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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얼 래드클리프] <혼스>
송경원 2014-11-25

대니얼 래드클리프

<왓 이프>

배우를 잡아먹는 배역이 있다. 좀처럼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강렬한 존재감은 종종 현실로 넘어와 배우를 압도하기도 한다. 해리 포터는 그런 의미에서 손에 꼽을 만한 캐릭터 중 하나다. “해리 포터가 책에서 빠져나와 그대로 걸어 들어오는 것 같았다”는 조앤 K. 롤링의 한마디로 소년은 해리 포터가 되었다. 똘망똘망한 눈에 큰 안경, 해맑은 미소의 소년 대니얼 래드클리프는 “독자들의 상상력을 완벽히 구현하며” 현실영역에서 말 그대로 ‘되살아난’ 것이다. 해리 포터는 대니얼 래드클리프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이자 축복이었지만 동시에 넘어야 할 산이기도 했다. 많은 배우들이 거대한 배역을 맡은 이후 좌절한다. 때론 이를 극복하며 새롭게 거듭나기도 한다. 배우로서 단단해진다는 건 그런 담금질의 과정을 거쳤다는 의미다. 하지만 대니얼 래드클리프의 경우 여느 배우들과 달리 애초에 이 위대한 배역과 싸워볼 기회조차 가지지 못했다. 그는 처음부터 해리 포터로 태어났고 이후 배우로 자각하기 시작한 뒤에야 자신이 얼마나 거대한 존재 속에 갇혀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의외일지 몰라도 사람들은 위기와 고난이 닥치면 대체로 이를 극복해낸다. 그 사람의 본질을 파악하고 싶다면 그가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는지가 아니라 그가 성공한 이후에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우리를 망치는 건 항상 우리가 싫어하는 것들이 아니라 우리를 취하게 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해리 포터>의 성공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거대한 유혹이었다. 시리즈 네 번째 영화인 <해리 포터와 불의 잔>을 찍을 무렵부터 대니얼 래드클리프는 이미 영국에서 가장 부유한 10대 중 한명이 되었다. 경제 전문지 <포브스>에 따르면 시리즈가 끝날 무렵인 2010년에는 수익률이 가장 높은 배우로 꼽히기도 했다. 배우로서 혹은 스타로서 이룰 수 있는 성공의 대부분을 그는 단 한편의 시리즈를 통해 이뤄냈다. 정상에 올라선 이후 세상이 어떤 풍경으로 보일 것인가. 대니얼 래드클리프의 진짜 도전은 정점에 선 그때부터였다. “사람들은 내가 스타랍시고 막사는 걸 보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그거야말로 내가 절대로 보여주지 않겠다고 결심한 모습이다.”

래드클리프의 부모는 아들이 또래 소년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학교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연달아 개봉했던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과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 이후 2년의 공백은 래드클리프가 학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이 시기 소년은 해리 포터가 아닌 대니얼 래드클리프로서 자신의 진로를 결정했다. 해리 포터는 그의 운명이었지만 이후의 연기는 선택이었다. 그는 해리 포터라는 배역이 아니라 진짜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고 그 뒤로 한번도 자신의 걸음을 배신하지 않았다. “연기와 글쓰기가 나의 길임을 안 이상 대학 공부는 별 의미가 없다”며 진학을 포기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역할의 화려한 성공과는 별개로 배우 래드클리프는 한창 성장 중인 배우로서 존경받아 마땅한 행보를 걷는다. 연기자 대니얼 래드클리프에게 해리 포터의 후광은 막막한 장벽이 아닌 좋은 토양이 될 수 있었고, 그는 이를 활용할 수 있을 만큼 영리했다.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이 개봉한 2007년 전후 그는 드디어 해리 포터와 대니얼 래드클리프라는 배우를 분리하려는 욕망을 본격적으로 드러냈다. <에쿠우스>(2007)는 이를 위한 일종의 선언과도 같았다. 전라의 누드 연기를 펼치며 열연했던 이 배역에 대해 해리 포터의 팬들은 격렬한 항의와 불쾌감을 표시했다. 하지만 “누드 연기는 특별한 감정을 드러내는 여타 연기와 다를 바 없다. 이 배역에 꼭 필요한 장면”이라며 연극을 감행했고 평단과 대중의 고른 지지를 받으며 배우로서 출발을 각인시켰다. <에쿠우스>가 그저 파격의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은 건 이후 이어진 <해리 포터> 시리즈의 완결판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에서 해리 포터의 캐릭터가 무너지기는커녕 더욱 깊어졌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는 해리포터를 하나의 캐릭터로 남겨둔 채 자신을 이 위대한 역할로부터 본격적으로 분리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직업 연기자 대니얼 래드클리프가 탄생한 순간이기도 하다. 사실 연극에 대한 래드클리프의 열정은 거의 그가 <해리 포터> 시리즈를 시작할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 번째 시리즈 <비밀의 방>이 개봉했던 2002년 래드클리프는 케네스 브래너의 연출작 <내가 쓴 연극>에 출연했다. <비밀의 방>에서 록허드 교수 역을 맡은 브래너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깜짝 게스트에 가까운 배역이었지만 이 경험은 해리 포터라는 가면 뒤에 가려진 소년에게 연기에 대한 열망을 심어주었다. 설사 앞으로 해리 포터만큼 위대한 역할을 다시 맡는 게 어려울지라도 연기에 대한 래드클리프의 성실하고 금욕적이기까지 한 태도는 앞으로 그가 어떤 배우로 성장해나갈지 기대를 자극하는 측면이 있다.

