 더 고혹적으로 돋보이는 건 2부가 아니라 1부다. 1부에서 그녀가 더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흔한 경우라면 광적이고 비참한 상태를 연기하는 2부에서 그녀의 연기가 더 돋보인다고 우린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꼭 그런 것 같지 않다. 2부에서 파이크의 연기는 종종 단순하고 어색하다. 특히나 자신을 숨겨준 갑부 콜링스와 있을 때 가장 어색하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건 여배우 파이크의 연기 역량의 탓이 아닐 수도 있다. 그녀는 2부의 분위기가 점차 요구해 온 캐릭터의 단순성을 극도로 받아들여 이제는 어색함까지 연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콜링스와 함께 있을 때 에이미가 마치 그를 사랑하는 것처럼 가장하고 있으므로, 그 우격다짐의 가장을 연기하는 파이크의 연기가 어색해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피할 수 없는 자리에 온 것이다. 영화가 이토록 캐릭터를 갑작스럽게 단순화시켜 얻으려는 보다 큰 대가는 과연 무엇일까. 이것이 세 번째 당혹감과 관련이 있다. 세 번째 당혹감은, 말하자면, 대결이 아닌 해결의 서사 모드, 라는 점이다.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2부에서 가장 중요한 점으로 보인다. 우리 모두가 은연중에 2부를 닉과 에이미의 2차 대전 혹은 제2의 대결로 가정하게 된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닉과 에이미는 2부의 어디에서도 거의 대결하고 있지 않다. 서로 용서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건 관객인 우리가 더 잘 알고 있다.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그들은 각자의 발등에 붙은 불을 끄기 바빠서 서로 대결할 시간이 없는 것이다. 대결의 가속화 서사가 아니라 각자의 해결 서사라는 것이 2부의 가장 당혹스러운 점이다. 따라서 2부의 서사는 정확하게 두개의 운동 방향을 따라 병렬 진전된다. 닉은 에이미가 쳐놓은 덫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한다. 그런데 에이미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예정에도 없이 갑작스럽게 돈을 강탈당하고 콜링스의 집에 왔으니 그녀도 이 사태를 해결하기 급급하다. 이때 우리는 잠시 괴상하게 질문을 해볼 수 있다. 닉에게 빠르고 더 좋은 해결이란 방송에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보다 차라리 에이미를 잡으러 나서는 것이 아닐까. 에이미의 경우는 어떨까. 닉에게 돌아가는 것보다 나은 해결책은 콜링스에게 말했던 것처럼 해외로 도피하는 게 아닐까. 둘 다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영화의 해결 지점이 따로 모색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럴 수 없다.

이 해결의 방식에 바로 캐릭터의 단순화라는 문제가 결합되어 있다. 즉, 닉에게 되돌아간다는 에이미의 선택은 누가 보아도 정상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 선택 이전에 보다 확실히 더 비정상적으로 보여야만 한다. 단순하고 명쾌한 미치광이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영화는 그 강고한 미치광이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책으로서 남편에게 돌아가겠다는 비정상적 선택을 할 때 관객이 그걸 받아들이도록 하고 싶은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해결책만큼은 결코 바꾸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캐릭터의 단순화라는 폐단을 맞으면서까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상위의 것은, 바로 그 해결의 서사 모드이며, 남편과의 재결합이라는 그 해결책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이 재결합으로 에이미는 그녀의 문제를 닉은 그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게 된다. <나를 찾아줘>의 2부의 서사는 각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두 인물의 평행선을 달리다가 닉과 에이미의 비정상적 재결합이라는 상징적 재혼으로 해소된다.

사랑을 버리더라도 자기애를 지켜라

1부와 2부가 고집스럽게 지켜내려 했던 것들을 이어보면 이 영화의 내밀한 전체 서사의 욕망이 보인다. 1부에서는 사랑했고, 결혼했고, 미워하게 된 과정을 내장하려고 한다(사랑->결혼->갈등). 2부에서는 파경을 맞아 갈등 상태에 놓였으나 유일한 해결책으로 서로를 다시 찾게 되는 결론으로 나아가려고 한다(갈등->재결합). 1부와 2부가 각각의 출혈을 감수하면서까지 완성한 이 선을 이으면 닉과 에이미 사이에는 결국, 사랑->결혼->갈등->재결합이라는 서사가 완성된다. 이것이 바로 <나를 찾아줘>라는 재혼우화가 직조되어가는 과정이다. 물론 이 서사가 얼마간 은밀하게 진행된 것이기는 해도, 우리는 마침내 <나를 찾아줘>에 연관되어 있는 영화사의 한 장르를 말할 만한 자리에 온 것이다.

