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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조용한 학교
김혜리 2015-03-05

<진주>

셀피의 시대다. 지난 2월1일 폐막한 제44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는 14개 비디오아트와 실험영화 독립배급사로부터 ‘미, 마이셀프 앤드 아이’(Me, Myself and I)라는 주제에 맞는 작품 한편씩을 출품받아 흥미진진한 컬렉션을 완성했다. 마르그리트 란츠 감독의 <진주>(La Perle, 2007)는 휴대폰카메라 앞에서 한 여성이 명화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의 주인공으로 치장하는 과정을 5분의 비디오에 담았다. 베르메르의 모델이 지은 오묘한 표정을 포착하려는 마지막의 말없는 집중이 백미. 창조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나(me), 자기도취(myself), 주체(I)가 고루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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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에 일곱쯤 확률로, 영화의 첫 5분 동안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게 될지 아닐지 맞히곤 한다. 오프닝 5분에는 꽤 많은 단서가 포함돼 있다. 숏과 신을 배열하는 고유한 호흡, 음악 쓰는 패턴, 감독의 유머 취향과 선호하는 이미지, 연출자가 상정한 관객의 이해력 등등을 가늠할 수 있다. 덤으로 주류 상업영화라면 클리셰를 다루는 방식도 드러난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도시의 전경이라든가 자명종 시계 인서트처럼 영화의 초반 5분은 관객을 이야기 입구로 안락하게 데려가려는 관용구의 밀집 지대다. 앞으로 두 시간 동안 관습 따위 나 몰라라 아예 ‘마이 웨이’를 갈 영화인지, 적당히 클리셰에 기댈 요량인지, 똑같이 상투적 표현을 썼더라도 정말 다른 아이디어가 없어서였는지, 중요하지 않은 요소라 여겨 힘을 뺀 것뿐인지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런데 <트라이브>는 열 중 셋에 해당되는 경우였다. 5분도 되기 전에 사로잡아놓고는, 도중에 내 손을 놓쳐버렸다. 키예프의 청각장애학교에 전학한 세르게이(그레고리 페센코)는 등을 떠밀려 학교 내 범죄 조직에 발을 들인다. 이 집단은 <대부>의 마피아보다는 <집시의 시간>의 그것에 가까워 보인다. 포주 역할을 맡은 세르게이는 본인이 매춘을 시키는 여학생 중 한명을 사랑하게 되고 파국으로 달려간다. 미로슬라브 슬라보슈비츠키 감독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막 없는 수화로 대화하는 인물들을 따라가는 약 서른세개의 롱테이크로 <트라이브>를 찍었다. 그리고 전체 출연진이 수화 네이티브 스피커인 청각장애인 비전문 배우다. 이 희소한 양식은 어떤 동기로 채택되었을까?

일단 <트라이브>는 (감독에 의하면) 청각장애 관객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라 청각장애를 가진 인물들의 이야기를 일반 관객이 본다는 가정에 기초한 기획이다. 둘째, <트라이브>는 사회가 장애를 받아들이는 방식을 관찰하고 비판하고자 하는 영화가 아니다. 극중 커뮤니티를 더 넓은 세계 안에서 조망하는 그림 자체가 거의 없고, 장애로 말미암은 소외와 극중 사건 사이의 연관은 제시되지 않는다. 시나리오는 청각장애인들의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최소화했고 가끔 등장하는 비장애 인물들조차 소리내어 말을 하는 법이 드물다. 그렇다고 <트라이브>가 청각장애인의 감각에 이입해 그들이 보고 듣는 다른 세계를 스크린에 구현하는 영화라고도 보기 어렵다. 카메라는 어디까지나 경계의 이쪽, 그러니까 관객 자리에서 인물들을 미행하고 구경한다. 착각하기 쉽지만 자막의 부재는 청각장애인의 세계에 우리를 완벽히 끌어들이는 게 아니라 관객과 영화 속 세계 사이에 확고한 경계를 긋는 효과를 낸다. 결국 <트라이브>의 형식이 봉사하는 목적은 하나다. 바로, 음성 대사가 없는, 무성 아닌 무성영화에 대한 도전이다. 미셸 하자나비시우스의 <아티스트>가 역사적(historical) 장르로서 무성영화와 그것의 시대를 친애하는 태도로 재현한다면, <트라이브>는 동시대 일반 범죄영화와 별다르지 않은 이야기를 들리는 대사를 제거하고 찍어보려는 컨셉의 시도다. 그러므로 여기서 청각장애는 소재나 주제라기보다 특수한 스토리텔링의 실험을 위한 조건에 가깝다. <트라이브>와 동일한 학교를 배경으로 촬영된 감독의 단편 <데프니스>(Deafness, 2011)는 이 실험이 슬라보슈비츠키의 매우 오랜 예술적 야망임을 확인시킨다. <트라이브>에서 장애가 없는 일반인들까지 어색하리만큼 말이 없는 까닭도 이로써 설명된다. 터부시되는 것은 말뿐이 아니다. 다섯편의 단편과 한편의 장편영화를 통틀어 음악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심지어 화면 내 음악도 거의 없는 점을 보면 이 감독은 오늘날 영화가 너무 시끄럽다고 느끼는 게 분명하다.

