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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사의 아수라장] 666
김곡(영화감독) 2015-01-02

영화를 영화답게(?) 만드는 술어 여섯 가지

<구니스>

일도 잘 안 풀리고(얼마 전엔 드디어 영화가 하나 더 고꾸라졌다, 도합 5연타인가… 싸블알), 눈은 추적추적 내리고, 또 비행기는 돌았고 헌법재판소도 돌았으니, 내가 도통 뭐하는 짓인가, 영화 그대는 도대체 누구인가 고민이 많아지는 저녁이다. 물론 정답은 언제나 하나다. 영화는 정서, 느낌, 휠링, 이모션, 눈물이 주르륵주르륵. 그대가 사랑하는 영화를 아무거나 생각해보라, 그리고 그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 장면을 떠올려보라, 바로 그게 정서, 느낌, 휠링, 이모션, 사랑은 창밖에 눈물이 주르륵주르륵. 하지만 정서는 글로 옮기기 힘든 데다가 정서 타령만 하자니 지면이 너무 남을 듯하다. 그래서 준비했다(반말 죄송). 영화 그대는 누구인가에 대한 여섯 가지 대답.

영화라면 반드시 찾아오는 육형제

지금부터 폭로(?)할 영화를 영화답게 만드는 술어 여섯 가지를- 영화 교과서에서 허풍 떠는 것처럼- 내러티브 공식인 것처럼 과장하고 싶진 않다. 미리 말하지만 그런 공식은 없다(행여 있다면 개나 줘버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어떤 이데아라도 미리 존재하고 있었던 양 이 여섯 가지 술어는 모든 영화에서 예외 없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감히 이렇게도 말할 수 있으리라. 다음 여섯 가지 술어 중 하나라도 빠진 영화가 있다면, 그건 영화가 아니다(그건 분명히 문학, 연극, 음악일 거다). 물론 이 육형제를 대공개하는 글 제목은 666으로서 불길함을 자아내는데, 그것은 이 여섯 가지 술어가 틀릴 수도 있다는 불길함이 아니라 반대로 여섯 가지 이외에도 다른 술어가 더 있을 수 있다는 불길함의 666이다. 무슨 소리냐고? 이 육형제는 영화라면 반드시 찾아온다(심지어 그들은 실험영화의 난장판도 파고들어 고개를 슬며시 들이민다).

첫 번째 술어는 ‘꿈꾼다’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모두 꿈꾼다. 빈자는 재벌을 꿈꾸며, 공주님은 사랑을 꿈꾸며, 아이는 어머니를 꿈꾸고, 포로는 자유를 꿈꾸고, 범인은 살인을 꿈꾸고, 희생자들은 탈출을 꿈꾸고, 악당은 세계 정복을 꿈꾸고, 영웅은 구세를 꿈꾼다. 심지어 영화에선 으레 그렇듯 꿈 장면이 등장한다(회상의 형태로든 아니면 수면의 형태로든). 그만큼 꿈꾼다는 것은 영화를 추동한다. 꿈은 아직은 이루어지지 않은 욕망이며, 목적으로 구체화되는 어떤 지향점이다. 욕망이 없다면 영화는 시작도 못하는 것이다. 아아, 반론이 들려온다. 예컨대 무기력하기로 유명한 오즈나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 의지박약의 대명사 고다르의 영화들은 어쩔 거냐. 하지만 거기에도 꿈은 있다. 오즈의 인물들은 평온을 꿈꾸며, 타르코프스키의 순교자들은 향수와 희생을 꿈꾼다. 고다르의 망나니들은 일탈과 주의산만을 욕망한다. 그들은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를 꿈꾼다.

두 번째 술어는 ‘사고친다’이다. 첫 번째 욕망이 언제나 사고를 치기 마련인데, 그것은 우연히 일어날 수도 있고, 사필귀정으로 일어날 수도 있지만 으레 우연과 필연 중간쯤에서 애매하게 일어난다. 쉽게 말하자면 영화는 언제나 사고가 일어나면서 본격적으로 말을 하기 시작한다. 평온하던 마을, 어느 날 시체가 발견된다. 혹은 평온한 가정, 어느 날 아내가 사라진다. 아니면 이러려던 건 아닌데, 젠장할, 일이 꼬여버렸네. 뭐 이런 식이다. 가장 작은 사고(가장 스멀스멀 느리게 진행되는 사고)로는 멜로물에서와 같은 사소한 만남, 미묘한 스침, 곁눈에 느껴버린 설렘 같은 것일 거다. 가장 큰 사고로는 <행오버>가 있다. 자고 일어나보니 모르는 여자와 결혼을 했고, 방 안엔 호랑이가 앉아 있다. 아, 물론 이 불의의 사고는 외부에서 올 수도 있다. 대표적인 예로, 외계인은 마을 외부에서, 지구 외부에서 온다. 외부인이 사고를 먼저 칠 경우는, 마치 사고가 두겹인 것처럼 일어나는 것도 흥미로운 점이다. 그러나 사고가 두겹인 경우는, 언제나 메인 사고와 서브 사고로 나뉘는 것도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 예컨대 <E.T.>에서 외계인이 마을에 불시착하는 것과 소년이 외계인을 만나는 경우 어떤 것이 진짜 사고(메인 사고)인가? 정답은 후자다. 소년이 외계인을 마주치는 것이야말로 소년이 꾸던 꿈의 연장선상에 있는 진짜 사고이기 때문이다(실제로 소년은 외계인을 집에 숨겨줌으로써 드디어 ‘사고를 친다’). ‘사고친다’는 ‘꿈꾼다’의 상관항이다. 그것은 우연이 사고가 되는 시스템, 즉- 목적 달성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증거한다.