처음에는 <나를 찾아줘>를 보면서 <싸이코>를 비롯하여 <서스피션> <마니> 등 앨프리드 히치콕의 영화를 떠올렸다. 하지만 히치콕 영화와 <나를 찾아줘>의 연관성보다 지금 내게는 다음과 같은 것이 더 흥미롭고 더 역동적이다. “스크루볼 코미디에서의 플롯과 주제는 성적, 사회경제적 차이 때문에 다투는 연인들이라는 캐릭터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 “이미 결혼한 스크루볼 커플이 등장하는, 변주된 스크루볼 코미디의 경우에는 플롯의 초점이 그들의 이혼과 재혼이 된다”(<할리우드 장르의 구조>, 토머스 샤츠). 가령, 레오 매커리의 <이혼소동>이나 조지 쿠커의 <필라델피아 스토리> 등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명성 높은 영화학자의 말을 빌렸지만, 우리는 이미 몇몇 스크루볼 코미디가 이상의 사실들을 중시한다는 걸 체감적으로 잘 알고 있다.

<나를 찾아줘>가 스릴러라는 점 때문에 이 영화와 스크루볼 코미디와의 여러 유사성을 굳이 외면할 필요가 있을까. 그렇다면 <나를 찾아줘>를 스크루볼 스릴러라고 불러보는 건 어떠할까. 처음부터 닉과 에이미는 미주리 촌놈과 뉴욕 상류층 여인이라는 계급차를 지녔었다. 수많은 스크루볼 코미디의 주인공들이 그러했듯 “부잣집 외동딸과 바람둥이 남자의 결혼”이기도 했다. 닉도 훗날 “에이미가 나를 촌놈 취급했다”고 화를 낸 바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들의 불행은 경제적 파탄으로부터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나를 찾아줘>에는 스크루볼 코미디라면 범접하기 어려운 무시무시한 살인 계획이 등장하고 있지 않느냐고 혹시라도 반론이 제기된다면 이렇게 제안하고 싶다. 그 계획을 스크루볼 코미디의 저 유명한 ‘앙숙의 다툼’의 위협적인 변주로 이해하는 것은 또 어떠하겠는가. 그러니까 이 영화도 스크루볼 코미디의 딱 그것만큼 다시 만날 여지를 남겨두고 닉과 에이미를 서로 다투게 한다. 닉은 사형당하지 않았으므로 돌아오는 에이미를 맞을 수 있다. 에이미가 모텔의 남녀 불량배들에게 살해라도 당했다면 우리는 <싸이코>를 떠올려야 할 것이지만, 그녀 역시 살아 돌아온다. 그리고 둘은 상징적으로 재혼한다. <나를 찾아줘>는 결혼우화와 재혼우화의 가장 공고한 장르인 스크루볼 코미디의 이러한 조건과 양상들을 충분히 취하여 스크루볼 스릴러로 태어나는 한편, 테마는 공유하되 정서는 그 반대의 것을 가져와 황폐함을 자아낸다.

철학자 스탠리 카벨은 ‘로맨스를 위한 두 건배’라는 글에서 몇몇 스크루볼 코미디와 멜로드라마 속 결혼에 관하여 말하면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합의로서의 결혼으로부터 로맨틱한 동맹으로서의 결혼으로의 이행”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다. 지금 내게는 전자가 결혼이라는 이데올로기로, 후자가 결혼(재혼)이라는 우화로 들린다. 후자에 해당하는 <나를 찾아줘>의 재혼의 기능은 한번 더 비틀린다. 재혼은 하고 동맹은 가져오되 로맨스는 가져오지 않는다는 역설을 발휘하는 것이다. 스크루볼 코미디의 앙숙이 다툼을 거쳐 영원한 짝이 된다면 스크루볼 스릴러 <나를 찾아줘>의 닉과 에이미라는 앙숙은 동맹은 하되 임시적이며 위험천만한 짝으로 남겨진다. 돌아온 에이미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닉에게 하는 말을 기억하자. “난 자기 해치지 않아. 하지만 자기도 동참해. 자기 역할을 하라고.” 이것이 동맹자에게 넣는 은근한 압력과 추궁이 아니고 그 무엇일까.

그러므로 <나를 찾아줘>의 감독 핀처에게 연출 동기가 된 집단적 자기애라는 관심은 이 영화와 무관해 보이는, 하지만 우리로서는 관계 있음을 지속적으로 설명해온 그 재혼우화의 직조 과정을 인식할 때에야 더 잘 느껴진다. 핀처가 집단적 자기애라고 말할 때 그것은 예컨대 쇼프로그램으로 대변되는 대중적 자기애의 실현성을 주로 겨냥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가 자신의 예상에 포함시키지 않은 스크루볼 코미디의 재혼만큼 자기애를 도식화한 장르도 드물다. 스크루볼 코미디 주인공들의 재결합을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영원한 결합이 아니라, 결국 자신의 사랑에 관한 가장 아름다웠던 상을 포기하지 못해 돌아가게 되는 증상으로서의 결합이라고 가정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자기애를 찾는 과정이며 <나를 찾아줘>의 지독한 결론이지 않은가.