최근 대니얼 래드클리프의 선택에는 늘 파격, 변신이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여전히 지울 수 없는 해리 포터의 그림자를 기준으로 보자면 의외의 선택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래드클리프의 개인적 취향을 고려하면 그리 이채로울 것도 없는 당연한 선택이다. 독서광으로 알려진 그는 문학, 특히 러시아 문학에 심취해 있다. 특히 미하일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그가 늘 추천하는 책 중 하나인데, 아마도 그는 마르가리타처럼 기괴하고 복잡하면서도 강인한 내면을 지닌 캐릭터에 흠뻑 빠져 있는 듯하다. <킬 유어 달링>의 천재 시인 앨런 긴즈버그, <왓 이프>의 소심한 순정남 월레스, 점점 악마로 변해가는 <혼스>의 이그 페리쉬까지, ‘포스트 해리 포터’로서 그가 선택한 인물들은 전부 그와 유사한 캐릭터의 연장선에 있다. 천재 시인은 외로움에 몸부림친 끝에 숨겨왔던 정체성을 깨닫고, 소심남은 간절함으로 사랑을 향한 용기 있는 한발을 내디디며, 뿔이 달린 악마는 사람들의 욕망과 진심을 마주하며 상처받으면서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들 캐릭터는 여느 장르영화처럼 기능적으로 소모되는 캐릭터가 아니다. 환상과 비논리가 뒤섞인 문학적 감수성이 돋보이는, 자신의 취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페르소나들이다.

해리 포터의 껍질을 벗은 래드클리프는, 빈말로도 그는 스스로 빛나며 관객을 압도하는 배우는 아니다. 적어도 아직까진 그만한 카리스마를 뿜어내지 않는다. 그러나 배역을 온전히 이해하고 성실히 해석해나간다는 면에서 그는 좀처럼 실수하지 않는 배우다. 올해 개봉한 세편의 영화에서도 이러한 성실한 연기는 여실히 드러난다. 파격적 변신이 파격으로 보이지 않는 까닭은 그것이 이미지의 탈피를 위해서가 아니라 배우로서 한 걸음씩 차분히 쌓아나가는 과정임을 알기 때문이다. 가령 <킬 유어 달링>에서 천재 시인 앨런 긴즈버그 역을 맡은 래드클리프는 이 배역을 폭발시키는 대신 루시엔 역의 데인 드한과의 화학반응에 주력한다. 해리 포터의 화려한 빛에 가려 쉽게 포착하긴 힘들지만 그는 언제나 상대의 매력을 받쳐주는 쪽에 가까운 배우였다. 그 밑바탕에는 캐릭터에 대한 성실한 해석과 안정감이 자리한다.

아마도 이토록 깊고 차분하게 캐릭터를 해석해나가는 데는 10년 넘게 한 캐릭터를 파고들어간 경험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자연인 대니얼 래드클리프의 타고난 성격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연기를 마치면 학교에 가고 여느 친구들처럼 평범한 일들을 한다”는 그의 ‘보통 사람’ 선언은 프랜차이즈 스타의 아우라를 벗기기 위한 변명이 아니라 직업 연기자로서 이 일에 임하는 태도에 관한 고백이다. 배우 대니얼 래드클리프의 행보는 파격적이지 않다. 그는 단번에 해리 포터의 그림자를 지워낼 무모한 도박을 하지 않는다. 현재 그는 자신을 투영한 배역을 신중히 선택하며 마스크를 하나씩 늘려나가는 중이다. 그리고 언젠가 대니얼 래드클리프 라는 이름의 수납장이 수많은 가면으로 가득 채워질 때쯤이면 ‘해리 포터’라는 이름의 가면은 단지 조금 크고 특별했던 가면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magic hour

래퍼, 래드클리프

대니얼 래드클리프가 심취한 것 세 가지. 연기, 문학, 그리고 음악이다. 그중 언더그라운드와 록, 랩 음악의 광팬으로 유명하다. 수준급의 베이스 연주 실력을 갖추고 있고 언젠가는 밴드를 결성하는 게 꿈이라고 여러 차례 밝혀왔다. 좋아하는 뮤지션을 말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뮤지션은 바로 에미넴. 본인의 랩 실력 역시 출중하다. 지난 10월28일 미국 <NBC 투나이트 쇼>에 출연해 열창한 블랙칼리셔스의 <알파벳 에어로빅스>는 압권. 이토록 정확한 플로와 성실한 라임이라니! 꼭 한번 들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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