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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sh on] 진정한 신 스틸러
송경원 사진 오계옥 2015-02-26

<한공주> <해무> <강남 1970> 배우 유승목

신 스틸러가 넘쳐난다. 소위 장면을 잡아먹는 강렬한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는 의외로 많다. 반면 장면을 받쳐주는 안정된 연기로 기억되는 이는 그리 흔치않다. 주연과 조연은 연기력의 차이가 아니라 연출자가 원하는 장면의 밸런스 차이일 뿐이라는 걸 아는 이도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유승목은 믿음직스런 조연이다. <강남 1970>에서 유승목이 연기한 서태곤이라는 인물은 ‘돈과 땅에 얽힌 욕망으로 세워진 세상’의 적자다. 아비규환 같은 욕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끝내 살아남은 시절의 상징. 어떤 의미에서 <강남 1970>은 서태곤의 기억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서태곤은, 아니 서태곤으로 분한 유승목은 작품 전면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럼에도 악다구니 난장판이 성립할 수 있었던 건 배후에서 전체판을 조종하고 끝까지 살아남은 그의 존재감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승목은 작품 안에서는 물론 작품 밖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았다. 연기에 발을 들인 지도 어느덧 20년, 그는 연출자가 사랑하는 배우, 한번 작업하면 다시 찾고 싶은 배우다. 지난해부터 <한공주> <해무> <강남 1970>으로 한창 바쁘게 활동 중인 그를 만나 배우로 살아남는 법, 배우로 살아가는 법에 대해 물었다. 숨은 고수, 영화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진정한 신 스틸러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하고 묵직했다.

-한창 드라마 찍는 중이라고 들었다.

=정명 공주의 이야기를 다룬 <화정>이란 드라마에서 광해군 형인 임해군 역할로 나온다. 50부작 사극인데 초반에 잠깐 나온다. (웃음)

-영화에서는 끈질기게 살아남는데. (웃음) <강남 1970>의 서태곤은 끝까지 살아남은 최후의 승자다. 어떤 의미에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쉽지 않은 역할이라 생각했다.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건 다른 역할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예를 들면 정호빈 배우가 맡았던 양기택이란 깡패 같은. 개인적으로 서태곤은 내게 꽤 힘든 역할이었다. 몸무게도 늘려야 했고 부산 사투리도 제대로 써야 해서. 어떻게 70년대 분위기를 낼까 고민도 많이 했다. 처음에는 감독님에 대한 어려움도 있었는데, 소문에 의하면 현장에서 엄하시다고 하고. (웃음) 한데 현장 갔더니 너무 편하게 해주시더라. 감독님의 정확한 연출이 없었으면 더 힘들었을 것 같다.

-<해무>의 뱃사람 경구 역에서도 살벌한 악역 연기가 빛났다. 악연 연기에 대한 나름의 노하우가 있나.

=경구는 악역은 아니었던 것 같다. 순박한 촌놈이지. 반면 서태곤은 지금까지 했던 역할 중에서도 가장 악역이지 않나 싶다. 앞으로도 이 정도 악역을 맡을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추잡한 천민자본주의의 상징 같은 인물이다. 70년대 이야기이지만 현실과도 맞닿아 있기에 그냥 깡패처럼 표현하고 싶진 않았다. 의원까지 한 인물인 만큼 위선을 표현하고 싶었고, 표현의 수위 조절도 필요했다. 강남 재개발의 이면을 알기 위해 당시의 정황을 쓴 책도 많이 살펴보고 참고했다. 원래 정치, 땅 이런 건 전혀 관심 없는데 이번에 공부를 좀 한 것 같다. 그런 것도 관심을 좀 가져야 할 텐데, 알아봤자 화밖에 더 나겠나. (웃음)

-<해무>의 경구는 사실 단순한 악역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인물이었는데 마냥 그렇게 보이진 않는다. 거기에 디테일한 인간의 얼굴을 넣은 건 순전히 연기의 공인 것 같다.

=<해무>는 시나리오상의 캐릭터보다 수위를 낮췄다. 그런 극한 상황을 마주했을 때 그럴 수밖에 없는 여지랄까, 변명들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순수한 면을 찾으려고 애를 썼던 것 같다. 어설픈 청청 패션에 파마머리를 한 건 내 아이디어였다. 서울에 대한 막연한 동경, 멋을 부리고 싶은데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순박한 면을 살려주고 싶었다.

-<해무>는 직접 봉준호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출연하고 싶다고 했다 들었다.

