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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사의 아수라장] 모순, 부조리, 불일치의 세계
김선(영화감독) 2015-01-16

영화의 역설에 대해

<스트레스를 부르는 그 이름 직장상사>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란 제목의 회화 작품이 있다. 뭐가 그려져 있냐고? 작품엔 버젓이 파이프가 그려져 있다. 악취미가 아니다. 제목과 제목이 지시하는 대상의 불일치, 그 역설이 주는 당혹감이 작품의 주제다. <샘물>이라는 설치 작품도 있다. 싱그럽고 아름다운 옹달샘을 퍼와서 설치해놨냐고? 아니올시다. 떡하니 변기가 하나 놓여 있는 작품이다. 뭐 역시나 제목과 내용의 불일치로 역설감을 주는, 대표적인 초현실주의/다다이즘 작품이다. 그 시절 음악도 역설을 주제로 한 퍼포먼스가 꽤 있었는데, 존 케이지가 피아노 앞에서 4분33초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퇴장한 퍼포먼스는 유명하다. 침묵이 음악이 되는 역설이라니. 과연 전후 시대의 니힐리즘 아방가르드답다.

역설(혹은 아이러니). 사전적 의미로는 “1. 발화된 언표와 의미하는 언의가 불일치하는 상태. 2. 예상밖의 결과가 빚은 모순이나 부조화”라고 나와 있다. 위 작품들 말고도 역설을 주제로 한, 역설로 이루어진, 역설을 사랑한 작품들은 수없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처럼 역설을 사랑하는, 아니 집착하는 매체가 또 있을까. 생각해보라. 영화는 끝없는 역설로 채워져 있다. 주인공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기가 가장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며, 가장 만나기 싫은 사람을 만나야 하며, 가장 무서운 적을 상대해야 한다. 극이 진행될수록 역설은 더 커진다. 그토록 싫어하던 일이 점점 좋아지고, 그토록 싫어하던 사람과 사랑에 빠지고, 그토록 무서워하던 적보다 더 무서워지기도 한다.

예들은 너무 많아서 지면이 모자랄 정도다. 마초 형사가 악당을 잡기 위해 유치원 교사로 위장하지만 아이들에게 혼이 나기도 하며(<유치원에 간 사나이>), 노조 해체를 위해 산간 벽지 공장으로 침투한 사쪽 시티걸이 노조위원장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며(<미쓰 루시힐>), 혐오하는 직상상사를 제거하기 위해서 더 진상이 되어야만 한다(<스트레스를 부르는 그 이름 직장상사>). 모두 코미디 일색이라고? 그렇다. 역설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르는 코미디다. 아예 코미디에는 역설을 장르화한 하위장르가 있기도 하다. 위장극과 소동극이다. 위장극은 “해선 안 될 신분”으로 위장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고, 소동극은 “해선 안 될 짓”을 계략하면서 일이 점점 커지는 이야기다. 위장극과 소동극은 우연히도 저 옛날 희극의 대표적인 두 포맷과 정확히 일치하는데, “하기 싫은/어려운 위장”과 “예상치 못한 일파만파”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희극적 긴장감임에 틀림없나 보다(여기서 셰익스피어의 희극 <한여름 밤의 꿈>과 <헛소동>을 떠올리는 당신, 역설감 전문가 등극).

<양들의 침묵>

‘후킹’을 위한 역설

그렇다고 다른 장르에는 역설감이 덜한가? “역설적이게도” 더 심해지기도 한다.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자동차가 가장 무서운 킬링머신이 되기도 하며(<크리스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장 믿지 못할 마녀사냥꾼들이 되며(<신체강탈자>), 연쇄 살인범을 잡기 위해 더 극악무도한 인육살인자와 마주해야 하며(<양들의 침묵>), 신이 내린 소명이라 여기면서 점점 자신을 신격화하는 광기에 휩싸이기도 한다(<아귀레, 신의 분노> <지옥의 묵시록>). 이정도 영화적 역설감을 예시했으면 어느 정도 감이 온다. 역설감은 영화에서 소위 말하는 ‘후킹’(이거 표준어인지는 확실치 않음)이기도 하다. 내러티브를 몇 문장으로 요약할 때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가장 원초적 문장. “왕자와 공주가 사랑했다”보다 “왕자와 거지가 바뀌었다”가 더 후킹이 있는 건 당연하다. 그 이유는, 이제까지 설명한 대로, 후자의 문장엔 역설감이 있기 때문이다. 역설이 너무 상업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거 아니냐고? 그게 영화에서의 역설의 운명이다. 영화판에서, 역설이 아니면 후킹이 아니다(<명량> 같은 역사적 신화에도 후킹이 있다. “좌천 됐는데도 나라를 지켰다”는. 영화 이전에 신화에 이미 후킹이 있음을 기억하자).

