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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애들 보는 영화
김혜리 2014-12-04

< Shipbreaking#11 >(2000). ⓒEdward Burtynsky

<철의 꿈>은 울산 조선소와 제철소의 풍경을 중심으로 몇 갈래의 이야기를 시도한다. 산업화 이전의 신적인 존재였던 동해의 고래, 노동운동사, 감독의 끝난 연애가 연결된다. 그러나 모든 서사적 구성을 압도하는 영화의 동력은, 거대 기계의 스펙터클에 대한 카메라의 감출 수 없는 매혹이다. 노동의 이미지인지 자본의 이미지인지 규정할 수 없는 장관은 하릴없이 아름답다. 왜 아니겠는가. 그것은 자체로 완결돼 있고 합목적적이며 무엇보다 스스로의 아름다움에 무관심하다. 산업이 자연에 강제한 변모를 비판적으로 촬영한 사진가 에드워드 버틴스키의 작품에서도 이 역설적 아름다움은 주제와 긴장을 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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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극장에서 영화를 본 일은 손에 꼽는다. 가정용 VHS 플레이어가 한창 보급된 시절에 유년기를 보내서인지 80년대 이전 영화는 대개 안방에서 TV나 비디오로 처음 보았다. 덕분에 관람 등급에 대한 감이 희박하고- <써스페리아>를 열살에 아무 제재 없이 봤다- 남들처럼 언니 오빠들 영화를 슬쩍 구경하려다가 영화관 입구에서 덜미를 잡힌 무용담도 없다. 역으로 <킹콩>과 <신밧드와 호랑이의 눈>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한 까닭은, 제시카 랭의 미모나 레이 해리하우젠의 천재성에 앞서 내가 그 영화들을 드물게도 극장에서 관람해서다. 큰 감명을 받고도 왜 부모님에게 영화관에 자주 데려가 달라고 조르지 않았을까 돌아보면, 극장에서 영화 보는 일은 내게 매우 압도적인 체험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규칙적 일상의 일부가 되어선 결코 안 될 특별한 의식처럼 여겨졌다. 모든 것이 지나치게 거대하고 강렬하고 성스러웠다. 나는 소심한 편이었고 감당 못할 선은 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부모에게 뭔가를 조르는 또래를 볼 때마다 내심 어린이의 수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럭저럭 어영부영, 극장영화에 훈련된 어린이 관객의 반응은 내게 다소간 미지의 영역으로 남게 됐다. 멀티플렉스가 가족이 공동의 여가를 보내는 보편적 장소로 정착하고 주니어 관객이 볼 수 있는 영화의 편수도 부쩍 늘어난 최근 나는 전체 관람가, 12세 이상 관람가 영화를 보는 동안 강박적으로 상상력을 가동하게 되었다. 나는 감지하지 못하지만 아이들은 알아보는 재미와 의미가 숨어 있을지도 몰라. 동그라미를 그리려는 영화에 꼭짓점이 없다는 지적만 하는 평이 헛발질이라는 의견에 수긍하는 맥락에서, 나는 한편의 상업영화가 구상 단계부터 염두에 둔 타깃 관객한테 어떻게 보이고 들리는지 궁금하다. 비록 그것이 가장 정확한 영화의 해석은 아닐지라도. 다음은 라이카 스튜디오의 스톱모션애니메이션 <박스트롤>을 보며 추측해본, 어린이 관객의 단추를 누를 만한 대목이다. 우선 기본 메뉴로서 (어른들은 멀뚱멀뚱하는 동안) 아이들은 어김없이 자지러지는 ‘까꿍놀이’가 등장한다. 둘째로 <박스트롤>은 깔끔한 엄마들이 “우엑” 신음하며 팔뚝을 긁어댈 만한 징그럽고 지저분한 묘사를 망설이지 않는다. 주인공 소년 에그를 포함한 박스트롤들은 지나가는 딱정벌레를 초코볼처럼 집어먹고, 톱을 독주악기 삼아 소음과 협연한다. 한편 악당 스내처는 유제품 알레르기가 있는데 치즈를 먹고 프란시스 베이컨의 인물화처럼 부풀고 일그러진 그의 흉한 얼굴은 스크린에 꽤 길게 클로즈업된다. 설상가상으로 알레르기의 응급치료법은, 거머리로 피 빨아내기다. 박스트롤이 인간을 먹는다고 오해한 소녀 위니프레드는 “자, 날 먹어! 연하고 맛있을 거야!”라고 외치기까지 한다.

