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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내가 그릴 구름 그림은
김혜리 2014-12-25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는 순간순간 예측하기 어렵지만 크게 보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소녀와 중년 여성의 러브 스토리에서 어린 유혹자 역할로 스타덤에 올랐던 배우 마리아(줄리엣 비노쉬)는, 20년이 흐른 이제 버림받은 상대 여성을 연기하게 됐다. 연습 중인 마리아는 구름의 움직임을 바라보기 위해 거듭 언덕에 오른다. 거기 해답이라도 있는 것처럼. 많은 화가들도 일찍이 그랬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반 고흐의 <올리브 나무>,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드레스덴 인근의 큰 목초지>, 조반니 도메니코 티에폴로의 <헤라클레스의 숭배>, 콘스터블의 <봄 구름 습작>(모두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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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힘”이라는 표현을, 이해하지만 좋아하지는 못했다. 해결해야 하고, 해결할 수 있는 외재하는 문제들을 내 노력이 부족한 탓으로 돌려 동일한 문제의 영향권에 있는 다른 사람들까지 오로지 긍정의 힘에만 의존해야 하는 고역을 재생산하는 폐해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호스피스 다큐멘터리 <목숨>이 90분에 다가갈 즈음 한 시한부 환자가 문득 말한다. “평생 건강했더라면 깨닫지 못했을 것들을 지금 깨달으면서 나한테서 큰 것을 뺏어갔지만 그에 못지 않은 큰 걸 주셨구나(해요). 가장 행복한 시간을 꼽으라면 지금인 것 같아요. 진심으로 사랑을 하고, 진심으로 대하고.” 지금 그는 긍정의 힘을 보태기 위해 먹구름의 밝은 테두리라도 찾아내려고 억지로 애쓰는 중인가? 아니었다. 환자는 여명(餘命)임을 인지한 여명의 시간이 갖는 가치에 대해 진심으로 인정하고 있을 뿐이며, 90여분 동안 호스피스 풍경을 지켜본 내 귀에도 그의 말은 거짓위안으로 들리지 않았다.

죽음은 불운이 아니라 필연이다. 다가오는 죽음을 육안으로 보기 전까지 나와 무관한 것으로 믿는 착각이 만연해 있을 뿐이다. 죽음이 불가피하므로 죽음과 관련된 우리의 요행과 불운은 “어떻게 죽느냐”의 문제로 좁혀진다. <목숨>이 다루는 죽음의 종류는 지속적인 육체의 엄청난 통증이 수반된 예고된 죽음이다(<목숨>의 이창재 감독에 따르면 산고의 강도가 7이라면, 호스피스 환자들의 통증은 9라고 한다). 앞서 인용한 환자의 부인도, 암으로 인한 시한부 생명 선고의 긍정적인 점으로, 시간을 말한다. 그것은 생각할 시간이고 생각함으로써 죽음을 사태가 아닌 나의 것으로 만들어 주체로서 맞이할 수 있는 시간이다. 남다른 사고방식을 지닌 그녀는 본인의 순서가 되면 암으로 죽게 되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생의 마무리를 준비할 수 있고 소중한 어머니와 남편이 느꼈던 고통을 겪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다. “내가 암에 걸렸나, 싶어. 어떻게, 내가 암에 걸렸지?” “그러게. 꿈이었으면 좋겠지.” 햇살 속에 산책 나온 부부는, 단순하고 깊은 말들을 천천히 주고받는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확언하고 나중에 자식들이 간직할 사진을 남긴다. 누군가는 반문할지도 모른다. 사랑을 확인하고 급기야 더욱 사랑하게 되면 사별의 고통과 슬픔만 더하지 않겠냐고. 아마도 맞을 것이다. 결국 추가적인 까다로운 자문 하나를 피해갈 수 없다. 슬픔 없는 삶이 확실히 더 좋은 것일까? 더 아름다울까? 모든 통증을 모면하며 생을 쾌적하게 통과하는 것이 최선의 목표가 될 수밖에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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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트 오브 킬링>은 1965년 독재자 수하르토가 집권하기 직전 인도네시아에서 자행된 공산당원 학살의 가해자들을 4~5년에 걸쳐 촬영한 다큐멘터리다. 당시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엄연한 합법정당이었거니와 실제 50만명에서 200만명까지 헤아리는 피살자의 다수는 장차 들어설 정권에 비우호적이라는 막연한 심증이 가는 시민과 그 연고자들이었다. 인간의 본성을 자문하게 만드는 학살 범죄를 다룬 다큐멘터리 가운데에서도 <액트 오브 킬링>이 이례적인 것은, 통상 노출을 꺼리는 가해자가 카메라 앞에 나선 주인공이며 나아가 자발적으로 살인의 추억을 재연한다는 데에 있다. 주인공들한테는 무용담이고 감독과 관객에게는 ‘현장 검증’인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기괴한 상황이다. 이 희귀한 세팅이 가능했던 조건은, 영화제작 시점까지 본질적으로 정권 교체가 이뤄지지 않음으로써 이들의 범죄가 법적으로 청산되지 못했고 따라서 반세기 동안 지속된 침묵에서 비롯한 착란 상태에 인도네시아 사회 전체가 빠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학살 후 싱가포르로 이주한 동료 아디는 안와르와 달리 외부자의 눈에 본인들의 과거가 어떻게 비칠지를 인식하고 있으며 이미 거기에 대한 방어 논리까지 갖췄다(“전범은 승리자가 규정하는 거요. 아메리카 인디언 학살은? 따지려면 카인과 아벨부터 이야기하라 그래”). 어느 다큐멘터리 감독이 남미에 숨어 사는 나치 전범을 찾아가 아우슈비츠 가스실을 재연하도록 설득하고 촬영했다고 가정해보자. 관객은 해당 영화가 필요한지 과잉에 의문을 제기하며 불편을 느꼈을 것이다. 상상의 나치 다큐와 <액트 오브 킬링>의 결정적 차이는 안와르와 동료들이 공적으로 단죄된 적이 없으며 따라서 50년 동안 자의로든 타의로든 자신의 행위를 회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학살 당시 자료화면을 전혀 쓰지 않고 진상을 추적하지도 않은 이 영화의 제한된 목표는 가해자들의 의식을 ‘재연’(再演)이라는 시약을 더해 선명히 드러내는 것이다(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에 의하면 이 실험은 “당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기억해주겠냐”는 감독의 제안을 안와르 콩고와 친구들이 기꺼이 받아들여 이뤄졌다).

