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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전영객잔] 이생을, 잘 살아낸다는 것

이창재 감독의 <목숨>이 과장 없이 슬픔을 쌓아가는 방법은

<목숨>

이창재 감독의 <목숨>은 호스피스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들의 최후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감독은 환자들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으면서 그들의 죽음을 착취하지 않으려 애쓴다. 누군가의 죽음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의 주변 사람들로부터 격한 반응을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그런 죽음들 앞에서 우리가 보통 슬픈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리듯 카타르시스를 느껴도 되는 것인지 질문하게 만든다. 누군가의 죽음을 앞두고 그의 가족이나 지인들이 슬퍼하는 것은 당연하다. 관객 입장은 좀 다르다. 기껏해야 1시간30여분 동안 누군가의 최후 일상을 들여다본 처지에 그 죽음을 스펙터클로 소비하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마음을 다잡게 된다. 눈물이 흐르는데도 그런 감정이 든다. 나는 이게 이 다큐멘터리의 중요한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목숨>에는 말기 암에 걸린 세 사람이 나온다. 남편이 부도를 맞는 바람에 오랜 기간을 가난과 싸우면서 가정을 건사하기 위해 노력했던 56살 김정자씨는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고 새집으로 이사한 지 한달 후 담도암 말기 판정을 받아 죽음을 기다린다. 그녀는 이제 청년으로 성장한 두 아들에게 더 많은 것을 해주지 못한 걸 안타까워하지만 육체적 고통을 견디기 힘들어 빨리 저세상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박수명씨는 아직 젊은 45살이지만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호스피스에 있다. 그의 아이들은 아직 어리다. 열일곱살에 어머니를 잃은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실감할 수 없었던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들이 자신을 데면데면 대하는 걸 마음 아파한다. 그는 자신이 어머니의 죽음 후 뒤늦게 느꼈던 상실감을 아들이 훗날 겪게 될 상황이 두렵다. 아들에 비하면 철이 든 딸과 남편을 친구이자 동지처럼 여기는 아내는 비교적 의연하게 그의 병세를 받아들이지만 그녀들이 그의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박수명씨는 또 그게 괴롭다. 수학교사였던 75살의 박진우씨는 말기 췌장암을 앓고 있으며 어서 빨리 죽기를 스스로 바라고 있다. 육체적 고통이 힘들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 밖에 한명의 환자를 더 소개한다. 후두암을 앓고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된 뒤 몇 차례 자살 시도를 하고 사회복지사의 의뢰로 호스피스에 들어온 신창열씨다. 육체적 불치병에 걸린 게아니라 마음의 불치병에 걸렸던 그는 호스피스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의 배려를 받아들이면서 그 자신이 남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진화하고 그의 병세는 놀랍게 호전된다. 신창열씨를 비롯해 박진우씨에게도 친구가 되어주는 이는 신부 수업을 받다 진로에 회의를 느껴 호스피스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정민영 스테파노이다. 그는 죽음을 남들보다 빨리 받아들여야 하는 그들의 곁에서언제나 친구로 있어준다. 정민영 스테파노와 달리 이 병원의 원장의사는 조금 더 냉정한 친구이다. 곧 죽어야 하는 환자들에게 담당 원장의사의 충고는 의외로 단순하다. 그는 모든 사람이 누구나 죽는 것이라고 말한다. 먼저 죽고 나중에 죽는 차이가 있을뿐 누구나 죽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환자들은 원장의사의 말을 받아들였다가 받아들이지 못했다가 한다. 그들은 육체적 고통 때문에 차라리 더 빨리 죽고 싶어 하지만 곁에서 자신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 가족 때문에 더 살고 싶어 한다. 육체적 고통보다 그들이 견디기 힘든 것은 그들 뒤에 남아 있는 사람들과의 이별이다. 그들은 가족 때문에 다시 살고자 하고 그럼 그들의 일상은 지옥으로 변한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운명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박수명씨가 하루라도 더 있어달라는 아내의 간청을 받아들여 항암치료를 포기하지 않을 때 그와 아내와 가족은 그만큼 더 힘든 시간을 견뎌야 한다.

