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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웅의 일상어 사전] 사랑하니까 헤어지자
권혁웅(시인) 2014-11-28

[ 사랑하니까 헤어지자 ]

겉뜻 이별을 통해 사랑을 증거함 속뜻 이별을 통해 사랑을 쟁취함

주석 연인에게 건넬 수 있는 최고의 ‘개드립’은 단연 이 말일 것이다. “사랑하니까, 우리 헤어져.” 이 말보다 더한 말은 있을 수가 없다. 그땐 이미 헤어진 다음일 테니까. “사랑하는데 왜 헤어져?”라고 반문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이게 다 널 사랑해서야”라는 동어반복밖에 들을 게 없을 것이다. 부모들이 하는 훈계하고 비슷하지 않은가? 이게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 부모가 원하는 대로 하면 나는 좋지 않은데(=잘되지 않는데), 부모님은 왜 내가 잘되는 일이라고 우기는 걸까?

“너 잘되라고”는 일종의 명령문이다. ‘내가 명하는 대로 하면 너는 잘될 것이다’의 준말이다. ‘잘되다’의 주어가 사실은 자식이 아니라 부모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랑하니까 헤어져”는 ‘내가 사랑하니까 우리 헤어져’의 준말인데, 이번에는 주어가 아니라 목적어가 빠져 있다. 저 말을 온전한 문장으로 적으면 이렇게 된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니까 나는 너와는 헤어질 거야.’ 목적어를 내세울 수 없으니 동어반복을 할 수밖에.

사랑하니까 헤어지자고 하는 연인은 게으른 남편을 닮았다. 여보, 리모컨 좀 갖다줘. 여보, 재떨이 어딨지? 아빠는 왜 자꾸 엄마만 시켜? 아이가 항의하면 아빠는 대답한다. 이게 다 엄마를 사랑해서야. 이때의 “사랑해”는 어디든 갖다 붙일 수 있는 가짜 만병통치약이다. 사랑해서 채찍질을 할 수도 있고 사랑해서 이상한 걸 먹일 수도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사자들이 동의할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엄마가 리모컨이나 재떨이를 챙기면서 과연 좋아했을까?

이별을 통보받은 연인이 그래도 수긍하지 않으면 이런 말이 이어진다. “나는 부족한 사람이야. 더 좋은 사람을 만나.” 자기와 상대를 저울에 올려놓고 쟀다는 얘기다. 그는 근수로 상대를 평가했다. “널 구속하고 싶지 않아. 욕심 부리지 않고 널 놓아줄게.” 그동안 상대를 우리에 가둬놓고 키웠다는 말이다. 이제는 방목하겠다는 거다. 만에 하나, 다시 찾아올 수도 있다는 보험까지 들어두고. “널 오래 기억할게.” 상대를 내 컬렉션에 추가하겠다는 뜻이다. 이렇게 해서 삼차원의 사람이 이차원의 감옥에 갇힌다. 상대는 비교되고 추방되고 정리된다.

용례 전임 대통령이 BBK를 자신이 설립했다고 발언한 동영상을 두고 논란이 되었을 때, 대변인도 비슷한 말을 했다. “주어가 없다”고. 강변하는 그이에게서 사랑하니까 헤어지자고 통보하는 연인의 모습이 얼핏 스쳐 지나갔다. 주지하다시피 그이의 말에는 목적어도 빠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