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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로망 <마노 카비나의 추억> 출간한 소설가 하일지
2002-03-06

“나에게 <쥬라기 공원>은 따분할 뿐”

<경마장 가는 길> 등 일련의 경마장 시리즈와 <새> <진술> 등을 통해 새로운 소설을 해온 작가 하일지씨가 또 한번의 실험을 감행했다. 지난 2월에 <마노 카비나의 추억>(민음사 펴냄)이라는 시네로망을 내놓은 것이다. ‘시네로망’이란 영화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읽히기 위해 쓴 시나리오. <마노 카비나…>는 50살의 시인 서인하가 자신에 관한 문학 관련 다큐멘터리를 찍는 현장에서 만난 23살의 여자 강수미를 보면서 느끼는 심리적 변화와 그로 인한 내면 파괴를 그리고 있다. <경마장 가는 길> <그는 나에게 지타를 아느냐고 물었다> 등의 소설이 영화화되고, <경마장 가는 길>을 직접 각색하는 등 하일지씨와 영화계의 인연은 꽤 가까운 편. 처남을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갑자기 체포된 철학교수의 독백으로 이루어진 소설 <진술>도 배우 박광정이 감독 데뷔작으로 영화화하고 있다. 현재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중인 하일지씨는 <마노 카비나…> 이후 2편을 더해, 총 3편의 시네로망을 쓸 계획이라고 밝혔다.

왜 시네로망을 쓰게 됐나.

<마노 카비나…> 작가의 말에서 밝혔듯 파리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작가로서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했던 19편 작품 가운데 하나다. 영화쪽 일도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 중 하나라는 생각으로 썼다. 우리나라엔 정제된 시나리오가 없다. 실제 영화대본, 촬영대본은 이해하기 힘들고, 독자들이 읽을 만한 출판물이 없다. 시나리오에 관심있는 젊은 영화 지망생들이 읽거나 교재로 쓸 만한 텍스트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텍스트를 하나 선물하면 좋겠다 생각했다. 물론 영화화되면 좋겠지. 다만 보통 영화는 영화제작을 염두에 두고 작업을 하는데 나는 영화제작을 생각하지 않고 문학으로서 작품을 만들어본다는 생각을 한 것뿐이다. 그 자체도 임자를 만나면, 좋은 운명을 만나면 좋은 작품이 되겠지. 시네로망이라는 것은 영화화되어야 생명을 얻는 것이니까.

‘마노 카비나’란 어떤 의미인가.

리투아니아에 있는 평범한 카페 이름이다. 2년 전 리투아니아에 처음 갔는데 첫날 마노 카비나에서 율리아라는 영문과 학생을 만났다. 천사같이 예쁜 아이였다. 1시간 정도 대화를 나눴는데 그 표정과 미소를 잊을 수 없어서 거기 머물던 열흘 동안 매일같이 그 카페를 찾아가 하루종일 기다렸는데 못 만났다. 이듬해에 강연이 있어서 그곳에 또 가게 됐다. 그때도 일주일 동안 꼬박 그 카페만 갔다. 누구나 가슴속에,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가슴속에 가지고 있는 기억, 그러나 현실 앞에선 의미없는 사랑의 기억이 있다. <마노 카비나…>에 등장하는 서인하는 그런 비현실적인 사랑의 추억을 감추고 있는 시인이다. 그래서 그의 현실의 사랑은 서툴다. ‘마노 카비나’란 그런, 적극적인 사랑이 아니지만 나한테는 너무나 강하게 남아 있는 사랑을 의미한다. 사실은 지금 율리아를 다시 만난다면 알아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에 괴롭다. 사실상 알아보기 힘들지 모른다. 이미 내 기억 속에 고정된 어떤 이미지로만 남아 있으니까. 시네로망을 썼다는 데서, 소설에서 시네로망으로 전업한 프랑스 누보로망 계열의 작가 겸 영화감독 알랭 로브그리예가 연상된다.