과연 손의 현란한 움직임이 말을 대신하는 <트라이브>에서 나는 평소 영화를 볼 때 원경에 물러서 있던 음향들을 전경에서 듣는 희한한 경험을 했다. 이 새로운 청각적 관람이 영화 시작 5분 만에 내가 매료된 이유 중 하나였다. 세르게이가 낯선 길을 손짓으로 물어 물어 적막한 학교에 당도하는 도입부와 마침 학교에서 진행 중인 소리 없이 왁자지껄한 기념식을 보여주는 장면은 참신한 방식으로 감각을 일으켜 세웠다. 이 밖에도 <트라이브>에는 10년 후에도 기억 속에 건재할 몇 장면이 있다. 낙엽 쌓인 학교 뒤뜰에서 벌어지는 비명도 고함도 없는 격투를 그저 자연의 광경처럼 찍은 대목이나, 관청에 도착할 때부터 나올 때까지 두 인물의 비자 인터뷰가 진행되는 전말을 건물 밖에서 건너다보는 시퀀스가 예다. 모든 인물이 말을 못하는 조건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알리려니 대체로 앵글이 넓어진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그러나 내 사랑은 거기서 그쳤다. 관습은 전복됐고 예술적 하이 컨셉은 충실히 고수됐지만, 선택한 하이 컨셉이 왜 반드시 필요했는지 정당화하는 내용을 충분히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막은 개봉 지역 관객 다수가 모르는 언어가 영화 대사의 대부분을 점할 경우 부가되는 장치다. <트라이브>는 목소리 대신 손놀림을 쓰는 ‘외국어’ 영화이면서도 자막을 배제했다. 인물이 무슨 어휘로 어떤 구체적 의사를 표현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는 통로의 봉쇄는, 인위적으로 ‘무성영화’적 상황을 조성하게 된다. 문제는 다음이다. <트라이브>는 매우 전형적인 갱스터 서사를 따라간다. 척박한 환경에서 어쩔 수 없이 범죄 세계에 가담한 순진한 청년이 사랑 때문에 조직을 배신하고 다시 배신당하는 이야기다. 영화 속의 체험을 쉽고 분명하게 구체화해주는 도구인 말을 포기한 상태에서, 사건과 장면의 연쇄가 익숙하기 짝이 없는 장르영화의 궤도를 답습할 때 관객은 스크린에서 지금 일어나는 일을 해독하기보다 관습적 독법에 몸을 싣고 관람하게 된다. <트라이브>의 창작 과정을 유추해보면 자막을 배제한 형식이 무엇보다 중요했기에, 자연스런 결과로서 자막 없이도 전달이 용이한 시나리오가 도출됐을 가능성도 높다. 어쨌거나 나는 영화가 중반을 넘어서면서 에피소드끼리의 맞물림과 세르게이의 심리가 가진 뉘앙스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를 사랑하게 됐구나, 분노했구나, 복수 하는구나를 미뤄 짐작했을 뿐이다. 예컨대 <트라이브>는 동작과 시선만으로 캐릭터를 묘사하는 재주로 따지면 <폭스캐처>보다 미흡하고, 대사의 도움 없이 독창적 서사를 전개하는 기량은 <빈 집>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좀더 냉정히 말하자면 <트라이브>가 관객에게 무리없이 이해된 이유는 시각적 스토리텔링이 훌륭해서라기보다 예측 가능해서다. 비관습적인 스토리텔링에 대한 연구가, 관습으로부터 영화를 목적지까지 끌고 가는 동력을 취한 역설인 셈이다. 초반 5분의 경이를 뒤로하고 나는 “신기하고 충격적인 대담한 영화”라는 사실만 미덕으로 기억하며 <트라이브>의 상영관을 나왔다. 중반 이후 지켜보아야 했던 신음조차 못 내는 여성의 기나긴 무허가 낙태 신도, 이 영화가 ‘놀라움과 새로움’이라는 가치에 너무 깊이 홀려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키웠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극장에서 볼 수 있는 영화에서 신실한 형식적 실험은 얼마나 드문 행위인가. 더구나 무엇을 보태는 게 아니라 덜어내는 실험은 더 희귀하다. 나는 언젠가 <트라이브>를 자막과 함께 다시 관람함으로써 슬라보슈비츠키 감독의 실험에 기여하고 싶다.

<폭스캐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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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급히 먹는 남자

식습관은 인물의 성격과 상황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 <밀양>의 전도연은 싱크대에 선 채 밥을 먹었다. 브래드 피트는 여러 영화에서 주전부리를 달고 다니는 연기로 구강기적 무방비함을 표현해왔다. <폭스캐처>의 레슬러 마크 슐츠(채닝 테이텀)는 혼자서, 아무거나, 우걱우걱 먹는다. 야외 식탁에서 가족과 화기애애하게 어울려 먹는 형 데이브(마크 러팔로)와 대조적이다. 우리가 보는 마크의 첫 식사 장면은 햄버거를 운전석에 앉아 씹어 넘기는 옆모습이고 두 번째는 즉석 라면에 핫소스를 뿌려 들이켜는 광경이다. 마크의 철저히 고립된 식탁에 마침내 개입하는 것은 형이다. 그러나 형제간의 다정한 식사까진 언감생심이다. 형 데이브는, 경기에서 진 후 좌절로 폭식한 마크의 호텔 방문을 부수고 들어간다. 설익은 감정이 늘 위장에 얹혀 있는 이 투박한 사내에게 사랑하는 형이 줄 수 있는 도움은, 편히 게워내도록 등을 두들겨주는 것뿐이다.