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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사의 아수라장] 첫사랑과 첫사랑 타령
김곡(영화감독) 2015-01-30

실패를 무릅쓰지 않는, 안전한 존재방식에 투항하는 영화들

<그리스>

만약 언어에도 감촉이 있다면, 이 단어가 단군이시다. 첫사랑! 단지 듣는 것만으로도 심금이 오케스트라 연주되어 설렘과 애틋함으로 영혼에게도 떨리는 살결을 부여하는 바로 그 단어, 첫사랑! 기억 속에 언제나 아스라이 남아, 정화수를 떠놓고 오체투지 백일기도 드려도 꿈속에서나마 몇년에 한번 다시 볼까 말까 한 첫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을 알면서도, 신에게 저항한다는 각오로, 온몸의 호르몬을 유일한 무기 삼아 목숨 걸고 사랑했던 바로 그 첫사랑! 첫사랑이 그렇게 애절한 이유도 여기에 있으리라. 첫사랑은 운명처럼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첫사랑이다. 즉 첫사랑은 언제나 과거형으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는 애절한 사랑이다. 아아, 다시 들려온다. 이 어설픈 이론에 저항하려는 어설픈 반론들이. 혹자는 “나는 첫사랑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으하하하, 부럽지”라고 반론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재반박하련다. 안 부럽다. 백년이 지나봐라. 그 가약도 과거형이다. 아니, 백년 지나기 전에 그대들의 사랑은 이미 과거형이다. 첫 만남의 그 설렘과 입냄새까지 사랑하고자 했던 그 열정을 애써 잊으려는 듯, 서로 등 돌리고 자는 오늘 밤, 이미 과거형이다. 요컨대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만 이루어지는 사랑이다. 그래서 고귀한 것이고.

복고 열풍 속 사라진 모험심

영화에도 첫사랑이 있을 터. 당신이 처음 사랑했던 영화를 떠올려보자. 감독과 배우가 누구인지도, 이 영화의 사회적/영화사적 문맥이 뭔지도 몰랐으며, 이게 다 개뻥인걸 알면서도 열렬히 사랑했던 첫 영화. 정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와 조우했고, 아무런 조건도 재지 않고, 아무런 이유 없이 첫눈에 반해버린 그런 영화 말이다. 나의 경우, 공식적인 대답은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감독 루이스 브뉘엘)이지만, 그건 그냥 기자들에게 폼 잡느라 하는 소리이고, 비공식적인 대답은 <구니스>(감독 리처드 도너)다. 아직도 기억난다. 누나 손을 붙잡고 극장에 들어가, 부비트랩이 어린이 탐험대를 공격할 때마다 숨죽이고 비명지르던 그때를. 그리고 그 모든 부비트랩을 통과해서 신비의 해적선이 그 위용을 드러냈을 때의 탄성을. 무엇보다도 ‘슬로스’. 흉측한 안면기형의 거인이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따뜻했던 괴물친구 슬로스. 자신을 그렇게 학대했던 엄마를 구하러 무너지는 해적선 안으로 다시 뛰어들 때의 그 눈물과 안타까움을 난 아직 생생히 기억한다. 그리고 그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구니스>를 남몰래 100번 봤다. 진심이다. 100번 봤다. 아직 안 봤는가? 당신도 100번 봐라. 아니, 1천번 봐라. 인류가 내일 멸망하니 위대한 영화 10편만 남기라고 한다면, 난 당연히 <구니스>부터 쓸 것이다. <시민 케인>? <전함 포템킨>? <희생>? 그건 그냥 먹물 비평가들이 폼 잡느라고 하는 말들이다. 오직 <구니스>만이 인류의 멸망에도 살아남을 가치가 있다… 라고, 난 망언도 불사할 수 있다. <구니스>를 향한 나의 사랑을 누구도 빼앗지 못할 것이기에, 이건 첫사랑이다.

<구니스>가 진정 첫사랑인 이유는, 이젠 <구니스>같은 영화를 더이상 만나질 못할 것이기 때문, 결국 <구니스>는 내 기억 속에 애절한 과거형으로만 존재해야 할 사랑이기 때문이리라. 이것은 단지 아동영화의 주도권을, 픽사와 같은 신흥 애니매이션 세력 혹은 컴퓨터게임과 같은 다른 매체에 넘겨주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할리우드는, 점점 커져가는 규모에도 불구하고 맛탱이가 가고 있다. <구니스>가 구가하던 상상력, 모험심, 그리고 순수에의 갈망은 점점 그들의 가치목록에서 하위권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구니스>의 진정한 실세라고 할 수 있던 크리스 콜럼버스와 같은 작가들도 살아남기 힘든 구조가 됐다. 남은 것은, 히어로물의 재탕과 1980~90년대- <구니스>와 같이- 독창성이 분명했던 영화들의 리메이크뿐이다. 첫사랑이 나오질 못하니 첫사랑을 불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첫사랑이 아니다. 이것은 첫사랑 타령이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첫사랑과 첫사랑 타령을 구분해본다면, 다음과 같은 법칙 정도는 쉽게 추출해볼 수 있다. 더이상 첫사랑할 자신이 없을 때, 우리는 첫사랑을 타령해대기 시작한다. 이것은 이해하기 쉽다. 우리가 첫사랑 타령을 해댈 때는, 또 다른 실패로, 친구와 술을 먹고 또 술을 먹어도 그 갈증이 해소되지 않을 때가 아니었던가. 더 극단적인 경우로는, 동네 백수들이 할 일 없이 동네에서 만났는데, 막상 만나고 나니 할 말이 없을 때, 그래서 서로 추억 얘기를 슬슬 꺼내다가, 추억 배틀로 비화되고, 시스템에 진입하지 못한 열등감이 서로에 대한 경쟁심으로 승화되어 기어이 첫사랑 배틀로 이어지는 경우를 가정해 볼 수 있다. 동네 백수들에게 첫사랑은, 서로를 안심시켜주는, 혹은 이 공허한 시간을 버티게 해주는 안줏거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첫사랑 타령은, 더이상 첫사랑을 재시작할 수 없을 때, 즉 첫사랑 불능 상태에 비로소 시작된다. 첫사랑은 고귀하지만, 첫사랑 타령은 지질하다. 첫사랑 타령은 첫사랑의 인플레이션으로써, 그 고귀한 가치를 스스로 절하하기 때문이다. 첫사랑 타령의 첫사랑은 더이상 고귀한 과거형이 아니다. 그것은 비천한 현재를 땜방하는 영양보충제의 과거형이기 때문이다.