로브그리예를 좋아하고 그에 대한 논문도 썼다. 그가 부럽기도 하지만, 더 존경하는 작가는 카프카다. 로브그리예도 소설, 시네로망을 쓰고 영화감독도 하는 등 많은 작업을 했는데, 그의 세계가 나와 닮진 않았다. 그는 시를 쓰지 않았는데 나는 썼다는 점도 다르다. 문학세계에서 오히려 추앙하는 사람은 카프카다. 물론 작품세계나 시네로망 등에서 로브그리예에게서 힌트를 받긴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다다르고 싶은 건 카프카다. 사실 로브그리예도 그렇고, 현대작가들은 모두 카프카를 흠모한다.

<마노 카비나…>가 독자들에게 어떻게 다가갔으면 하나.

내가 우리 문학에서 운신이 힘든 이유는 난해한 작가로 몰렸기 때문이다. 우리 아들이 <마노 카비나…> 보더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그러더라. (웃음) 나는 쉽고 편하게 읽게끔 짜여져 있다고 생각하는데 <경마장 가는 길> 때부터 사람들은 내 작품을 조금 어려워하더라. 그건 오랫동안 길들여진 문화의 차이일 수 있는데, 그 차이가 굉장히 불편하고 당혹스러운 것 같더라. 그래서 <마노 카비나…>도 실험적으로 만들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첫 번째부터 너무 어려우면 독자들이 시네로망 읽는 것을 두려워할까봐 실험을 억제하고 아주 쉽게 썼는데도 아들놈이 그런 말을…. (웃음) 그러나 영화가 예술이라면 형식의 실험은 중요하다. 예술은 근본적으로 다른 작품과 다르게 뭔가 자꾸 새롭게 하는 것이니까. 그래야만 예술이다. 사르트르도 “무엇을 쓸 것인가 선택했다고 해서 작가라 할 수 없다. 그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선택함으로써 비로소 작가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형식적 탐구는 예술가의 중요한 사명이다. <경마장 가는 길> 찍을 때 장선우 감독이 카메라 워킹에 대해 말해보라 그러더라. 카메라는 클로즈업, 줌인, 줌아웃 등 사람의 지각능력보다 훨씬 다양한 기능을 갖고 있다. 그런데 영화인들은 카메라의 기능의 재미에 빠져 무작위로 쓰고 있다. 그런데 현대영화는 카메라의 불필요한 기능들을 많이 쓰지 않는다. 그리고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이 인간의 지각능력에 가깝기 때문이다. 카메라가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의 현실, 진실이 얻어진다. 카메라의 기능을 너무 많이 쓰면 진실은 안 보이고, 볼거리만 보이게 된다. 엔터테인먼트가 되어버린다는 말이다. 할리우드 상업영화는 온통 현란한 테크놀로지로만 이루어져 있어 지루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테크놀로지가 모든 것을 삼킨다는 말도 나오는데….

그런데 사실 대중은 되게 심약한 것 같다. 테크놀로지에 왜 그렇게 쉽게 현혹되는지. 가령 <쥬라기 공원> 같은 것이 내게는 따분한 영화인데 그렇게 흥행을 하니 할말이 없다. 대중이 영화를 오락이나 휴식으로 받아들인다 해도 그게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다. 권태롭잖은가. 그래서 권태로움을 극복하려고 더 현란한 테크놀로지를 보일수록 난 더 따분하다. 감동이나 기쁨이 내가 원하는 방향하곤 좀 다른 것 같다. 그럴수록 인생이 권태로워진다. 머리는 텅 비어가는 것 같고. <마노 카비나…>도 사람들은 뭔가 사건이 많고 볼거리나 엔터테인먼트를 집어넣기를 원했다. 그러나 난 우리나라 영화가 스케일을 키우려 하지 말고 섬세한 디테일로 승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파리로 가기 전 이야기를 해달라. 교사생활을 하다가 떠났는데.