<목숨>은 김정자씨의 임종 장면을 초반부에 배치해놓았다. 김정자씨는 너무 고통이 심해 가족에 대한 상실감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죽음을 바란다. 화면에 담긴 심적 고통은 그녀 자신보다 그녀의 가족이 더 심하다. 그녀의 남편과 아들들은 고생만 하고 세상을 떠나는 그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통곡한다. 관객인 나도 줄줄 흐르는 눈물을 어쩌지 못했는데 그녀의 죽음은 그녀의 개별적인 죽음으로 충분히 애통할 뿐만 아니라 내 주변의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기억과도 겹쳐서 그 애통함이 배가됐기 때문이다. 김정자씨는 누구보다 가족을 사랑했겠지만 감독 이창재는 그녀가 생전에 저세상을 동경하며 남긴 목소리를 그녀의 임종 후에 화면에 깔아 그녀의 죽음에 위로를 보낸다. 그다음, 이제 우리가 관찰하는 이들은 아직 살아 있는 영화의 주인공들이다. 박진우씨는 의사의 만류만 없으면 술도 더 마시고 싶어 하고 자신이 살던 동네에 가서 짜장면도 먹을 만큼 살아 있는 동안 쾌락의 감각을 느끼고 싶어 한다. 일상의 대부분을 고통으로 살아가면서 잠시 진통제의 힘으로 고통을 잊는 동안 그는 맛난 것이나 즐거운 것을 찾고 그 나머지 시간은 죽음을 염원하며 기다린다. 그런 그에게 의사는 죽음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죽음에 심각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피할 수 없는 것이니 받아들이라고. 박진우씨는 의사의 말을 받아들이려고 애쓴다. 정민영 스테파노와 나이를 초월한 우정을 나누고 아내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면서 그는 죽음 자체를 편안하게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박수명씨의 입장은 또 다르다. 그 역시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려 하지만 남아 있는 가족의 미련은 그런 그의 마음을 흔들리게 한다. 아내와 오랫동안 티격태격 싸우며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던 그는 자신의 배에서 복수가 차서 줄줄 흐르는 상황에서 지극정성으로 자신을 간호하는 아내를 보며 아내의 사랑을 확인하고 그럴수록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 커진다. 항암치료에 대한 미련을 끊지 못하는 박수명씨와 아내에게 호스피스 원장은 냉정한 진단을 내리고 충고한다. 항암치료를 해도 복수가 차는 걸 멈추게 할 수 없고 항암치료를 하지 않아도 복수는 계속 차서 넘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 장면 끝에서 박수명씨 부부는 담담하게 웃음을 띠고 있지만 카메라가 병실 문을 나와 바깥에서 기다릴 때 흘러나오는 박수명씨 아내의 통곡 소리는 그들이 아직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걸 알려준다. 그들은 이별하기엔 너무 젊고 아버지로서의 박수명씨는 아직 그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죽음 자체보다 죽음에 따르는 이별을 감당하기 힘든 것이 죽음의 비극이라는 걸, 곧 죽게 될 사람이 살아 있을 때 그보다 더 오래 살 사람들이 애도를 준비하는 것이 너무 큰 고통이라는 걸 이 다큐멘터리는 보여준다. 어떤 형태의 죽음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섣불리 애도할 수 없으며 그건 누구에게나 끔찍한 경험이라는 걸, 그렇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경험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아직 죽지도 못한 주제에 건방지게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를 얘기할 수는 없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죽음을 곧잘 상상하지만 그 상상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상상해봐야 소용없다. <목숨>은 죽음에의 고통이 당사자의 육체적 고통에 국한된 게 아님을 보여준다. 죽음은 내가 관계 맺고 있는 모든 것과 관계가 끊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관계의 끈을 끊고 우주의 미아 상태가 되는 것 같은 어둠 속의 고독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상상하는 것은 괴롭다. <목숨>은 그런 기시감을 조금씩 불러일으키며 영화 속 당사자들의 심정을 느끼게 만든다.