할리우드만 안타까워한다면 불공평하다. 우리네 영화판도 비슷한 몸살을 앓고 있다. 요즘 복고 열풍이다. 저마다 첫사랑을 소환해대지만, 정작 누군가에게 첫사랑일 수 있는 영화가 있을까(아니면 최소한 쉽게 접할 수 있을까)… 라는 매우 불손하고도 불길한 질문이 멀티플렉스의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다(일반화가 안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잠깐 해보는 테스트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당신의 한국영화 첫사랑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런 영화를 지금 다시 만날 수 있는가? 라는 테스트 말이다. 다시 한번 나 자신을 마루타 삼아본다면, 나의 한국영화 첫사랑은 <외인구단>과- 좀 거리가 있지만-<인정사정 볼 것 없다>이다. 전자에는 바보들의 고군분투라는 절절한 파토스가 있었고, 후자에는 움직이는 카툰을 실험하는 모험적 형식미가 있었다. 최소한 그들은 무언가를 모험하고 있었다. 그것이 세상이든 영화 자체이든 간에 모험을 했다. 그리고 바로 그 모험심이야말로 미덕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모험은 반대로 결격사유가 되었다. 언제나 안전한 과거를 불러내는 게 영화 제작자들의 미덕이 되어버린 것도 같다(나의 짐작이 틀렸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이순신보다 더 위대한 장군님 안 계신가? 세종대왕보다 더 위인 같은 왕은 없었나? 노무현보다 더 고군분투하다가 외롭게 돌아가신 정치인은 없었나? 역사적 사실을 뒤지는 것도 이젠 버릇이 되었다. 역사적 사실 앞에 기획마인드들이 줄지어 몰려들어 문전성시를 이루어, 마치 홈쇼핑 호스트가 “주문 폭주, 통화 불능 상태”를 선언하는 것처럼. 거창한 역사 말고 개인사로 우회하는 방법도 있다. 최근 가장 흥행했던 질문은, 힘들게 살아가고 후세대들을 위해 희생했지만, 쉽게 잊히고 만 가족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다. 한국영화에도 첫사랑 타령이 시작된 것이다. 누군가에게 첫사랑이 되기를 그만두고, 모두의 첫사랑을 보여주는 영화들.

<국제시장>

동네 백수처럼 지질한 최근의 흥행작들

단지 첫사랑 타령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첫사랑 타령이 범죄이거나 잘못은 아니기 때문이다. 동네 백수들이 자신들의 첫사랑을 안줏거리로 삼은 게 범죄이거나 잘못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단지 그것은 지질할 뿐이다. 반대로 지질함은 단지 백수의 인격성에 대한 술어가 아니라 그의 존재방식에 대한 술어이기도 하다는 데에 주목해본다면, 더 숙연해진다. 영화는 감독과 기획자만의 창작물뿐만이 아니라 대중 무의식 전반의 반영이다. 흥행작들이 추억 배틀과 첫사랑 타령을 시작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의 존재방식이 동네 백수의 지질한 존재방식으로 이행하기 시작했다는 것, 첫사랑 배틀로라도 우리의 공허를 채워야 할 사랑 불능 상태에 빠졌다는 것을 입증할 뿐이다. 그리고 난 궁금하다. 첫사랑 영화가 아니라 첫사랑에 대한 영화를 보고 자란 지금의 세대는, 과연 어떤 영화를 첫사랑으로 기억할 수 있을까? <변호인>보다는 노무현을 추억해야하는 영화들, <명량>보다는 이순신을 추억해야 하는 영화들, <국제시장>보다는 산업의 역군을 추억해야 하는 영화들을 보고 자란 세대들에게 첫사랑 영화란 게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 추억의 인플레이션만을 보고 자란 그들에게, 과거형 시제의 고귀함이 허락되기나 할까?

할리우드에서 <구니스>가 리메이크된다고 한다. 테러를 해서라도 막고 싶은 마음이지만, 일단 참기로 한다. 사랑 불능 상태의 한복판에 서 있는 나 자신에게 주어진 고민이 이미 태산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운명과 같은 실패를 무릅쓰고 첫사랑을 다시 감행해볼 것인지, 아니면 첫사랑을 포기하고 지질하지만 안전한 존재방식에 투항할 것인지 같은 고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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