그러니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장면을 다시 생각해보자. 쇼프로그램에 나와 에이미를 향해 사과의 말을 하는 닉. 그를 보던 에이미는 별안간 왜 닉에게 돌아가기를 결심한 것인가. 그녀라고 그가 위선적으로 사랑을 말하고 있음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돌아온 그녀는 닉에게 말한다.“텔레비전으로 본 당신이 멋있었다”고. 프로이트는 그의 글 <나르시시즘 서론>에서 자기애의 경우 사랑의 대상이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지 이와 같이 간략한 도식을 제공한다. “1)현재의 자신(그 자신) 2)과거의 자신 3)자신이 바라는 미래의 모습 4)한때 자신의 일부였던 사람.” 여기에 관련하여 에이미의 귀환의 선택이 (첫 번째 항목을 제외한다면) 프로이트의 이 도식에 지나칠 정도로 부합되는 면이 있다는 점에 우리는 놀랄 필요가 없을 것이다.‘어메이징 에이미’라는 말은 어디에서 기인했던가. 에이미가 철저하게 자기애로 가공된 유년의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생각하자.

돌아온 에이미는 닉에게 “나는 전사야”라고 말한다. 그녀는 도대체 무엇과 싸웠다고 여기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그녀의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그녀가 그간의 나날들을 그녀의 충만한 자기애를 망치는 것들과 싸운 나날들로 생각한다고 미루어 짐작한다. 영화는 왜 그녀에게 그런 병증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 대신 영화의 끝까지 그녀의 이 전투를 완성시키고 있다. 따라서 <나를 찾아줘>에서 재혼의 목적은 자기애의 완성이다. 이것은 에이미의 이야기가 닉의 이야기에 승리했다거나 성공했다는 뜻이 아니다. 에이미의 이야기는 철저하게 실패했다. 에이미도 패배자다. 죽이려던 남편은 여전히 살아 있고 죽으려던 자신도 비겁하게 살고 있다. 천신만고 끝에 얻은 건 재혼뿐이다. 여기에 사랑이 없다는 것쯤은 그녀도 알고 있다. 그래도 괜찮다는 것이다. 자기애가 완성되고 충족되면 될 일이다, 다만 가장 비참하고 위선적인 실현으로. 그러므로 이 글의 도입부에서 인용했던, “그런 게 결혼”이라는 에이미의 말은, 사랑을 버리더라도 자기애를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그녀의 재혼우화에 딱 들어맞는 강론이다. <나를 찾아줘>라는 제목은 한국에서 붙여진 제목인데, 마치 나를 찾아달라는 이것이 에이미가 아니라 자기애가 에이미에게 하는 말처럼 들릴 정도다.

카벨도, 위키피디아도 인용하고 있는 <가라, 항해자여>의 유명한 마지막 대사를 나 역시 인용하고 싶다. 이 영화가 스크루볼 코미디도 재혼우화도 아니라는 점 때문에 굳이 인용을 피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하면서.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제리와 샬롯이 오붓하게 밤하늘의 창가를 보고 있다. 제리가 아직은 함께할 자신들의 미래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묻는다. “당신은 행복해질까, 샬롯?” 그때 샬롯이 바로 그 유명한 대사로 대답한다. “오, 제리, 달에 대해서는 묻지 말기로 해요. 우리는 저 별들을 가졌잖아요.” 카메라는 하늘로 올라가 밤하늘을 비추고 거기엔 달은 없지만 별들이 반짝인다.

달을 갖지는 못할지라도 별은 가졌다는 것에 더없이 만족하자는 그 말은 우리에게 한참을 비틀려 되돌아와 다시 핵심을 전할 것이다. <나를 찾아줘>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닉은 질문한다. “아내의 머리를 박살내서 뇌를 꺼내서라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묻고 싶다”고. 그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아내 에이미는 예의 고혹적이고 관능적인 자세로 말없이 우리를 보고 있다. 닉은 묻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정말 행복한가, 행복할 수 있는가. 다시 사랑할 수 있는가. 그녀는 영화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녀의 야릇한 표정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 달(사랑)에 대해서는 묻지 말기로 해요. 우리는 저 별들(자기애)을 가졌잖아요. 이것이 <나를 찾아줘>의 재혼의 목적이며 애타게 자기애를 찾아 나선 어떤 이의 이야기의 끝이다.

상상적인 주석을 단다는 기분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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