=정말 그런 연락을 잘 못한다. 친한 사람도 작품 들어간다고 하면 일부러 연락 안 하는 편이다. 어느 날 구자홍 감독님을 만났는데 <해무>라는 작품에 너한테 어울리는 역할이 있다고 봉준호 감독에게 연락을 해보라 권유하셨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있었는데 얼마 뒤 송해성 감독님이 똑같은 권유를 하더라. 이건 정말 해야 하는 건가 싶어 고민 끝에 봉준호 감독님에게 연락을 넣었더니, 감독은 따로 있다고 했다. (웃음) 그렇게 연결이 되어서 심성보 감독님을 만났다. 처음에는 다른 역할을 제시하셨는데 그땐 무슨 용기로 그랬는지, 경구라는 역할이 나를 위해 쓴 것 같다고 설득했고 그 역할을 하게 됐다.

-결국 역할이 제 주인을 찾아가는 것 같다. <한공주> <해무> <강남 1970>까지 점점 역할의 비중을 키워가고 있는데 주변 반응이 좀 달라졌나.

=허투루 작업한 적은 없지만 알아봐주시는 분들이 늘다보니 잘해야겠구나 하는 부담감이 좀 커졌다. 사실 예전에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하 감독의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2006)이라고. 거기서는 아예 본명으로 나온다. 이하 감독이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나를 생각해서 써준 고마운 영화다. 다만 결과가 아쉬웠다. 그게 잘됐으면 내가 좀더 일찍 알려지지 않았을까. (웃음) 시대를 너무 앞서간 작품이었던 것 같다.

-2003년 단편 <1호선>을 함께한 후 이하 감독의 장편 데뷔작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에 캐스팅됐다. 이수진 감독의 단편 <적의 사과> 이후 <한공주>에 출연했고, 조성희 감독의 단편 <짐승의 끝> 이후 <늑대소년>에서도 함께 작업했다. 한번 작업한 감독은 또 찾는 마력이 있는 것 같다.

=<해무>처럼 시켜달라고는 안 했다. (웃음) 연기를 잘해서 그런 것 같진 않고 불쌍하고 측은하게 생겨서? 사실 영화 끝나면 연락도 잘 안 하는데. 아마 현장에서 말을 잘 들어서 그렇지 않나 싶기도 하고. 인연을 맺은 분들과 다시 작업할 수 있는 건 역할을 떠나 감사한 일이다. 지금부터라도 연기 잘해서 찾아주는 배우가 되어야지. (웃음)

-감독과 오랜 시간 이야기하면서 캐릭터를 만들어나가는 배우와 감독이 원하는 캐릭터를 최대치까지 정확하게 표현하려는 배우. 둘 중 굳이 하나를 고른다면 어느 쪽에 가깝나.

=연극은 연습기간이 길기 때문에 연출과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이것저것 다양하게 고민해볼 수 있는 시간이 있다. 그게 습관이 되어 그런지 사실 지금까지는 감독님들과 그렇게 이야기를 많이 나누진 않았다. 차라리 혼자 오래 생각한 걸 현장에서 펼치는 스타일이었는데 이제는 좋은 걸 뽑아내기 위해 좀더 이야기를 나눠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1993년 극단에 입단해서 연기를 하다가 98년 연극영화과를 다시 들어갔다.

=연극을 한 7년 하면서 스스로를 재정립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사실 어릴 적부터 영화 배우가 되고 싶었다. 연극영화과가 있는지도 몰랐던 고등학생 때 동네 극장에서 빔 벤더스의 <파리, 텍사스>(1984)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해리 딘 스탠턴의 연기를 보며 받은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다.

-점차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중인데 궁극적인 목표가 있다면.

=20년을 연기했지만 아직 목표는 단순하다. 연기로 인정받는 배우가 되고 싶다. 어떤 캐릭터가 되든지 내 안에 있는 걸 다 뽑아내는 연기를 해보고 싶다. 말이 되고 감성을 건드리는 이야기라면 다 좋다. 그 밖에는 연말에 작은 연기상이라도 하나 받는 것? (웃음)

-차기작은 언제 만날 수 있나.

=지금 조성희 감독의 <명탐정 홍길동>을 촬영 중이다. 그의 전작 <늑대소년>에 이상한 박사로 출연했었다. (웃음) 3월 초에는 박정우 감독의 <판도라> 크랭크인에 들어간다. 위기에 빠진 원자력 발전소에 투입되는 대원 중 한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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