그 과정에서 환자는 아니지만 영화의 또 다른 중심으로 떠오르는 이는 젊은 청년 정민영 스테파노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는 대학생으로 자신이 신부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번민하다가 이곳에 와서 봉사활동을 한다. 그는 섣불리 결론내리지 않으며 환자들의 고통을 옆에서 지켜보고 그들의 놀이 벗이 되어준다. 무뚝뚝하고 짜증만 냈던 후두암 환자 신창열씨는 정민영 스테파노와 놀면서 조금씩 웃음을 찾는다. 그는 청소하다가 주운 1만원으로 과자를 사와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그가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은 정민영 스테파노에게 거듭 뭔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계속 받을 수 있었기에 그는 다른 이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정민영 스테파노는 박진우씨에게도 더할 나위 없는 친구다. 처음엔 거칠게 그를 막 대했던 박진우씨도 조금씩 이 청년을 친구로 받아들인다. 친구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를 존중하는 마음을 내비친다. 정민영 스테파노는 마법사이다. 영화 중반에 정민영 스테파노가 주관해 환자들과 의사에게 마술을 가르치는 에피소드는 그런 맥락으로 리얼리티에서 멋지게 건져올린 메타포이다. 그가 가르쳐준 마술을 환자들이 시연할 때 옆에서 즐거워하며 박수를 치는 정민영 스테파노가 실은 그곳의 진정한 마술사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부린 마법에 대해 겸손해한다.

박진우씨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곁에서 담담하게 눈물을 훔친 정민영 스테파노는 어디론가 여행을 떠난다. 호스피스에서의 봉사활동보다 더 힘들게 몸과 마음이 다 지치는 여행을 하고 싶다는 그에게 호스피스 병원에서 일하는 수녀님들과 일꾼들이 따뜻하게 환송을 한다. 영화 속 환자들의 임종 장면만큼이나 이 장면은 가슴을 뜨겁게 만든다. 영화 속의 죽음이 초래하는 이별도 이별이고 이렇게 정민영 스테파노가 떠나는 여행으로 인해 맞게 되는 이별도 이별이다. 그 두 이별이 동등한 무게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이 장면에서도 나는 울었다. 우리는 늘 만나고 이별한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별에서도 우리는 작은 상실감을 느끼고 슬퍼하지만 그가 어디론가 떠나는 게 종말은 아니라는 것 때문에 서로 격려한다. 영화 속의 그들은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함께 지냈던 시간들을 좋은 경험으로 간직한다. 정민영 스테파노는 말한다. 한때 세상을 두려워했지만 이곳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따뜻하고 좋은 사람들이다, 이곳 말고 바깥에도 이 사람들만큼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며 나가서 여행을 떠나 그런 좋은 사람들을 만나보겠다고 그는 말한다. 굳이 힘줘 화면에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정민영 스테파노가 호스피스 사람들과 이별하며 취하는 자세는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들과 그의 가족, 지인들이 겪는 아픔의 동전의 양면 같은, 또는 거울 같은 모습이라고 느꼈다.

<목숨>의 후반부는 대다수 영화가 그런 것처럼 클라이맥스의 극적 문맥을 만들지 않는다. 영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슬픔을 자아내는 상황을 편집에서 걷어내고 먼저 떠날 사람과 나중에 떠날 사람들이 곧 다가올 이별을 준비하는 순간을 담는다. 영화 후반부에 남게 되는 박수명씨 가족의 에피소드에서 박수명씨의 임종 장면은 담기지 않는다. 그는 항암치료를 받으러 대학병원에 입원했다가 다시 호스피스로 돌아온다. 그는 곧 죽을 것이다. 그렇지만 화면 속에서 그는 아직 살아 있다. 화면 속에서 아직 살아 있는 그는 가족과 기념촬영을 한다. 영화 초반의 김정자씨 가족이 그랬듯이 그도 아주 행복한 순간을 연출하면서 곱게 단장을 하고 가족사진을 찍는다. 김정자씨의 임종 장면에서 가족들은 무너져내렸다. 아마도 박수명씨의 임종 장면에서도 그보다 더한 장면이 연출됐을 것이다. 이창재 감독은 거기서 영화의 전개를 멈춘다. 이별을 준비하는 자세, 이별을 맞이할 그들의 얼마 남지 않은 행복한 시간들, 거기서 화면을 멈춘다. 관객인 우리는 터져나올 것 같은 울음을 느끼지만 역시 참기로 한다. 그건 이별을 준비하는 자세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장면, 신중하게 극적 감정이 고조되는 순간들을 걷어내고 다정한 친구처럼 카메라로 지켜보는 이창재 감독의 태도를 존중한다. 우리는 이별을 준비할 수 있을 뿐이다. 지금 이 순간을 잘 느끼고 살아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근 곧잘 죽음을 생각했다. <목숨>은 내가 읽은 죽음에 관한 몇권의 책보다 깊은 인상을 줬다. 더 많은 관객과 만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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