<죽어야 사는 여자>

제할 것은 없다, 더해질 것을 아직 모를 뿐

첫 번째, 두 번째 술어는 쉽게 연역이 된다고? 세 번째 술어가 사실 진국이며, 가장 흥미롭다. 놀라지 마시라. 대망의 세 번째 술어는 ‘위장하다’이다. 참 신기하게도, 당신이 알게 모르게 무심히 지나칠 뿐 모든 영화엔 위장의 상황이 있다. 주인공이 위장을 하든 아니면 주인공의 주변 사람들이 위장을 하든 그 위장이 의도된 것이든 아니면 강요된 것이든 영화는 위장을 사랑한다. 멜로물에서 주인공들은 서로에게 다가가기 위해 내숭을 떨거나 사소한 거짓말을 한다. 수사물이나 액션물에서 주인공은 아예 위장취업을 하거나 잠입수사를 한다. 인간만 위장을 하란 법은 없다. SF•공포영화에선 괴물들이 위장을 한다. 다짜고짜 보물을 찾으러 나가는 어드벤처영화엔 무슨 위장이 있냐고 핏대 세우지 마시라. 어드벤처영화에서 먼저 위장하는 것은 환경이다. 그리고 탐험가는 바로 그 환경의 비위를 맞추면서 위장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666번 본 <구니스>에서 선구했던 부비트랩은 위장된 환경의 가장 좋은 예라 할 것이다. 아아, 또 들려온다. 단지 꾸밈없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게 일인 성장영화에서는 무슨 위장이 있냐고? 성장영화에서 위장은, 이인증이다. 성장영화엔 미성숙한 아이가 자아분열되어 외부로 투영된 그의 도플갱어가 항상 등장한다. 그것은 위장된 자아다(무료하다면 자문해보자, 왜 대뜸 ‘위장’일까? 아마도 이 술어는 영화의 프레임, 즉 드러내는 동시에 숨겨주는 프레임에서 연유했을 가능성 짙다).

네 번째 술어는 ‘선택하다’이다. 문학도 연극도, 이 선택이 영화에서처럼 노골적이진 않다. 문학이 머뭇머뭇 선택하고, 연극은 슬금슬금 선택한다면 영화는 존나 선택해야 제맛이다. 반대로 문학처럼 머뭇머뭇 선택하고, 연극처럼 슬금슬금 선택한다면, 그만큼 영화는 재미없어진다. 선택은 <죽어야 사는 여자>(감독 로버트 저메키스)에서처럼, 영생의 묘약을 먹고 살 것인가, 아니면 그냥 여기서 떨어져 죽을 것인가처럼 중차대하고 결정적인 선택이어야 한다. 그리고 선택은 <첨밀밀>에서처럼 저 배를 타고 새로운 남자와 함께 떠날 것인가, 아니면 배를 타지 않고서 옛 남자에게 남을 것인가처럼, 극적이고 절실한 선택이어야 한다. 즉, 어느 한쪽을 취함으로써 잃는 손해가 굉장히 큰, 그래서 그 결단은 더더욱 용기와 희생이 필요한 선택이어야 한다. 최근 본 영화 중에 가장 우울한 선택은 <나를 찾아줘>(감독 데이비드 핀처)에서의 마지막 선택이다. 주인공은, 더이상 믿지 못할 아내와 함께 행복을 연기하면서 살기를 선택한다. 영화에서 선택은, 컷포인트만큼 분명해야 한다.

<8월의 크리스마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술어는 ‘맞짱뜬다’와 ‘되돌려준다’다. 영화는 반드시 마지막 고난에 맞서는 깡다구(이 역시 욕망의 발현이다)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제껏 피해오던 궁극의 맞짱이 없거나 희미하다면, 영화는 싱거워진다. 멜로물에도 맞짱이 있다. 사랑을 방해하는 악역과의 맞짱이 있으며, 악역이 없다면 고백과 긍정의 형태로 운명과 맞짱을 뜬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주인공은 스스로 사진을 찍는다. ‘되돌려준다’는 바로 이 맞짱의 상관항이다. 맞짱은 으레 무언가를 되돌려주기 위해서, 혹은 상황을 되돌려놓기 위해서 일어난다. 복수는 이 술어들의 가장 전형적인 이중주일 것이다. 그러나 ‘되돌려준다’는 ‘맞짱뜬다’의 표면을 아슬아슬 저공비행하면서, 자신의 깨알 같은 맹아들을 영화 여기저기에 흩뿌리기도 하는 녀석인데, 영화에서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인물들간에 서로 되돌려주는 대사가 가장 좋은 예라 할 것이다. 터미네이터는 존 코너가 가르쳐준 욕을 하며(<터미네이터2>), 승천하는 샘에게 몰리는 그가 자주하던 “동감”이란 말을 되돌려준다(<사랑과 영혼>).

솔직히 나도 왜 이 육형제들이 영화의 기본 술어들이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또 이놈들이 마치 이데아처럼 태곳적부터 선재하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역사와 문법에 의해 점점 진화해온 것인지 역시 알지 못한다. 단지 그렇다는 것뿐이다. 제할 것은 없다. 더해질 것을 아직 모른다면 모를 뿐. 더 있을지도 모르는 다른 형제의 생사를 알 길 없는 이 상황에서 육형제의 선포가 너무 섣부르고 불길하다, 그것은 마치 김곡의 미래처럼 불길하다 싶으신 분들, 그래서 찾아보니 육형제 말고도 다른 술어들이 더 있어서 이 글 제목이 777 혹은 888이 되어야 한다는 분들은, 저에게로 제보해주시… 는 페이크, 제보는 신두영 기자님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떡국은 666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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