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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웅의 일상어 사전]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봐
권혁웅(시인) 2014-12-26

[ 전생에 나라를 구핻나바 ]

겉뜻 잘생긴 애인이나 배우자를 둔 사람을 축복하는 말 속뜻 그 사람의 잘생긴 애인이나 배우자를 저주하는 말

주석 절세미인이나 엄친아를 애인으로 둔 사람들이 흔히 듣는 말이다. 쟤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봐. 구국에 대한 보상으로 멋진 짝을 얻는다고? 어째 좀 억울한 것 같기도 하고 낭만적인 것 같기도 하다. 나라와 한 사람을 교환하다니 이렇게 손해 보는 장사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이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나라를 버리겠다니 이보다 낭만적인 게 또 어디있겠는가? 낙랑국과 서동 왕자를 교환한 낙랑 공주, 트로이와 헬레네를 교환한 파리스의 선택이 다 그랬다.

그들은 불멸의 사랑을 선택했지만 그 때문에 나라는 쫄딱 망했다. 이 부등가교환이 전생 타령에도 스며들어 있다. 우리는 바로 되물어야 한다. 쟤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고? 쟤가 횡재한 거라면, 그럼 쟤 애인은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냐? 전리품으로 전락한 애인 말이야. 구국의 영웅과 매국노의 만남이라니, 도대체 전생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현세의 삶이 특별한 축복이나 저주 아래 있다면, 그것은 모두 이전 삶의 결과일 것이다. 따라서 이때 말하는 전생이란 ‘알려지지 않은 원인’이란 뜻이다. 우리는 모르지만, 여하튼 이 축복이나 저주에는 무슨 사연이나 곡절이 있을 테니까. 이렇게 본다면 그 원인이 알려지지 않은 축복의 옆에는 동일한 저주가 있다.

요네하나 마리가 채집한 유머 중에 이런 게 있다. 반공이 득세하던 시절의 유머다. 브레즈네프 서기장이 죽어서 지옥에 갔다. 악마가 그에게 형벌을 고를 권한을 주었다. 첫 번째 방에서는 레닌이 바늘 더미 위에 앉아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두 번째 방에서는 스탈린이 끓는 가마솥 안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런데 세 번째 방에서는 흐루시초프가 마릴린 먼로를 껴안고 있었다. 브레즈네프가 세 번째 벌을 받겠다고 했다. 간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저건 흐루시초프가 아니라 마릴린 먼로가 벌을 받는 거야.” 한 사람에게 축복이 다른 사람에게는 저주가 되는 사정이 그와 같다. 그러니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전생에 나라를 구해서 지금 애인을 만난 거라고? 그건 지금 애인을 만나기 위해서 전생에 나라를 버렸다는 말과 똑같은 거야. 흥. 그이를 위해서 나라도 버리겠다니. 그렇지 말고 제발 나를 구하라고. 나라 타령 그만하고.

용례 전생이 ‘알려지지 않은 원인’이라면 재벌 3세들은 전생에 큰일을 했음에 틀림이 없지만, 이 ‘알려지지 않은 원인’을 다르게 표현할 수도 있다. 말과 실제는 원래 다른 것이며 우리는 누구나 이게 다르다는 것을 안다. 둘을 구분하지 못하는 게 정신병의 특징이다. 귀신을 상상하면 눈앞에서 귀신이 출현하는 거다. 땅콩 안 까줬다고 “비행기 돌려!” 이러면 비행기가 돌아갔다고? 말과 실제가 일치하는 삶을 살고 있구나, 그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