80년대 초 전두환 집권 초기에 3년 동안 고등학교 국어교사 생활을 했는데 현실에 대한 깊은 절망을 느꼈다. 당시 분위기는 살벌했고, 그런 속에서 미래가 안 보이는 듯한 좌절감에 빠져 있었다. 그때 떠나지 않고 계속 한국에 있었다면 십중팔구 전교조에 가입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내가 있다고 역사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해서, 83년에 파리로 떠났다. 그때 나가게 된 것은 개인적으로 천우신조였다고 생각한다. 교단에 서면서 작가로서도 일이 잘 안 되고 선생으로서도 재미를 못 느끼고 앞이 안 보이는 느낌이 들면서 독학으로 불어공부를 시작했다. 한두장씩 읽어가는데 나도 모르게 자꾸 빠져들어가더라. 그런데 나이 든 교장이 국어선생이 불어책 읽는 걸 사사건건 못마땅해했다. 나중엔 오기가 생기더라. 독학으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사전 찾아가면서 다 읽었다. 그때 내가 20대 후반이었는데 그 자리에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파리 가서 6년 동안 빨려들어가듯 앉아서 공부만 했다. 영화며 소설이며, 그때 했던 공부가 크다. 돌아왔을 때는 득도라도 한 기분이었다. 시간강사 하면서 13개월 동안 책을 4권 썼다. 원고지 매수로는 7천매 이상 분량의 글을 써댔다.

작가를 꿈꾸고 돌아온 것인가.

프랑스에 있을 때는 내가 소설가가 될 수 있으리라 믿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세계문학을 읽어보니 일괄적인 흐름이 있더라. 소위 세계명작이라는 책들이 전부 다 염세적이었다. <고도를 기다리며>나 카뮈나 사르트르 같은 누보로망, 카프카도 그렇고. 당시 나는 염세주의자가 아니고 퍽 낙천주의자이고 이상주의자라고 스스로 진단했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염세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다보니 소설을 쓰게 됐다. 내 소설을 보면 사실 모두 염세적이다. <마노 카비나…>도 사랑은 달콤한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점에서 염세적이고. 프랑스에 있을 땐 한국에 돌아가면 참한 선생님이 되겠다 했는데 와보니까 교수 되는 절차가 보통 복잡한 게 아니더라. 그래서 한 학기 시간강사 하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 방학하자마자 <경마장 가는 길>을 쓰기 시작했다. 이후로 몇 학기 동안 강사를 했지만 마음은 이미 교단을 떠났다. 10년을 전업작가로 살았는데, 혼자 오래 작업을 하니 지치더라. 그래서 덜 지치기 위해 강단에 섰다. 한 3년 됐으니 또 어떻게 될지 모르지.

작품 구상은 어떻게 하나.

원래 작품 구상을 안 한다. 일단 첫줄을 쓰고 다음 줄을 쓰고, 이렇게 쭉 따라나가다 보면. 학교에서 배울 때는 구상을 하고 인물을 설정하고 이렇게 배우는데, 그건 쓸모없는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미리 오랫동안 구상하지 않았다. 피카소가 “나는 작업을 하기 전에 구상을 하지 않는다. 작업을 함과 동시에 나의 구상은 시작된다. 그리고 작업이 끝남과 동시에 구상도 끝난다”고 했다. 그것이다. <마노 카비나…>도 리투아니아 카페에서 만난 여자의 이미지, 일종의 사랑의 고통, 그림자 같은 이미지만으로 출발했다.

영화계에서 <마노 카비나…>에 대한 이야기가 있나.

아직 기다리고 있다. 인연이 돼서 좋은 작품이 나오면 두 번째, 세 번째 작품까지 영화화할 수 있는 힘을 받겠지. 3편까지 쓸 생각이고, 조금씩 더 실험적인 형식으로 갈 것이다. 글 위정훈 oscarl@hani.co.kr·사진 이혜정 hyeju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