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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부럽지 않더라
2001-03-15

영화평론가 김소희,베를린영화제 가다

2차대전 이전에 세계 5대 도시 가운데 하나로 번성했던 베를린은 전쟁 기간에 연합군의 방침에 따라 “평지가 될 때까지 때려부수어졌다”. 몇년 뒤 베를린은 부서지다 만 채 침침한 표정으로 남아 있는 시계탑 주변에 극장을 짓고 국제영화제를 시작했다. 50년째 되는 지난해, 성수기 손님을 잃어 울상이 된 중국식당 ‘양자강’의 주인아저씨를 뒤로 남기고 영화제의 주무대는 포츠담 광장쪽으로 이전했다.

통일 이전 동서독을 나누었던 경계선(어처구니없을 만큼 보잘것없는 그 하얀 선) 위로 포츠담광장 지하철역이 들어섰고 서쪽에 바로 잇대어서 웅장한 영화제 센터가 자리를 잡았다. 동쪽으로는 사무용 및 아파트 건물들이 독일 특유의 육중하고 질서정연한 느낌으로 속속 건축되고 있는 중이다. 영화제 센터 한가운데의 자그마한 공간을 마를레네 디트리히 광장이라고 이름붙였으니, 정치와 영화의 결합이라는 메타포는 통일 이후 베를리날레의 공간에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메인 상영관을 등지고 서면 고급 호텔과 쇼핑몰이 코앞에 벌여 있고, 좌로는 30여개의 스크린을 제공하는 상영시설들이, 우로는 장터(European Film Market)가 도보로 5분 거리 안에 포진해 있으니 “베를린영화제가 몇년 안에 급성장할 것”이라는 예측도 그럴싸하게 들린다. 이렇게 진단했던 인사는 “칸보다 부족한 것은 날씨뿐”이라고 덧붙이며 을씨년스런 겨울 공기를 피해 건물 안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도약을 위한 베를리날레의 야심은 집행부의 전면적인 물갈이에서도 드러난다. 22년 동안 영화제를 이끌어왔던 모리스 데 하델른이 디터 코슬릭에게 바통을 넘겼으며, 포럼 부문의 울리히 그레고 부부를 비롯, 4개 주요 섹션의 디렉터가 일제히 물러나고 후임자 인선이 마무리돼가는 중이다. 영화제쪽에서는 다정하고 예의바른 송구영신의 풍경이 연출되도록 배려했다.

경쟁부문만 신경쓰면 손해 막심

국제영화제를 즐기는 법.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경쟁 부문에 대한 강박을 털고 각자의 취향을 좇는 유쾌한 산책자가 되어보는 거다. 경쟁 부문의 중요성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여기에 연루되어 있는 ‘쇼비즈니스’와 ‘영화제 외교’의 제법 복잡한 속성이랄지, 이 부문에 초대되는 영화들의 제한된 특징 등을 감안하지 않는다면 순진한 숭배자가 되기 쉽다. 경쟁부문 진출작이라고 해서 수백편의 상영작 가운데 순위를 매겨서 1등부터 십몇등까지 끊은 것도 아니고, 더욱이 그 가운데 상당수는 친절한 한글 자막 달고 우리나라 극장에 내걸릴 것이다.

포럼·파노라마·어린이영화·회고전·마켓 시사에 이르기까지 여기저기 흘러다니다 보면 지구촌의 영화 돌아가는 풍경과 세상 소식을 접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올해 파노라마 부문에서는 도마 위에서 마지막 식칼이 몸통에 떨어지기 직전의 생선 한 마리가 들려주는 어떤 러브 스토리를 비주얼과 드라마의 참신하고 매혹적인 조화 속에서 전개하는 캐나다영화 <마엘스트룀>을 만났고, 공식 기자회견에서 죽을 쑤었던 <눈물>의 임상수 감독이 “판타스틱!”이라는 탄성을 자아내면서 베를린에 간 한국영화 가운데 가장 뜨거운 반응을 끌어낸 것도 여기서 영화를 틀고 난 다음이었다.

각종의 동성애자들로 구성된 배구팀 이야기를 다룬 타이영화 <철녀>(The Iron Ladies, 파노라마 부문)는 과장된 코믹 터치를 취해서 자국 관객의 저항감을 줄이면서도 이 주제가 국제영화계에서 갖는 특별한 호소력에 영합하려는 듯한 경향이 혼재되어 있다. 그러나 “내가 당신을 즐겁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아닐지라도, 그것이 내가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라는 극중 인물의 훈계는 통쾌했다.

인도의 유명한 화가가 연출했다는 <가자 가미니>(Gaja Gamini)는 우리의 상식으로는 어처구니 없어보이는 드라마트루기를 바탕으로 인도영화 특유의 춤과 노래, 신화적인 내러티브를 가지고 깜찍한 이미지들을 보여주었다. 러닝타임을 135분으로 끌고 가버렸다는 것이 이 영화의 재앙.

마켓 시사에서 본 다큐멘터리 <미국의 악몽>(The American Nightmare)은 1968년작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등 이 시기 미국 화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호러 장르가 실은 베트남전쟁, 각종 암살 사건, 폭력적인 데모 진압, 가족 해체 등 사회적 트라우마와 깊은 연관이 있는 매우 심리적인 영화들임을 보여준다. 실제로 널리 알려진 베트남전쟁 관련 스틸 사진들에서 따온 이미지들이 영화에서 그대로 나온다. 도착적인 영화란 도착적인 현실의 환부인 셈.