그럼에도 <액트 오브 킬링>의 관람이 남기는 한점의 불편함은 <몬도 가네>(1962)가 주는 그것과 통한다. 내가 이 놀라운 영화 앞에서 느끼는 전율에는 민주주의 후진국에 경악하는 서구 지식인에게 동일시한 오리엔탈리즘이 포함돼 있지 않은가 문득 묻게 되는 것이다. 특히 미국 감독이 공산주의를 청산한 애국자들의 활약에 대해 영화를 만든다고 흥분해 인도네시아 공중파 TV가 편성한 ‘어이없는’ 토크쇼를 고스란히 전하는 시퀀스에서 나의 혼란은 커졌다.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은 벌거벗은 임금님 본인만 모르는 가운데 온 세상에 그의 나체를 고발하는 소년은 아닐까? 감독은 미국의 영화 팟캐스트와 진행한 한 인터뷰에서 “촬영기간 중 한번도 학살에 대한 윤리적 판단이 흔들린 적이 없지만 시간이 지나며 자연히 안와르와 친밀해지면서 괴로움을 느꼈다”고 말했다. 또 오펜하이머는 이 영화가 민주주의 후진국 사례보고가 아니라 제국주의와 노예제 같은 학살 위에 번영한 서구 사회에 대한 힐문이기도 하다는 점을 밝히기도 했다(물론 이 연출 의도는 영화 서두의 자막으로 암시될 뿐 텍스트 안에서 명시되진 않는다). 그래도 앙금은 여전히 남는다. 감독은 영화를 찍는 동안 왜 안와르에게 분노하고 반문하지 않았을까?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본인이 판단한 확고한 사안에 대해 어떤 이유로 안와르 콩고와 아예 토론하지 않기로 결심했을까? 우리는 대상인물을 향한 감독의 존경과 애정이 스민 다큐멘터리를 선선히 긍정하듯, 혐오가 밴 다큐멘터리에도 똑같은 평정을 유지해야 공정한 것일까. <액트 오브 킬링>은 내게 무척 난해한 영화다. (다음에 계속)

<맵 투 더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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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핫’ 요가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신작 <맵 투 더 스타>의 할리우드는 나이, 외모, 유명세에 관한 잔인한 코멘트가 난무하는 동네다. 10대 소녀 배우들은 스물셋의 동료를 ‘폐경기’라고 험담하고, 합석한 남자 스타는 팬에게 자기 똥이 팔렸다고 전한다. 남들 눈에 띄는 동안 100% 젊고 아름답고 쿨해야만하는 이들은 카메라의 시선이 사라지면 극단적 향락에 탐닉하고, 다시 속성으로 완벽해지기 위해 각종 약에 의지한다. 커리어가 하락세인 배우 하바나(줄리언 무어)의 생활도 각종 테라피로 점철돼 있다. 그러나 마사지, 요가, 동양에서 공수해온 차와 풍경(風磬)도 불안에서 터져나오는 뜨거운 비명은 막지 못한다. 줄리언 무어가 연기하는 ‘평정을 위한 조바심’은 기막히게 생생하고 웃기고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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