개인의 성격에 따라 차이가 있을 테지만, 예절에 길든 어른들이 유연하게 피해가는 방귀와 배설물 유머에 꼬마들이 솔직하게 열광하는 경향을 떠올리면 ‘무섭고 징그러운’ <박스트롤>은 부모의 걱정보다 훨씬 어린이의 취향에 적합할 영화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해리 포터> 시리즈와 <강아지 똥>이 좋은 예다. 브루노 베텔하임이 <옛이야기의 매력>에서 썼듯이, 보호자들은 어린이들에게 세계의 사악하고 불건강한 부분을 숨기려 하지만 아이들은 직관적으로 현실이 그렇지 않음을 안다. 다시 말해, 동화와 영화에 몰두하는 동안 픽션의 내용을 ‘사실’과 혼동하지는 않지만(어른의 기우가 집중되는 대목이다) 진실일 수는 있음을 직감한다. 어떻게 아냐고? 당신의 어린 날을 잠시만 돌아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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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카 스튜디오의 <코렐라인: 비밀의 문>과 <박스트롤>에 등장하는 부모는 나쁜 엄마, 아빠는 아니다. 자식들에 대한 그들의 사랑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그들의 부덕은 코렐라인이, 위니프레드가 말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의사소통 면에서는 종과 모국어가 다른데도 찰떡같이 말을 알아듣는 에그와 박스트롤이 훨씬 괜찮은 가족으로 보인다. 현실의 어린 관객도 비슷하지 않을까? 부모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점은 숙지하고 있지만, 엄마와 아빠는 내 이야기를 고개만 끄덕이며 귓등으로 듣는다고 느끼지 않을까? 부모와 어른들은 아이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왜 가치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들을 손에 넣기 위해 언제나 바쁘다. 집에 늦게 들어오고 서로 다투기도 한다. <박스트롤>의 빨간 모자 악당 스내처를 움직이는 동기가 완벽하게 공허하다는 점이 그래서 눈길을 끈다. 스내처가 박스트롤족을 공공의 적으로 몰아 박해하는 이유는 도시 치즈브리지의 유력자가 되기 위해서다. 영향력 생기면 뭐가 좋은데? 하얀 모자를 쓸 수 있다. 하얀 모자를 얻으면 어떤 혜택이 있기에? 치즈 파티에 초대받게 된다. 치즈 파티는 왜 중요한가? 스내처가 초대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모든 파괴와 고통의 시발은 멤버십 온리 클럽에 가입하려는 욕구다. 결정적으로 스내처는 치즈를 전혀 즐기지 못하는 유제품 알레르기 환자다. 사다리 꼭대기에서 무엇을 얻느냐보다, 상승한다는 사실 자체가 더 중요한 것이다. <박스트롤>의 성인 관객이 20세기 초 독일 표현주의풍의 디자인을 감상하고 ‘인종청소’ 내러티브를 통해 1930년대 유대인 게토의 비극적 역사를 곱씹는 동안, 어린 관객은 평소 부조리하다고 여겼던 ‘이상한 어른들’과 똘똘하게 맞서는 에그와 위니프레드에게 몰입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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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꿈이 없었다”고 1997년 <비트>의 민이(정우성)는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2014년 한국 청년영화의 주인공들이 민이와 마주친다면 당신은 상당히 꿈이 많은 편이라고 고개를 저을 것이다. <셔틀콕> <10분> <한공주> <도희야> 그리고 이제 도착한 <거인>은, ‘청춘영화’라는 꽃다운 범용 카테고리와 숫제 어울리지 않는다. 2014년 스크린의 한국 젊은이들은 연애의 실패나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힘들어할 여력이 없다. 타협으로 오염된 세상과 섞일 수 없는 순백의 영혼이라 번민하는 모습도 아니다. 자아를 탐색하는 여정이나 기성세대와 투쟁해 더 나은 세계를 건설하겠다는 저항 의지는 이 영화들의 세계에 끼어들기에 너무 목가적으로 보인다. 대신 들어선 강력한 드라이브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위기감이다. 돈을 벌어야 하고 가진 자의 눈에 들어야 한다. 그것이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고 인간적 품위를 보호하는 유일한 길이다. 한때 있었던 다른 길은 죄다 산사태로 막힌 것처럼 보인다. 2004년 노동석 감독의 <마이 제너레이션>이 카드깡을 언급했을 때만 해도 ‘서늘한 현실인식’이라고 특별 언급됐던 내용은 이제 청년영화의 기본이 된 인상이다. 2014년의 아이들은 각목으로 교무실 유리창을 깨는 대신 입을 다물고 계산대에서 바코드를 스캔한다. 때로는 더 약한 친구와 동료를 외면하기도 한다. 그들도 슬프지만, 불가피하다고 느낀다. 보아하니 이번 생에서 어차피 깨끗하게 남을 순 없을 테니까. <거인>에서 어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영재에게 누군가가 “비전이 있다”고 말했을 때 나는 움찔했다. 그리고 움찔한 내가 물색없게 느껴져 누군지도 모를 상대에게 미안해졌다.

<헝거게임:모킹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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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스타일리스트

<헝거게임>에서 12구역 담당 수행인 에피 트링켓(엘리자베스 뱅크스)은 쇼와 패션에 목숨을 건 엔터테이너로 등장했다. 죽으러 가는 아이들을 추첨한다는 현실에 눈감고 완전무결한 축제의 진행에 몰두하던 그녀는 캣니스(제니퍼 로렌스)를 만나 서서히 변모한다. 그러나 정파가 뭐든 예뻐야 장땡이라는 신조를 고수하는 점이 캐릭터의 매력 포인트다. <모킹제이>에 이르러 금욕 정신 투철한 13구역 시민이 된 그녀는 단벌 회색 유니폼에 갇히는 수난을 맞지만, 그렇다고 깃 빠진 공작새 몰골로 주저앉을 에피가 아니다. 맵시 있게 묶은 두건으로 헤어 스타일링을 대신하고 허리띠로 펑퍼짐한 제복에 실루엣을 내고 부족한 화장품은 포인트 메이크업으로 소화한다. 옷장이 궁해지니 진정한 ‘간지’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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