포럼에서 상영된 <아이들>(Children)은 세르비아와 알바니아전쟁의 끔찍한 순간들로부터 살아남은 어린이들을 인터뷰했는데, ‘진부하지 않을까’ 하는 내심의 우려와는 정반대로 레퀴엠에 맞추어 시를 쓴 듯한 흑백 다큐멘터리였다. 폭력과 죽음 못지않게 마음에 뿌려진 증오가 살아남은 자들에게 더 큰 문제라는 것을 느끼게 했다. 양쪽 모두 집중적으로 살해당한 사람이 성인 남자들이었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은 아버지라는 존재에 관한 가장 애틋한 영화가 되었다.

사진작가 브루스 웨버가 연출한 <찹 수웨이>(Chop Suey)는 사진이라는 매체를 화두로 미국 대중문화의 스타들과 미국사회의 삶의 단면들을 낙관적으로 묘사하면서, 다큐멘터리가 얼마나 자유롭고 개인적인 표현 장르가 될 수 있는지를 상기시켰다.

베를리날레 메인 상영관의 왼쪽으로는 극장이, 오른쪽으로는 마켓 건물이 들어서 있는 공간 배치는 대형 영화제의 근본 속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명쾌한 답변을 제공한다. 올해 유러피언 필름 마켓(EFM)은 참석자가 2천명 이상이며, 30개국에서 온 90개의 회사가 41개의 점포를 차려 330편의 필름을 내놓았다는 통계가 나왔다. 영화진흥위원회(KOFIC)가 차린 스탠드는 한국 세일즈 회사들의 근거지이자 한국인들의 만남의 장 구실을 했다. 마켓에 나온 영화들은 왼쪽에 있는 극장 건물 가운데 20개의 스크린에서 영화제 기간 내내 두세 차례씩 반복 상영되었다. 관계자들은 최소한 10개 이상의 희망 업체가 마켓 스탠드를 차지하지 못했다는 원성이 나왔다는 사실을 자랑삼아 소개하면서 공간 확충을 내년의 현안으로 내걸었다.

한국영화 해외판매 활발, 숙제는 남았다

마켓 디렉터인 베키 프롭스트는 뜨거운 물건이 별로 없었다는 고객의 투덜거림을 의식한 듯 미국 배급사가 오랜만에 등장하여 다섯편의 장편을 골라간 사실을 언급했다. 은곰상을 수상한 <베이징 자전거>는 공식 상영 이전에 이미 소니 픽처스가 미국과 호주 판권을 구입했으며, 프랑스 TF1은 영화제 출품작 외에도 진행중인 프로젝트를 입도선매한 것을 포함해 30편을 확보했다는 사실이 공개되었다. 한국의 CJ 엔터테인먼트는 <공동경비구역 JSA>를 일본 씨네콰논에 100만달러의 미니멈 개런티로 팔았다는 사실을 무빙 픽처스 데일리에 게재함으로써 홍보 반사효과를 노렸다. 미로비전은 20만달러 정도의 계약고를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어느 날 저녁 한 벨기에 남자는 “독일어는 물론 영어도 세 마디 이상 못하는 일본의 젊은 여성이 훌륭한 작품을 두개나 구매했다”며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놀랍지 않느냐”고 떠벌였다.

최근 1-2년 사이 한국은 미주를 제외한 지역에서 영화제와 배급사의 주목을 동시에 받는, 이른바 주류 생산국가의 하나로 진입했다. 확실히 한 고비를 넘어선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상황은 새로운 숙제를 낳는다.

당면 과제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국내에서 제작 완결 → 해외영화제 출품 → 해외 판매로 이어지는 지금의 순환고리를 보다 국제적인 방식으로 전환시킬 필요성이다. 할리우드는 예외적이지만 유럽을 필두로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영화들이 국제무대에서 크게 부각되는 경우는 제작 단계부터 상호 협력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쟁 부문 은곰상 수상작인 <베이징 자전거>가 그 단적인 예다.

다른 하나는 각 분야에서 다양한 전문가들을 배출할 필요성이다. 나 자신을 포함, 영화제에 나와있는 한국사람들은 십중팔구 순진하다는 인상을 주는데, 해외 업무를 상대적으로 빨리 시작한 마켓 종사자들마저도 영어를 잘 말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을 무기로 원점에서부터 시작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국제적인 활동에 한정지어 말한다면 무엇보다도 낙후한 분야가 비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말을 하는 나 자신이 외국 소식을 나라 안으로 물어 나르는 수준에서 아직 더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영화계 말석을 차지하고 앉아 오늘날 한국영화의 호황을 내 잔치인 양 즐기기에는 무언가 켕기는 느낌이다.

베를린= 김소희 / 영화평론가 cwgod@hanmail.net

▶ 제51회 베를린국제영화제 / 다시, 유럽영화에 승전보를!

▶ 베를린이 발견한 낯선 영화, 날선 영화

▶ 제51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시상내역

▶ 금곰상 수상한 <인티머시>(Intimacy)와 파트리스 셰로 감독

▶ 남자연기상 수상한 <트래픽>(Traffic)과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

▶ 심사위원상 수상한 <초급자를 위한 이태리어>와 로네 셔픽감독

▶ 심사위원대상 수상한 <베이징 자전거>와 왕샤오슈아이 감독

▶ <리틀 세네갈>과 라시드 부샤레브 감독

▶ <슈퍼 8 스토리>와 에미르 쿠스투리차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