역설이 영화판에 와서 고생이 많다는 분들은 안심하시라. 역설은 후킹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나리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캐스팅에만도 있지 않다(실제에 있어서 캐스팅은 가장 비역설적 요소 중 하나인데, 이는 아마도 감정이입하는 가장 편안한 플랫폼이 “얼굴”이어서 역설의 모험이 가장 적기 때문이리라). 영화를 구조적으로 구성하는 것 역시 역설이다. 이를테면, 채플린느님께서 “희극은 롱숏, 비극은 클로즈업”이라고 천명했지만, 기억해보라. 우리가 <총알탄 사나이>를 보고 기억에 남는 건 레슬리 닐슨옹의 어벙한 표정이고, <만추>를 보고 기억에 남는 건 오히려 김혜자와 정동환(문정숙과 신성일의 오리지널 버전 보고 싶어라 아아~)이 서성이던 정거장, 무덤가, 부둣가이다. 결국 채플린느님이 말한 희극의 롱숏은 “역설적이게도” 얼굴이며, 비극의 클로즈업은 “역설적이게도” 공간이다. 뭐 당연한 얘기 아니냐고? 당연한 얘기이고, 그 당연함에 역설이 있다는 얘기다.

좀더 세부적으로 가볼까나. 영화공부 좀 했다는 친구들은 알 것이다. 컷들이 붙을 때 동일한 사이즈의 컷들보다 상이한 컷들이 더 잘 붙는다는 사실을. 이를테면 “일반적으로”(따옴표할 만큼 성급한 일반화라는 거 인정한다) 클로즈업 다음엔 롱숏이 붙어야 잘 붙는다. 역설적이지 않은가? 이미지를 연속적이게 하는 것이 “비연속성”이라는 것이. 더구나 더 보여주고 싶은 컷은 오히려 짧게 해야 한다. 그 옛날 스티븐 스필버그가 <죠스>를 만들던 당시, 죠스의 지느러미를 얼마나 보여줄 것인가를 가지고 편집자와 싸운 일화는 유명하다. 지느러미를 많이 보여줘야 한다는 스필버그의 주장을 누르고 편집자는 지느러미를 최소한만 보이게 편집을 했고, 관객은 보이지도 않는 지느러미를 보고 까무러쳤다. 그렇다면 반대급부인 롱테이크는 어떤 역설이 있을까? “컷하지 않고” 시간을 지속시키는 롱테이크는 “역설적이게도” 시간을 압축하는 기능을 한다. 최대한 길게 찍지만 길게 찍을수록 시간이 줄어든다/압축된다. 이는 컷의 시작(top)과 끝(end)이 멀어질수록 시간의 두께는 점점 두꺼워져서 그 함축성/압축성이 더 농밀해지는 원리가 아닐까 싶다(이런 미스터리한 문제는 좀더 공부해서 다음 아수라장 때 써볼까 한다). 오즈 야스지로, 임권택, 구스 반 산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등 영화작가들의 세월을 요약하는 롱테이크 명장면은 모두 영화의 역설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겠다. 영화의 역설 만세.

<파고>

사이즈의 역설, 영화의 죽음

하지만 영화를 가장 역설적이게 만드는 건 ‘재현의 역설’이리라. 영화는 어떤 식으로든 세상을 재현한다. 정치영화는 정치세계를 재현하고, 슈퍼히어로영화는 권선징악 이데올로기를 재현한다. 심지어 세상의 재현에 하등 관심이 없을 것 같은 판타지영화는 현실태의 스트레스를 망각하고 신화 속으로 회귀하려는 이딴 세상 살기 싫어 증후군을 재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영화는 재현하면 할수록 재현에 실패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이유는 영화는 바람의 투영이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짜증나는 현실을 굳이 영화로 (회화로, 음악으로, 춤으로, 시로) 재현하는 목적은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람은, 현실에 없기 때문에 바람인 거다. 즉 바람은 허구다. 고로 영화는 허구다. “이 영화는 사실에 기초한 영화”라는 타이틀이 뜨는 순간 “역설적으로” 그 영화는 더 허구적으로 변모한다. 더 사실적인 바람이 투영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코언 형제가 있지도 않은 실화를 실화라고 우길 때 <파고>는 더, 아니 “덜 역설적”이게 되고, 재현에 “덜 실패”하게 된다”. 진실을 “덜 왜곡”하는 코언 형제 만세. 영화의 역설 만만세.

그러나 이런 추상적인 역설들까지 언급하지 않아도 당면한 현실적인 역설은 분명해 보인다. 바로 ‘사이즈의 역설’이다. 영화 시장이 커질수록, 블록버스터영화가 많아질수록, 제작비가 상승할수록 건강은 악화되는 역설이다. 대기업이 투자와 배급을 장악한 지금, 영화계의 몸집은 커질 대로 커지고 있지만 혈액순환은 막힌 지 오래이고, 소화불량도 만성, 그렇다고 운동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니어서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건강악화, 좀더 정확히 말해서 영양불균형 상태가 작금의 상태이다. 양극화가 심해지고 중간층이 없어지고 있다. 장르영화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게 중간층 소멸의 단적인 증거다. 더 역설적인 건 블록버스터급 영화의 탄생에 환호하는 관객이다. 마치 “이 영화는 천만이 들어야 한다”느니 “대한민국의 자랑”이라느니 천만 신화와 민족주의 신화를 내세우며 열광하고 동조하고 홍보하고 다닌다. 하지만 그들이 블록버스터에 환호할수록 영화계는 병들어가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영화의 죽음에 환호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무슨 잘못이랴. (누구 말처럼) 그들은 몰라도 영화인들은 알아야 한다. 중간층이 결국 영화판을 건강하게 만들 보약이라는 것을. 모른 척하지 말자. 영화인들이여, 사이즈의 역설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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