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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어느 시절에 그가 있었다

그 빛나던 녹색의 시간을 반추하며

M, 기억하니?

믿어지지 않겠지만 갑자기 네가 생각났다. 기적 같은 시간의 도약이 단숨에 일어났어. 19년 전, 흐린 겨울날이었어. 코가 빨개지도록 몹시 추운 날이었지. 나는 너를 따라 잠실 어딘가에서 열린 N.EX.T 콘서트에 갔어. 1995년 송년 콘서트였지. 아마 네가 표를 샀을 거야. 콘서트가 시작하기 한참 전부터 줄 서서 기다리는데, 하마터면 동상에 걸릴 뻔했지. 발을 동동 구르면서 나는 너를 약간 원망하기까지 했어. 이런 고생을 하면서 신해철의 콘서트에 날 데려온 이유는 뭘까? 그러나 내색하진 않았어. 그냥, 너하고 콘서트 보러 갔다는 사실이 즐거웠으니까.

드디어 관객이 입장하기 시작하고, 객석에는 기대와 설렘이 넘실댔어. 깜깜했어. 녹색의 팔찌들이 내는 반딧불 같은 빛이 춤을 추었어. 그 흔들림 때문에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지. 신해철이 등장하자 너를 포함한 여자아이들의 비명이 소름 끼치게 귀를 찔렀어. 나는 깜짝 놀랐어. 그 함성과 열망의 중심에 신해철이 있었고, 그는 콘서트 내내 격앙된 바람들에 당당하게 응답하는 사제처럼 느껴졌어.

공연이 끝나고 나니 얼얼했고, 허탈했어. 나와서 맥주 한잔을 했던가? 너는 신해철을 내게 이해시키려고 열변을 토했는데, 사실 나는 그 내용보다 특유의 쾌활한 비음 섞인 꾀꼬리 같은 너의 목소리를 감상하는 데 더 집중했다고나 할까? 그때 나는 이미 조금 더 쿨하게 멋질 수 있는 음악, 예를 들어 너바나라든지 소닉 유스 같은 밴드의 음악을 듣고 있었고, 그와 더불어 강태환의 프리재즈에도 깊이 빠져 있었지. 너에게도 그런 음악들을 모아서 카세트테이프로 만들어준 적이 있어. 하여튼 우리는 가벼운 논쟁을 했던 것도 같아. 나는 조금은 과하게 드러난 듯한 좋은 메시지와 제의적이고 과시적으로 포장된 그 이미지가 부담스럽다는 의견이었고 너는 그걸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 뭔가가 있는 것을 왜 못 보냐고 했지. 포장을 뜯고 찬찬히 들으면 그의 음악에는 진실한 비판의식과 미래를 향한 희망의 씨앗들이 들어 있다고 했어. 나는 신기했어. 문학 공부를 관두고 열성적으로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시작한 투사 같은 네가 신해철에게만큼은 아낌없는 숭배를 바치는 것이 흥미롭게 느껴졌어. 나는 너를 집까지 바래다주었지. 현관 안쪽에 있는 너의 하얀 얼굴이 닫히는 문과 함께 사라지던 장면. M, 실은 그것이 너에 관한 마지막 기억인 것 같다.

M, 그리고 시간은 흘렀어. 신해철은 노무현을 지지했고, 라디오를 진행하면서 독설가 이미지를 얻고, 마왕이 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어른이 되었지. 이제는 말도 좀 느릿느릿해진 것 같았어. 그렇게 우리처럼, 빛나는 녹색의 시간들을 보내고 조금씩 누렇게 바삭거리는 가을을 맞이하고 있었어. 그 가을의 선선함, 나쁘지 않았어. 그것이 우리 모두의 현재형이지.

바로 그즈음에 신해철의 갑작스러운 소식이 전해진 거야. 떠나기엔 너무 이른데 영원한 작별의 부름을 받고 순순히 응한 것을 보면, 네 말대로 그는 순수한 영혼을 지녔나봐. 좋은 곳으로 가서 행복하길 빌다가, 동시에, 너의 안부가 오랜만에 궁금해졌어. M, 지금의 네가 어디 사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전혀 모르지만, 왠지 많이 슬퍼하고 있을 거 같다는 확신이 든다. 그런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M, 오래된 기억이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다시금 실감하게 해준 신해철의 영전에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다. 기억은, 너무 깊숙이 넣어놔서 어디다 두었는지 가물가물한 옛날 카세트테이프 같은 거야. 음색은 바랬겠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소리들이 잠들어 있어. 갑자기 찾은 테이프의 재생버튼이 눌러졌고, 기억은 생생히 19년 전의 그날로 나를 데려다주었어. 안타깝게도 그 버튼은 갑작스러운 부재의 소식이 눌러주었어. 정말 묘해. 존재가 사라지면, 기억은 살아나.

M, 그나저나 잘 지내니? 요즘은 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